<미국 로드 백과> 조선웅 지음

프롤로그 — 이 책을 쓰기까지

서른 살에 미국으로 건너온 한 남자가, 이십 년이 넘어 이 책을 씁니다

1975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군대부터 직장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글로벌 회사들과 협업을 하고 미국 출장을 다니며 처음으로 더 넓은 세상을 상상했다.

그리고 나는 미국행 결단을 내렸다.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삶의 무대’ 자체를 미국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서툴고,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가진 것은 호기심과 용기뿐이었다. 그 호기심과 용기가 이십 년 넘는 미국 생활을 만들었고, 결국 이 책이 되었다.

미국에서 이민 1세대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많은 직업을 거쳤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그러다 결국 나는 내 안의 본질을 찾았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일. 지금 나는 10년 넘게 미국 여행을 기획하고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여행 기획자가 된다는 것

여행 기획자는 단순히 여행을 기획하고, 관광지를 소개하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화려한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화려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함께.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아래에 있는 불편한 진실도 함께.

뉴욕 타임스 스퀘어 앞에 서면 그 화려함에 압도된다. 하지만 나는 그 화려함과 함께,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노숙자들의 현실도 이야기도 드린다.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선언서 앞에 서면 건국의 아버지들의 위대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그 위대함과 함께, 그 문서를 서명한 사람들 중 41명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도 말씀드린다. 워싱턴 D.C.에서 마틴 루터 킹의 무덤 앞에 서면 그의 꿈에 감동한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도 말씀드린다.

그것이 미국을 정직하게 보는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미화도 비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미국. 위대함과 모순이 공존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언제나 존재하는 나라. 그 복잡함을 받아들일 때 미국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 책이 태어난 이유

여행을 하다 보면 나는 정말 많은 질문을 받는다. ‘이 도시가 왜 이렇게 됐어요?’,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어요?’, ‘미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각해요?’ 그 질문들 하나하나에 내가 아는 것을 다 담아 답하려 했다. 그런데 투어 버스 안에서, 관광지 앞에서, 식당 테이블에서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항상 부족했다. 시간이 부족하고, 공간이 부족하고, 맥락이 부족했다.

That is why I wrote this book. The stories I wanted to tell during the trips but couldn't; the contexts I explained on-site but wanted to dive deeper into; and the answers to the questions that kept coming up across thousands of conversations with Korean travelers while traveling all over the United States. I have woven them all into a single book.

이 책은 여행 안내서가 아니다. 물론 각 챕터 말미에 실용적인 여행 정보를 담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본질이 아니다. 이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한국인의 눈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서른에 미국으로 건너와 이십 년 넘게 이 땅 곳곳을 누빈 한 사람이, 두 나라 사이 어딘가에 서서 바라본 미국의 이야기다.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는 것

한국인의 눈으로 미국을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미국인의 눈으로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미국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독립기념관을 방문해도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 역사인지를 새삼 느끼기 어렵다. 뉴욕의 다양성을 보아도 그것이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임을 실감하기 어렵다.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독립기념관 앞에서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와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겹쳐 보인다. 뉴욕의 이민자들을 보면서 19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온 교민 1세대들이 보인다. 마틴 루터 킹의 무덤 앞에서 4.19 혁명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생각하게 된다. 다른 역사를 가진 사람이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시각이다. 미국을 한국과 비교하고, 미국에서 한국을 발견하고, 한국에서 미국을 다시 보는 것. 두 나라의 이야기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 그 거울을 통해 미국도, 한국도 더 선명하게 보이기를 바란다.

이 책의 독자에게

이 책을 읽는 분들 중에는 미국 여행을 계획 중인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여행 전에 읽어두면 현지에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역사와 맥락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독립기념관을 그냥 오래된 건물로 보는 것과, 250년 전 그 방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를 알고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감동이다.

이미 미국에 살고 계신 교민 분들에게는 우리가 사는 이 나라를 다시 한번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익숙해진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지나치는 거리에 어떤 역사가 새겨져 있는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특별한 선택의 결과인지를 다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미국에 관심은 있지만 아직 가본 적 없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첫 번째 창문이 되기를 바란다. 뉴스에서 보는 미국, 영화에서 보는 미국 너머에 있는 미국. 그 복잡하고 다양하고 모순적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나라를 이 책이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언젠가 미국 땅을 밟게 된다면, 그리고 그 땅 위에서 뭔가를 느끼게 된다면, 그 느낌이 이 책의 페이지 어딘가와 연결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조선웅 씀

 

프롤로그 — 이 책을 쓰기까지

섹션 1 — 미국 동부 지역  |  자유가 선언된 땅, 상처가 새겨진 역사

Chapter 1.  매사추세츠 — 보스턴

Chapter 2.  뉴욕 — 뉴욕시티

Chapter 3.  펜실베이니아 — 필라델피아

Chapter 4.  워싱턴 D.C.

Chapter 5.  버지니아 — 리치몬드

Chapter 6.  플로리다 — 마이애미 & 키웨스트

섹션 2 — 미국 서부 지역  |  자유를 찾아 끝까지 달려간 사람들

Chapter 7.  캘리포니아 — 로스앤젤레스

Chapter 8.  캘리포니아 — 샌프란시스코

Chapter 9.  워싱턴 주 — 시애틀

Chapter 10.  오리건 — 포틀랜드

Chapter 11.  네바다 — 라스베이거스

Chapter 12.  애리조나 — 그랜드캐년 · 피닉스 · 세도나

섹션 3 — 미국 남부 지역  |  상처가 만든 문화, 문화가 만든 영혼

Chapter 13.  루이지애나 — 뉴올리언스

Chapter 14.  테네시 — 내슈빌 & 멤피스

Chapter 15.  조지아 — 애틀랜타

Chapter 16.  텍사스 — 샌안토니오 & 오스틴

Chapter 17.  사우스캐롤라이나 — 찰스턴

섹션 4 — 미국 북부 지역침묵하는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Chapter 18.  일리노이 — 시카고

Chapter 19.  미시간 — 디트로이트

Chapter 20.  와이오밍·몬태나 — 옐로스톤

Chapter 21.  미네소타 — 미니애폴리스

Chapter 22.  오하이오·인디애나 — 콜럼버스

에필로그 — 미국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섹션 1 — 미국 동부 지역

자유가 선언된 땅, 상처가 새겨진 역사

Chapter 1. 매사추세츠 — 보스턴

자유의 돌길 위에서, 한국인은 무엇을 보는가

2013년 10월, 나는 단풍이 든 보스턴을 손님들과 함께 걸었다. 손님들 중에는 서울에서 여행을 오신 일흔을 바라보는 부부가 있었다. 퇴직 기념 여행이라고 하셨다. 남편분은 40년 넘게 교직에 몸담으셨고, 아내분은 약국을 운영하셨다. 두 분 다 평생 일만 하시다가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나셨다고 했다.

공항에서 나를 처음 만나셨을 때, 남편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미국에 이렇게 오래 걸려 올 줄 몰랐어요. 그래도 한번은 와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말 속에 담긴 무게를 느꼈다. 한평생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분이, 인생의 후반에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보스턴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편분은 창밖을 내내 바라보셨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뉴잉글랜드의 가로수들이 고속도로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한참 후에 그분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한국 단풍이랑 비슷하면서도 다르네요.’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미국을 처음 보면서 낯섦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닮은 것을 먼저 찾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여행자의 태도가 그런 것이다.

1. 보스턴이라는 도시 — 미국의 기억이 시작된 곳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1630년, 영국 청교도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그들은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라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세상의 본보기가 될 완벽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거창한 꿈이었고, 당연히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꿈은 이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에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보스턴에 처음 왔을 때, 이 도시가 뉴욕과 얼마나 다른지에 놀랐다. 뉴욕이 수직으로 뻗은 도시라면, 보스턴은 수평으로 깔린 도시다. 고층 건물보다 4~5층 붉은 벽돌 건물이 더 많고,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하며,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조금 다르다. 뉴욕이 모든 것을 향해 돌진하는 도시라면, 보스턴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는 도시다.

지리적으로 보스턴은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중심 도시다. 매사추세츠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70만 명으로 뉴욕에 비하면 작은 도시지만, 그 영향력은 인구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다. 하버드와 MIT를 비롯해 크고 작은 대학들이 밀집해 있어 ‘미국 교육의 수도’라 불리기도 한다. 10월이 되면 단풍과 함께 도시 전체가 깊은 색감을 띠는데, 이 시기가 보스턴을 방문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보스턴의 날씨와 사계절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 중 하나가 보스턴의 겨울이다. 매사추세츠의 겨울은 한국의 서울보다 훨씬 혹독하다.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5도 내외지만, 바닷바람이 더해지면 체감온도는 훨씬 낮아진다. 눈도 많이 온다. 2015년 겨울에는 두 달 만에 2미터가 넘는 눈이 쌓여 도시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반면 가을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뉴잉글랜드 전역이 빨강, 주황, 노랑으로 물든다. 한국의 단풍도 아름답지만 뉴잉글랜드의 단풍은 규모와 색감이 다르다. 드넓은 평야와 완만한 구릉지가 온통 단풍으로 뒤덮이는 광경은,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말문이 막히게 한다. 내가 가장 많이 들은 표현은 ‘그림 같다’는 말이었다. 맞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정말로 그림 같다.

2. 프리덤 트레일 — 발바닥으로 읽는 역사

보스턴을 처음 방문하는 분들과 함께 걷는 첫 번째 코스는 언제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이다. 보스턴 커먼 공원에서 시작해 도시 곳곳을 지나 찰스타운의 벙커힐 기념비까지 이어지는 약 4킬로미터의 붉은 선. 이 선을 따라 걷다 보면 미국 독립혁명의 전 과정이 발 아래에 펼쳐진다.

나는 이 길을 수십 번 걸었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눈 쌓인 겨울에도. 같은 길인데 계절마다, 손님마다, 또 내 나이와 생각이 달라질 때마다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냥 ‘역사적인 장소들’로 보였던 것들이, 나중에는 그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보스턴 커먼 —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

프리덤 트레일의 시작점인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은 1634년에 조성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처음에는 소와 양을 키우는 공유지로 사용되었고, 영국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며,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시민들이 산책하고 아이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그 잔디밭 아래에는 미국 초기의 복잡한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에게 나는 종종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공원이 생긴 게 1634년입니다. 그때 조선은 인조 임금 때였어요.’ 그 말을 들으면 다들 잠시 멍하니 계신다. 우리가 익숙한 조선의 역사 속 시간과 미국의 시간이 갑자기 같은 좌표에 놓이는 순간이다. 역사란 그렇게 연결될 때 비로소 실감이 난다.

폴 리비어의 집과 올드 노스 처치

프리덤 트레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노스엔드(North End)다.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지역으로, 좁은 골목과 낡은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동네로 유명해서 맛있는 이탈리아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다.

이 동네에 폴 리비어(Paul Revere)의 집이 있다. 1680년대에 지어진 이 작은 목조 주택은 보스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폴 리비어는 1775년 4월 18일 밤, 이 집을 출발해 말을 달려 ‘영국군이 온다!(The British are coming!)’고 외치며 렉싱턴까지 달려간 인물이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린 그 유명한 ‘한밤의 질주’다.

집에서 조금 더 걸으면 올드 노스 처치(Old North Church)가 나온다. 1723년에 세워진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폴 리비어의 동료들이 이 교회 꼭대기에 등불 두 개를 걸어 영국군이 바다 쪽으로 온다는 신호를 보낸 곳이다. ‘One if by land, two if by sea.’ 역사 속 한 문장이 이 작은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올드 노스 처치 앞에 서면, 어떤 손님들은 ‘이게 다야?’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높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그냥 평범해 보이는 빨간 벽돌 교회다. 하지만 나는 늘 이렇게 말씀드린다. ‘가장 위대한 순간들은 대부분 가장 평범한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파뉴일 홀과 퀸시 마켓

프리덤 트레일의 중간쯤에 파뉴일 홀(Faneuil Hall)이 있다. 1742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자유의 요람(Cradle of Liberty)’이라 불린다.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대중 연설을 하며 독립 여론을 형성했다. 지금은 관광지이자 시장으로 변해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지만, 건물 2층에는 여전히 역사적인 회의실이 보존되어 있다.

파뉴일 홀 뒤편의 퀸시 마켓(Quincy Market)은 보스턴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식도락 코스다. 1826년에 지어진 긴 건물 안에 보스턴 크램 차우더, 랍스터 롤, 클램 케이크 등 뉴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음식들이 가득하다. 한국 분들에게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역시 랍스터 롤이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랍스터를 이렇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다들 놀라신다.

3. 독립선언서 앞에서 —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프리덤 트레일 중간, 보스턴 시청 앞 광장에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 현장이 있다. 1770년 3월 5일, 영국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발포해 다섯 명이 숨진 사건이다. 지금은 도로 한복판에 조그만 원형 표시만 남아 있다. 차들이 그 위를 무심하게 지나다닌다.

나는 이 표시 앞에서 손님들을 잠시 세운다. ‘여기서 다섯 명이 죽었습니다. 그 다섯 명의 죽음이 독립전쟁의 방아쇠를 당겼어요.’ 그 말을 듣고 도로 한가운데 박힌 작은 원을 다시 바라보는 분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역사란 그렇게, 우리가 발로 밟고 지나가는 곳에 새겨져 있다.

미국 독립혁명을 이야기할 때, 한국 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질문이 있다. ‘미국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독립을 할 수 있었나요?’ 조선은 500년 넘게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독립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뼈저리게 아는 분들이기에 나오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미국의 독립이 ‘빨랐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을 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새로운 지배의 시작이었다. 흑인 노예들에게는 그 ‘독립’이 자신들의 자유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미국 독립’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실제로는 누구의,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한 손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미국 독립도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네요.’ 맞는 말이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위대했지만 불완전했다.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위대함을 존중하는 것 — 그것이 역사를 제대로 읽는 방법이다.

4. 하버드와 MIT — 신화와 현실 사이

보스턴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가 하버드 대학교다. 케임브리지 시에 있는 하버드는 1636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Veritas(진리)’라는 라틴어 교훈을 새긴 붉은 문장, 고딕 양식의 건물들, 넓고 잘 가꿔진 캠퍼스. 처음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사진을 많이 찍으신다.

하버드 야드(Harvard Yard)의 중심에 존 하버드(John Harvard) 동상이 있다. 발을 만지면 하버드에 합격한다는 속설 때문에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나도 처음 이 캠퍼스를 안내할 때는 이 이야기를 웃으며 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손님이 동상의 발을 만지며 ‘우리 손자가 여기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말이 뭔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비리그라는 신화

미국에 사는 교민 부모님들, 그리고 한국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 유학을 고려하시는 분들에게 하버드, MIT, 예일은 일종의 신화다. 그 신화를 이해한다. 나도 이민 초기에 그 신화 속에서 살았다.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그 말은 한국에서 들은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캠퍼스를 수십 번 방문하면서, 나는 그 신화의 이면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하버드 입학생 중 부모가 하버드 동문인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입학 확률이 몇 배 높다. 이것을 ‘레거시 어드미션(legacy admission)’이라 한다. 미국 사회가 ‘능력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계층이 대물림되는 방식 중 하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MIT 바로 옆 찰스강 건너편에는 보스턴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가 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모이는 캠퍼스와, 기본 생활조차 힘든 주민들이 사는 동네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그래도 하버드는 하버드다

그렇다고 해서 하버드가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천 명의 뛰어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환경은 분명히 특별하다. 캠퍼스 안의 도서관, 박물관, 연구 시설은 수준이 다르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형성되는 네트워크는 졸업 후에도 평생을 따라다닌다.

5. 보스턴의 스포츠 — 도시의 심장 소리

보스턴을 이해하려면 스포츠를 빼놓을 수 없다. 보스턴은 미국에서 스포츠 열기가 가장 뜨거운 도시 중 하나다. NFL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MLB의 보스턴 레드삭스, NBA의 보스턴 셀틱스, NHL의 보스턴 브루인스. 이 네 팀 모두 미국 프로 스포츠의 명문팀들이다.

그중에서도 보스턴 레드삭스와 펜웨이 파크(Fenway Park)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12년에 지어진 펜웨이 파크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현재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야구장이다. 좌측 외야 담장이 11미터 높이의 초록색 금속 벽으로 되어 있는데, ‘그린 몬스터(Green Monster)’라고 불린다. 관중석과 필드가 가까워서, 선수들의 표정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한국에서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펜웨이 파크에서 눈을 못 떼신다. ‘이게 진짜 야구장이구나’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사실 펜웨이 파크는 단순한 야구장이 아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스턴 시민들의 희로애락이 쌓인 공간이다. 레드삭스가 86년간의 우승 저주를 깨고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보스턴 시민들이 흘린 눈물의 무게는 단순한 스포츠 감동이 아니었다.

보스턴 마라톤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 보스턴은 전 세계의 달리기 선수들로 가득 찬다. 1897년부터 시작된 보스턴 마라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례 마라톤이다. 42.195킬로미터를 달려 피니시 라인인 보일스턴 스트리트에 도착하는 순간, 수십만 명의 관중이 뜨겁게 환호한다.

2013년 4월, 보스턴 마라톤 결승선 근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세 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사건 이후 보스턴 마라톤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다음 해 2014년 마라톤에는 역대 최다 참가자가 몰렸다. ‘보스턴 강하다(Boston Strong)’라는 구호 아래 도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상처를 딛고 더 강해지는 것, 그것도 미국의 한 얼굴이다.

6. 뉴잉글랜드의 음식 — 바다에서 온 위로

보스턴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음식이다. 뉴잉글랜드는 대서양에 면해 있어 신선한 해산물이 풍부하다. 한국 분들이 특히 좋아하시는 것들이 있다.

랍스터 — 미국 동부의 자존심

랍스터(Lobster). 한국에서는 고급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식재료가 뉴잉글랜드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통랍스터를 삶아서 버터에 찍어 먹는 방식이 가장 전통적이다. 랍스터 롤은 랍스터 살을 버터나 마요네즈로 버무려 핫도그 빵에 넣은 것으로,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뉴잉글랜드의 대표 길거리 음식이다.

나는 손님들과 처음 랍스터를 먹을 때의 반응을 늘 즐긴다. 처음에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시다가, 집게발을 깨고 살을 발라 버터에 찍어 한 입 드시는 순간 ‘아, 이게 이런 맛이구나!’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음식 하나가 여행의 기억을 만든다.

클램 차우더 — 보스턴의 소울푸드

보스턴 클램 차우더(Boston Clam Chowder)는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수프다. 조개와 감자를 크림 베이스로 끓인 걸쭉하고 진한 수프로, 특히 쌀쌀한 날씨에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파뉴일 홀 퀸시 마켓에서는 빵 그릇(Bread Bowl)에 담아주는 클램 차우더를 먹을 수 있는데, 이 조합이 한국 분들에게 특히 인기다.

재미있는 것은, 클램 차우더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보스턴의 클램 차우더는 크림 베이스로 하얗고 진하다. 뉴욕 스타일은 토마토 베이스로 빨갛고 묽다. 두 스타일의 팬들 사이에 오래된 논쟁이 있다. 나는 항상 보스턴 스타일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의 문제다.

던킨 도넛과 보스턴의 커피 문화

스타벅스가 시애틀의 커피라면, 던킨 도넛은 보스턴의 커피다. 던킨 도넛은 1950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보스턴 시민들에게 던킨은 단순한 도넛 가게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다. 아침에 던킨 커피 한 잔 들고 출근하는 것이 보스턴 직장인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한국 분들은 처음에 ‘던킨이 이렇게 유명한 곳이에요?’라고 물으신다. 한국에도 던킨이 있지만 미국에서의 위상은 다르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던킨은 자존심이다. 스타벅스는 비싸고 근사한 커피, 던킨은 우리 동네 커피. 그 소박하고 친근한 이미지가 보스턴 시민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진다.

7. 이민자들의 보스턴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보스턴을 ‘청교도의 도시’, ‘역사의 도시’로만 알고 오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보스턴은 동시에 미국에서 이민의 역사가 가장 풍부한 도시 중 하나다. 아일랜드, 이탈리아, 중국, 베트남, 그리고 한국.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보스턴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보스턴에 정착했다. 당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구인 광고에 ‘NINA(No Irish Need Apply, 아일랜드인 지원 불가)’라는 문구가 버젓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노동자로, 경찰로,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보스턴에 뿌리를 내렸다. 결국 존 F. 케네디라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의 손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보스턴은 케네디의 고향이다.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이 보스턴 항구 근처에 있다.

이 이야기를 드리면, 많은 분들이 한국 이민자들의 이야기와 연결하신다. 1970~80년대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 1세대들도 비슷한 차별과 고난을 겪었다. 말도 서툴고, 문화도 다르고, 얼굴도 다른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몸부림이 오늘날 미국 한인 커뮤니티의 기반을 만들었다.

보스턴의 한인 커뮤니티

보스턴의 한인 커뮤니티는 LA나 뉴욕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그러나 하버드, MIT, 보스턴 대학 등 명문 대학들 주변에 유학생과 연구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케임브리지와 보스턴 사이, 그리고 인근 도시 퀸시(Quincy)에 한인 마트와 식당들이 있다.

교민 손님들과 보스턴을 여행할 때,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미국 어느 도시에 사시든 간에, 보스턴에 오면 뭔가 자신의 삶이 다시 보인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 도시가 가진 역사의 무게, 그리고 그 무게를 딛고 살아온 수많은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8. 렉싱턴과 콩코드 — 총성이 울려 퍼진 그 날

보스턴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렉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가 있다. 1775년 4월 19일, 이곳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이 무기고를 탈취하기 위해 진격하자, 식민지 민병대가 맞섰다. ‘세계에 울려 퍼진 총성(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이라 불리는 그 순간이다.

렉싱턴 배틀 그린(Lexington Battle Green)에 서면, 그날의 민병대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농부들이었던 그들이 총을 들고 세계 최강 영국군에 맞섰다. 무모해 보이지만, 그 무모함이 역사를 바꿨다.

콩코드에는 ‘올드 노스 브리지(Old North Bridge)’가 있다. 다리 옆에 ‘분노한 농부(Minuteman)’ 동상이 서 있다. 한쪽 손에는 쟁기, 다른 손에는 총. 평화로운 농부였지만 자유를 위해 싸움에 나선 사람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나는 이 동상 앞에서 잠시 멈추는 편이다. 역사를 바꾼 것은 언제나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보스턴

보스턴 사람들의 성격

미국 각 지역 사람들의 성격이 다르듯이, 보스턴 사람들에게도 고유한 특성이 있다. 뉴욕 사람들이 빠르고 직접적이라면, 보스턴 사람들은 조금 더 과묵하고 내성적인 편이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친해지면 깊고 진실된 관계를 맺는다.

이 성격은 청교도 정신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말보다 행동, 화려함보다 실용, 자기 과시보다 성실. 그 가치관이 문화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상도 기질과 비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묘하게 일리 있는 비교다.

보스턴의 교통과 MBTA

보스턴의 대중교통은 ‘T’라고 불리는 MBTA(Massachusetts Bay Transportation Authority)가 운영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 시스템으로, 1897년에 개통되었다. 오래된 만큼 낡은 부분도 많고, 자주 지연되기도 한다. 뉴욕 지하철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노선이 많지 않아서 차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은 서울 지하철을 경험하고 오셨기 때문에, 보스턴 MBTA를 보면 아쉬움을 느끼시는 경우가 많다. 서울 지하철이 얼마나 편리하고 효율적인지를 미국에 와서 실감하게 된다. 이것도 여행의 기능 중 하나다. 자기 나라의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손님들이 가르쳐준 주신것들

나는 보스턴을 수십 번 안내하면서, 손님들이 이 도시에서 받는 감동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에 관심 많은 분들은 프리덤 트레일에서 눈을 빛내신다. 자녀 교육에 관심 있는 분들은 하버드 캠퍼스 앞에서 오래 서 계신다. 요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퀸시 마켓에서 이것저것 드시면서 가장 행복해하신다.

어떤 반응이 맞고 틀린 것이 없다. 같은 도시가 사람마다 다른 도시가 된다. 그것이 여행의 신비다. 보스턴은 그 신비를 가장 풍부하게 품고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의 한 마디   보스턴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손님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훨씬 깊은 도시였어요.’ 그 말이 정확하다. 보스턴은 화려하지 않다. 뉴욕처럼 압도하지 않고, 마이애미처럼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알면 알수록 깊어지는 도시다. 미국을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께 나는 항상 뉴욕보다 보스턴을 먼저 권한다. 이 나라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나머지 미국이 훨씬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보스턴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9월 말~10월 중순 (단풍), 5월~6월 (날씨 온화)

주요 관광지

프리덤 트레일, 하버드 캠퍼스, 펜웨이 파크, 보스턴 미술관, 케네디 도서관

꼭 먹어야 할 것

보스턴 클램 차우더, 랍스터 롤, 보스턴 크림 파이

당일 코스 추천

보스턴 커먼 → 프리덤 트레일 → 파뉴일 홀 점심 → 노스엔드 산책 → 하버드 캠퍼스

숙박 추천

백베이(Back Bay) 또는 비컨힐(Beacon Hill) — 도보 관광에 최적

Chapter 2. 뉴욕 — 뉴욕시티

미국이면서 가장 미국답지 않은 도시

뉴욕을 처음 방문하는 한국 분들이 공항에서 나와 맨해튼으로 들어서는 순간, 거의 예외 없이 같은 말을 하신다. ‘정말 뉴욕이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의 이미지가 압축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속에서 수없이 보아온 그 도시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의 감격이다.

나는 그 감격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감격이 착시가 되지 않도록 안내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은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본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지저분하고, 훨씬 불평등하고, 그리고 동시에 훨씬 아름다운 곳이다.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것이 뉴욕이다.

이 도시를 안내해오면서, 나는 뉴욕이 사람마다 전혀 다른 도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온 한국 관광객에게는 꿈의 도시이고, 30년 전 이민 와서 지금도 사는 교민에게는 삶의 전장이며, 20대 예술가 지망생에게는 기회의 땅이고, 노숙자에게는 오늘 밤 비를 피할 지하철역이다. 뉴욕은 그 모든 버전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 챕터에서 나는 그 여러 버전의 뉴욕을 함께 걸어보려 한다. 관광 안내서에 나오는 명소들과, 그 명소들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진짜 뉴욕의 이야기들을. 한국인의 눈으로, 그러나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의 시각으로.

1. 뉴욕이라는 도시 — 숫자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

뉴욕시의 인구는 약 800만 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뉴욕을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울도 약 1,000만 명인데, 서울과 뉴욕이 얼마나 다른가. 숫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뉴욕시는 다섯 개의 자치구(Borough)로 이루어져 있다.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더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에서 ‘뉴욕’이라고 부를 때 보통 맨해튼을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로 맨해튼에 사는 인구는 뉴욕시 전체의 약 20퍼센트다. 나머지 80퍼센트는 다른 네 개 자치구에 산다. 진짜 뉴요커들 중 맨해튼에 사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인 셈이다.

퀸스(Queens)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사는 지역 중 하나다. 퀸스 하나에만 16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된다. 한인들은 플러싱(Flushing)에 밀집해 있고, 그리스인들은 아스토리아(Astoria)에, 남미 이민자들은 잭슨 하이츠 (Jackson Heights)에 모여 산다. 지하철 한 노선을 타면 역마다 전혀 다른 나라를 통과하는 느낌이 든다.

더 브롱스(The Bronx)는 뉴욕에서 가장 가난한 자치구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힙합과 살사 음악이 탄생한 곳이다. 1970년대 브롱스의 폐허 같은 골목에서 흑인 청년들이 턴테이블을 들고 나와 음악을 만들었다. 그 음악이 지금 전 세계를 지배하는 힙합이 되었다. 문화란 종종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을 만들어낸다.

맨해튼의 지리 — 그리드가 만든 도시

맨해튼은 섬이다. 서쪽으로 허드슨강, 동쪽으로 이스트강이 감싸는 남북으로 긴 섬. 길이 약 21킬로미터, 가장 넓은 곳이 약 3.7킬로미터. 이 좁은 섬에 200만 명이 살고, 매일 수백만 명이 출퇴근하러 들어온다.

1811년, 뉴욕시는 맨해튼 전체를 바둑판 모양의 그리드(Grid)로 설계했다. 동서로 가는 길을 스트리트(Street), 남북으로 가는 길을 에비뉴(Avenue)라 했다. 숫자가 커질수록 북쪽이고, 에비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숫자가 커진다. 이 규칙을 알면 맨해튼에서는 지도 없이도 웬만큼 길을 찾을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리드 위를 브로드웨이(Broadway)가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는 것이다. 원래 있던 인디언 트레일 길을 그대로 도로로 만든 것이다. 이 대각선 때문에 그리드와 교차하는 지점마다 삼각형 모양의 작은 광장들이 생겼다. 타임스 스퀘어도 그 중 하나다. 인간이 설계한 바둑판 위를, 자연이 만들어놓은 오래된 길이 가로지르는 것. 뉴욕의 많은 것들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설계와 우연이 뒤섞인 결과물.

뉴욕의 날씨 — 극과 극 사이에서

뉴욕의 날씨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습하며, 봄가을은 훨씬 아름답다.

7월과 8월의 맨해튼은 열섬 현상 때문에 기온이 더 올라간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낮 동안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 내뿜는다. 지하철 역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 빌딩 사이를 통과하지 못하는 바람, 빈틈없이 들어선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늘 없는 거리. 여름 맨해튼은 사우나 같다. 거기다 허드슨 강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까지 더해지면, 체감 온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반면 1월과 2월의 뉴욕은 매섭다. 평균 기온이 영하 2~3도지만, 허드슨강과 이스트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체감 온도를 훨씬 낮춘다. 빌딩 사이 골목을 지날 때 갑자기 돌풍이 치면,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정도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서울 겨울이랑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오시다가 당황하는 이유가 이 바람 때문이다.

뉴욕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단연 가을이다. 10월 초중순, 센트럴파크의 나무들이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뉴욕은 전혀 다른 도시가 된다. 그 계절의 센트럴파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다. 봄의 벚꽃도 아름답지만, 가을의 단풍은 규모와 색감에서 차원이 다르다. 여행 일정을 조율할 수 있다면, 10월의 뉴욕을 강력히 권한다.

2. 맨해튼 — 세계의 심장, 그러나 누구의 심장인가

맨해튼을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경험하는 첫 번째 감정은 압도감이다. 미드타운의 빌딩 숲 사이에 서면, 하늘이 좁아 보인다. 42번가와 5번가 교차로에 서서 사방을 올려다보면, 유리와 철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절벽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모든 것이 크고, 빠르고, 시끄럽다.

자동차 경적 소리, 공사 소음, 지하철 환풍구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바람, 수천 명의 발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통화 소리. 뉴욕은 모든 감각을 동시에 공격한다. 처음 오시는 분들 중 일부는 압도감을 넘어 두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너무 자극이 많아서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뉴욕은 적응이 필요한 도시다.

그런데 며칠을 지내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그 소음에 적응이 된다. 아니, 그 소음이 없으면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뉴욕에는 중독성이 있다. 도시 자체가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뉴욕에서 오래 살다가 한적한 교외로 이사 간 사람들이 ‘너무 조용해서 잠을 못 잤다’고 하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타임스 스퀘어 — 기대와 현실, 그리고 진실

뉴욕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소 중 하나가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다. 42번가와 브로드웨이가 교차하는 이 광장은 밤낮으로 거대한 전광판들이 번쩍이며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교차로 중 하나다. 3층짜리 건물 높이의 코카콜라 광고판, 가득 채운 삼성 전광판, 뉴욕 타임스 빌딩. 낮에도 눈이 부시지만 밤이 되면 더 화려해진다. 주변이 어두워져도 타임스 스퀘어 반경 몇 블록은 전광판 빛만으로 환하다.

연간 방문객만 5,000만 명.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되는 관광지 중 하나다. 12월 31일 자정, 새해맞이 볼 드롭(Ball Drop) 행사를 보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이 이 광장을 채우기도 한다. 그 장면을 TV로 본 한국 분들이 ‘저 자리에 서보고 싶다’고 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가보신 분들의 반응은 대부분 ‘생각보다 춥고,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하고, 생각보다 빨리 끝난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 서봤다는 것 자체가 기억이 된다.

솔직히 말하면, 타임스 스퀘어는 뉴요커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맨해튼에 사는 친구에게 ‘타임스 스퀘어 어때?’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 ‘관광객 천지에 바가지요금, 걷기도 힘들어서 절대 안 가’라는 답이 돌아온다. 나도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저렇게 화려한 곳을 왜 안 가냐고.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니 알겠다. 화려함에도 피로감이 있다. 타임스 스퀘어의 화려함은 그것을 매일 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소음이다.

타임스 스퀘어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코스튬을 입은 캐릭터들 — 엘모, 미키마우스, 슈퍼히어로들 — 이 사진을 찍자고 다가온다. 사진 한 장 찍으면 팁을 요구한다.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보니 특히 가족 여행 분들이 당황하시는 경우가 많다. 미리 아이들에게 설명해두는 것이 좋다.

센트럴파크 — 도시 한가운데 박힌 자연의 기적

미드타운에서 59번가를 건너면 갑자기 세상이 바뀐다. 빌딩 숲이 사라지고 나무들이 나타난다. 센트럴파크(Central Park)다. 맨해튼 한복판에 남북 4킬로미터, 동서 800미터 규모로 펼쳐진 이 공원은 인간이 도시를 설계하면서 만들어낸 가장 현명한 결정 중 하나다.

1858년, 조경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와 칼버트 복스는 이 공원 설계 공모에서 당선되었다. 그들은 당시 이미 맨해튼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를 내다봤다. 빌딩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고, 사람들이 자연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했다. 이 땅을 공원으로 묶어두는 것.

센트럴파크에는 하루 평균 4만 2천 명이 방문한다. 조깅하는 직장인, 개를 산책시키는 주민, 사진을 찍는 관광객,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는 노인,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운 대학생. 센트럴파크는 뉴욕의 모든 계층이 유일하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다. 공원 동쪽 5번가 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그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공원 풍경을 보기 위해 수백억 원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같은 공원 길을 반대편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중산층 가족이, 할렘 (Harlem)에서 지하철 타고 온 흑인 청소년이 함께 걷는다.

나는 센트럴파크에서 한국 손님들을 안내할 때 항상 한 가지를 물어본다. ‘서울에도 이런 공원이 있으면 어떨까요?’ 대부분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사실 서울에는 남산이 있고, 한강 공원이 있다. 다만 맨해튼 한복판, 5번가와 8번가 사이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다. 도시의 심장부에 자연을 넣어두는 것. 그것을 150년 전에 결정한 사람들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맨해튼 스카이라인 — 인간이 만든 산맥

1931년에 완공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은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02층, 높이 443미터. 그리고 그 높이는 단 1년 만에 만들어졌다. 하루 평균 3,400명의 노동자가 매달려 일했고, 하루에 4~5층씩 올라갔다. 지금의 건설 기술로도 쉽지 않은 속도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 건물을 짓겠다는 결정은 무모해 보였다. 실제로 완공 직후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엠티(Empty) 스테이트 빌딩’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뉴욕이 세계의 중심이 되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미국의 자신감과 야망의 상징이 되었다. 킹콩이 이 빌딩 꼭대기에 매달리는 이미지가 전 세계에 퍼진 것도 그즈음이다.

86층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맨해튼 전경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전망대보다 브루클린 쪽에서 맨해튼을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서, 혹은 덤보 지역의 메인 스트리트 끝에서 바라보는 맨해튼 스카이라인은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특히 해 질 무렵, 노을빛이 빌딩들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맨해튼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순간은, 사진으로는 절반도 담기지 않는다.

어느 가을 저녁, 교민 부부와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서 맨해튼 야경을 바라봤다. 20년 전 이민 와서 뉴저지에 자리 잡고 사신 분들이었는데, 맨해튼을 이렇게 외부에서 바라본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남편분이 한참 침묵하다가 말씀하셨다. ‘여기서 살아온 20년이 저 불빛 속에 다 있는 것 같네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뉴욕은 그런 도시다. 살아본 사람에게는 추억이, 처음 온 사람에게는 꿈이 담겨 있는 도시.

3. 한인타운 32번가 — 미국 속의 한국, 한국 속의 미국

맨해튼 32번가, 5번가와 브로드웨이 사이의 한 블록. 좁고 짧은 이 골목이 뉴욕 코리아타운의 심장이다. 한국 식당, 노래방, 한국 마트, 화장품 가게, 한의원, 한국어 학원. 간판도 한국어, 들리는 말도 한국어. 뉴욕 한복판에 서 있지만 서울 어딘가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곳이다.

밤 10시가 지나도 이 골목은 환하고 북적인다. 한국식 바비큐 레스토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노래방에서 누군가의 노래 소리가 새어 나오고, 야식 집 앞에는 줄이 늘어서 있다. 뉴욕 어느 동네도 밤 10시에 이렇게 활기차지 않다. 이 에너지는 분명히 한국적이다.

한국에서 처음 오신 분들은 이 골목에 들어서면 긴장이 풀리신다. 낯선 나라에서 익숙한 언어와 음식을 만나는 안도감. 나는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이 안도감이 여행 내내 지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뉴욕에 왔으면 뉴욕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32번가는 뉴욕 여행의 안식처이지, 뉴욕 여행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32번가의 역사 — 이민 1세대의 땀과 눈물

뉴욕 코리아타운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아계 이민이 급증했고, 한국인들도 본격적으로 뉴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맨해튼 외곽이나 퀸스에 정착했던 한인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32번가를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주로 자리 잡은 업종이 청과물 가게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도매 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받아 저녁 11시까지 가게를 운영하는 고된 일이었다. 영어도 서툴고, 자본도 없고, 미국 사회의 연결망도 없는 이민자들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1980년대 뉴욕의 많은 동네에서 ‘그린그로서(Green Grocer)’ 간판을 단 작은 가게들이 한인 소유였다.

그들이 일한 이유는 하나였다. 자식 교육. 자신은 힘들게 살더라도 아이들만큼은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는 의지. 그 의지는 결실을 맺었다. 이민 1세대 부모들이 청과물 가게에서 번 돈으로 공부한 2세들 중에서 의사, 변호사, 교수, 사업가들이 나왔다. 미국에서 한인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는 이 이민 1세대들의 희생이 밑바탕에 있다.

나는 32번가를 걸을 때마다 그 이민 1세대들을 생각한다. 지금 이 화려한 한국 식당들이 들어선 자리에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새벽부터 밤까지 서 있었을 것이다. 그 발바닥이 지금 이 거리의 기초다.

32번가에서 무엇을 먹을까 — 솔직한 안내

32번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한국식 바비큐다. 테이블 가운데 그릴을 놓고 삼겹살과 갈비를 구워 먹는 방식이 한국과 동일하다. 고기 질도 좋고, 반찬 구성도 충실하다. 현지 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아 주말 저녁에는 외국인 손님들이 절반 이상인 식당도 있다. ‘코리안 바비큐’가 미국에서 하나의 음식 트렌드가 된 것을 뉴욕 32번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두부찌개, 설렁탕, 냉면도 수준급이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한국보다 더 한국 같다’고 하시는 경우도 있다. 이민자들의 음식이 종종 본국 음식보다 더 원형을 보존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음식에 더 진하게 배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가격은 만만치 않다. 뉴욕의 물가 자체가 비싼 데다, 맨해튼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더해진다. 삼겹살 2인분에 40~50달러, 냉면 한 그릇에 20달러 내외. 한국 물가의 세 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뉴욕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경험 자체가 여행의 일부이기 때문에, 한 끼 정도는 충분히 가치 있다.

4. 브루클린 — 뉴욕의 진짜 심장

뉴욕을 이야기할 때 맨해튼만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을 이야기할 때 강남구만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맨해튼이 뉴욕의 쇼윈도라면, 브루클린(Brooklyn)은 뉴욕의 살아있는 현재다. 지금 뉴욕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곳, 새로운 문화가 잉태되는 곳, 다양한 사람들의 실제 삶이 가장 생생하게 펼쳐지는 곳이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1898년에 뉴욕시에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된 도시였다. 지금도 브루클린 사람들은 강한 지역 정체성을 갖고 있다. ‘나는 뉴욕 사람이다’보다 ‘나는 브루클린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맨해튼 사람들이 세련되고 바쁘다면, 브루클린 사람들은 거칠고 솔직하다. 양쪽이 서로를 약간씩 깔보면서 사랑하는 관계가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에 있다.

브루클린 브리지 — 140년의 연결

1883년에 완공된 브루클린 브리지는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현수교다.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고, 14년의 공사 기간 동안 27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설계자 존 로블링(John Roebling)은 공사 중 사고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이 이어받았다가 잠수병을 얻어 현장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워싱턴의 아내 에밀리가 토목공학을 독학해 11년간 현장을 직접 지휘했다. 브루클린 브리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보행자 통로가 차도 위에 놓여 있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왕복 약 2킬로미터, 걸어서 30~40분.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맨해튼 스카이라인과 이스트강의 풍경은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아래로 보이는 강물과 오가는 배들,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많은 손님들이 이 다리 위에서 오래 발을 멈춘다.

한 가지 실용적인 팁을 드리자면, 브루클린 쪽에서 맨해튼 방향으로 건너는 것이 사진 찍기에 더 좋다.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정면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전거 이용자들이 같은 다리 위를 달리는데, 보행자 구역을 침범하면 위험하다. 바닥에 자전거 전용 구역이 표시되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덤보 — 낡은 창고가 뜨거운 예술 지구로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 브루클린 쪽에 도착하면 덤보(DUMBO) 지역이 나온다.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약자다. 맨해튼 브리지 아래쪽이라는 뜻이다. 한때 창고와 공장이 즐비했던 이 지역은 1980~90년대 예술가들이 싼 임대료를 찾아 들어오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넓은 창고 공간을 작업실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덤보는 뉴욕에서 가장 비싼 동네 중 하나가 되었다. 갤러리, 부티크 카페, 고급 레스토랑, 스타트업 오피스들이 들어섰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놓은 힙한 분위기를 자본이 흡수한 것이다. 원래 이 동네를 힙하게 만들었던 예술가들은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났다. 이것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덤보의 메인 스트리트 끝에서 맨해튼 브리지 아치 너머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풍경은 뉴욕에서 가장 많이 찍히는 사진 명소 중 하나다. 이 구도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없이 등장했다. 실제로 서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이른 아침이나 평일에 가는 것을 권한다. 주말 오후에는 같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5. 자유의 여신상 — 상징이 된 이민자의 꿈

뉴욕 항구 한가운데, 리버티 섬(Liberty Island) 위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 높이 93미터(기단부 포함), 오른손에는 횃불, 왼손에는 독립선언서, 발아래는 끊어진 쇠사슬. 1886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했다. 완성까지 프랑스에서 10년이 걸렸고, 분해해서 배로 운반한 후 미국에서 다시 조립했다.

페리를 타고 가까이 다가가면 그 크기에 다시 한번 압도된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 실물은 차원이 다르다. 구리로 만들어진 표면이 바닷바람에 산화되어 지금의 청록색이 되었다. 처음 세워졌을 때는 구리 본래 색깔인 주황빛이었다고 한다.

동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단부까지는 무료, 동상 몸체로 올라가는 티켓은 유료이며 수개월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왕관 부분까지 올라가는 티켓은 더욱 구하기 어렵다. 내부에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물들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섬을 지나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 발걸음들의 기록이 전시실 곳곳에 있다.

여신상 받침대의 시 — 약속과 현실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 안에는 유대계 미국 시인 엠마 라자루스(Emma Lazarus)가 1883년에 쓴 시 「새로운 거인(The New Colossus)」이 새겨져 있다. 그 마지막 부분이 유명하다. ‘지치고 가난한 자들을 내게 보내라. 자유롭게 숨 쉬고 싶어 하는 이들을, 혼잡한 해변에서 내버려진 가련한 자들을. 폭풍에 지친 이들을 내게 보내라. 나는 황금 문 옆에 등불을 들겠다.’

이 시는 미국이 세상을 향해 내민 초대장이다. 가난하고 지치고 버림받은 사람들도 오라는 초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천만 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이 초대를 받아들여 미국 땅을 밟았다. 아일랜드의 기근을 피한 사람들, 동유럽의 박해를 피한 유대인들, 이탈리아의 가난을 피한 사람들. 그들이 미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초대장은 어디에 있는가. 매년 수만 명이 미국 국경을 넘다가 사막에서 목숨을 잃는다. 수십만 명이 추방된다. 난민들이 수용 시설에 갇혀 있다. 여신상 받침대의 시와, 오늘날 미국의 이민 정책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하지만 그 씁쓸함이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정직하게 보는 방법이다.

6. 맨해튼의 빛과 그늘 — 우리가 카메라에 담지 않는 뉴욕

뉴욕 여행 사진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빛나는 것들만 있다. 타임스 스퀘어의 전광판, 맨해튼 스카이라인, 센트럴파크의 단풍, 브루클린 브리지의 야경. 아름답다. 진짜 아름답다. 하지만 뉴욕에는 카메라에 잘 담기지 않는 또 다른 풍경들이 있다.

노숙자 — 가장 부유한 도시의 가장 불편한 진실

뉴욕 지하철역에 내려가면 처음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냄새다. 소독약 냄새와 뒤섞인 사람 냄새, 쓰레기 냄새. 역 구석구석에는 담요를 덮고 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있다. 벤치를 독차지하고, 계단 아래 구석에 짐을 쌓아두고, 환풍구 위에 자리를 잡는다.

뉴욕시에는 현재 6만 명 이상의 노숙자가 있다. 공식 통계가 그렇고, 실제 숫자는 더 많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들이 즐비한 도시에서, 지하철역이 집인 사람이 6만 명이다. 이 숫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에서 처음 오신 분들이 이 장면에 충격을 받으시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 이런 나라예요?’라고 물으신다. 맞다. 미국이 이런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뉴욕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지하철역에도 노숙자들이 있고, 도쿄에도, 파리에도, 런던에도 있다. 다만 뉴욕의 규모와 화려함에 비해 그 격차가 너무 극명하기 때문에 더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뉴욕시는 매년 노숙자 문제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는다. 쉼터를 운영하고, 사회복지사를 배치하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도 숫자는 줄지 않는다. 집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가장 저렴한 스튜디오 아파트의 월세가 최소 1,500달러, 한화로 약 200만 원이다. 최저임금으로 그 집세를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노숙자 문제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다.

젠트리피케이션 — 동네가 변할 때 사람이 사라진다

할렘(Harlem)은 20세기 초반 ‘할렘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재즈, 블루스, 흑인 문학과 예술이 꽃피운 곳이다. 랭스턴 휴스,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이 이 동네에서 예술을 만들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할렘은 쇠퇴했다. 마약과 범죄가 들어오고, 중산층이 떠났다.

1990년대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의 강력한 범죄 소탕 정책 이후 할렘이 안전해지자,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싼 집값과 강한 커뮤니티 문화를 가진 이 동네가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할렘의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커피숍이 생기고, 요가 스튜디오가 생기고, 부유한 백인 젊은이들이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래 살던 흑인 주민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할렘 르네상스를 만들어낸 흑인 문화의 뿌리가 담긴 이 동네에서, 정작 흑인들이 살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것이 젠트리피케이션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동네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그 매력에 자본이 몰리고, 자본은 집값을 올리고, 오른 집값이 원래 사람들을 쫓아낸다. 이 악순환이 뉴욕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나는 손님들과 할렘을 걸을 때 이 이야기를 한다. 흑인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교회들, 재즈 클럽들, 소울 푸드 레스토랑들. 그것들이 얼마나 더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여행이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할렘에서 배운다.

7. 뮤지엄과 문화 — 뉴욕이 세계의 수도인 이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인류의 모든 시간이 한 지붕 아래

센트럴파크 동쪽, 5번가 82번가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줄여서 ‘더 메트(The Met)’라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관 중 하나로, 소장품이 200만 점이 넘는다. 건물 면적만 해도 축구장 수십 개를 합친 것보다 크다.

메트 안에는 이집트 신전이 통째로 들어와 있다. 기원전 15세기에 지어진 덴두르 신전(Temple of Dendur)을 아스완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이집트 정부가 미국에 선물한 것이다. 거대한 유리 온실 같은 공간 안에 2,000년 전 신전이 서 있는 광경은 처음 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든다.

한국관(Korean Art Gallery)도 있다. 조선시대 사랑방을 복원한 공간,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교 회화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뉴욕 한복판에서 우리 선조들의 예술을 만나는 감동은 특별하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것들이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왔을까. 약탈, 판매, 기증 — 그 경로가 무엇이든, 이 작품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메트는 관람료가 ‘권장 기부금(Suggested Donation)’ 방식이다. 뉴욕 주민은 원하는 만큼 낼 수 있고, 타 지역 방문자에게는 30달러를 권장한다. 하루에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획 없이 들어가면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 보고 나올 수 있다. 관심 있는 분야 — 이집트, 유럽 회화, 아시아 미술 등 — 를 미리 정하고 그 구역만 집중적으로 보는 것을 권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 살아있는 예술의 최전선

브로드웨이(Broadway)는 거리 이름이기도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 예술을 총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현재 약 40개의 브로드웨이 공연장이 운영 중이며, 연간 관객이 1,500만 명을 넘는다. 공연 수익만 해도 연간 20억 달러 이상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처음 경험하는 한국 분들은 대부분 공연 전에 걱정을 하신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 즐길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답한다. ‘뮤지컬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100퍼센트 이해 못 해도 80퍼센트는 느낄 수 있어요.’ 실제로 브로드웨이 공연을 처음 보신 분들 중 대부분이 공연이 끝난 후 넋이 빠진 표정을 하신다. 무대 위에서 살아 숨쉬는 퍼포먼스의 에너지는 영어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전달된다.

표를 구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당일 할인 티켓이다. 타임스 스퀘어에 있는 빨간 계단 모양의 TKTS 부스에서 당일 공연 티켓을 최대 50퍼센트까지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단, 인기 공연은 할인 티켓이 없을 수 있고, 좋은 자리는 일찍 매진된다. 부스는 오전 11시에 문을 열고, 인기 공연 티켓을 노린다면 부스 오픈 전에 줄을 서는 것이 좋다.

8. 뉴욕의 음식 — 세계를 한 입에

뉴욕은 미식가들의 천국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음식이 있고, 그것도 그 나라 출신 셰프들이 만들어내는 정통 음식들이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숫자만 해도 도쿄, 파리와 함께 세계 최상위권이다. 어디서 뭘 먹느냐는 뉴욕 여행의 절반이다.

뉴욕 피자 — 종교의 문제

뉴욕에서 피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뉴욕 사람들에게 피자는 정체성의 문제다. 얇고 큰 도우에 진한 토마토 소스와 모짜렐라 치즈. 조각으로 팔아 접어서 손에 들고 걷는 것이 뉴욕 방식이다. 나폴리 이민자들이 가져온 피자가 뉴욕에서 완전히 자기만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좋은 뉴욕 피자집을 찾는 방법은 줄을 보면 된다. 가게 밖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 일단 들어가 볼 만하다. 유명한 곳으로는 브루클린의 디 파라(Di Fara), 맨해튼의 조스(Joe’s), 최근 핫한 루비로사(Rubirosa) 등이 있다. 가격은 한 조각에 5~7달러 내외. 한 조각으로 성인 남성도 배가 찰 정도로 크다.

뉴욕 피자를 처음 드시는 분들 중 일부는 실망하시기도 한다. 한국에서 먹는 두꺼운 도우에 각종 토핑이 올라간 피자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뉴욕 피자는 단순하다. 도우, 소스, 치즈.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 단순함의 완성도가 핵심이다. 제대로 된 뉴욕 피자 한 조각을 접어서 걸으면서 먹는 경험, 그것 자체가 뉴욕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베이글과 델리 — 유대인이 뉴욕에 남긴 것

뉴욕의 아침을 베이글이 지배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들 덕분이다. 구멍 뚫린 도넛 모양의 빵을 끓는 물에 익힌 후 구워내는 방식으로 만드는 베이글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만들 수 있었던 실용적인 빵이었다. 지금 뉴욕 베이글은 크림치즈, 훈제 연어, 케이퍼를 얹어 먹는 아침식사의 상징이 되었다.

델리(Deli), 즉 델리카트슨(Delicatessen)도 유대인 이민자들이 뉴욕에 남긴 문화유산이다. 카네기 델리(Carnegie Deli), 카츠 델리카트슨(Katz’s Delicatessen) 같은 곳들은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다. 파스트라미(Pastrami, 훈제 절임 소고기)를 빵 사이에 두툼하게 끼워 넣은 샌드위치는 뉴욕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양이 어마어마하다. 한국 분들이 처음 보시면 ‘이걸 다 먹으라고요?’라고 놀라신다. 다 먹기가 어려운 양이지만, 그것이 뉴욕 딜리의 스타일이다.

할랄 카트, 첼시 마켓, 스모가스버그 — 거리의 뉴욕

맨해튼 거리 곳곳의 노란 할랄 푸드 카트. 치킨 오버 라이스(Chicken Over Rice)라 불리는, 구운 닭고기를 볶음밥 위에 얹고 흰 소스와 매운 소스를 뿌린 이 음식은 8~10달러에 든든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뉴욕 직장인들의 점심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지만 한 입 먹으면 의외로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의 첼시 마켓(Chelsea Market)은 한때 나비스코 쿠키 공장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실내 푸드 마켓이다. 랍스터 롤 전문점, 스시집, 멕시칸 타코, 프랑스식 마카롱, 수제 아이스크림까지. 다양한 음식 옵션이 한 공간에 있어 일행 중 취향이 다른 분들이 있을 때 특히 편리하다.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스모가스버그 (Smorgasburg)는 뉴욕 최대의 야외 푸드 마켓이다. 100개 이상의 음식 부스가 들어서고, 각 나라의 음식을 소량씩 경험할 수 있다. 라면 버거, 오이 샌드위치, 과일 아이스크림, 한국식 닭꼬치 등 특이하고 창의적인 음식들이 가득하다. 날씨 좋은 날 스모가스버그에서 여러 나라 음식을 조금씩 맛보며 이스트강 변에 앉아 있으면, 뉴욕이 왜 세계의 도시인지를 음식으로 실감하게 된다.

9. 9/11 메모리얼 —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

맨해튼 로어(Lower) 맨해튼,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아메리칸 에어라인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북쪽 빌딩에 충돌했다. 17분 후인 9시 3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175편이 남쪽 빌딩에 충돌했다. 두 빌딩은 약 한 시간 만에 무너졌다. 2,977명이 사망했다.

그날 나는 뉴욕에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뉴욕이 어떠했는지는 교민들을 통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다. 맨해튼 전체에 먼지가 뒤덮였다. 사람들이 마스크도 없이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맨해튼 브리지를 걸어서 건넜다.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어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 공포와 혼란 속에서, 많은 한인 교민들도 그날을 보냈다.

지금 그 자리에 두 개의 거대한 정사각형 분수가 있다.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의 정확한 윤곽 위에 만들어진 이 분수들은, 끝없이 아래로 물이 흘러내린다. 그 중심은 보이지 않는다. 무한히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설계자 마이클 아라드는 이것을 ‘부재 속의 반영(Reflecting Absence)’이라 이름 붙였다. 사라진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그 빈자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수 가장자리에는 사망자 2,977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이름 옆에 때때로 작은 흰 장미가 꽂혀 있다. 생일이거나 기일이거나 가족이 찾아온 날이다. 나는 이 메모리얼을 방문할 때마다 말수가 줄어든다.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냥 서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 교민 어머니가 분수 앞에서 한참 계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이 그날 근처 사무실에 있었어요. 조금만 늦게 출근했어도…’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나도 아무 말을 못 했다. 역사는 교과서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10. 한국인의 눈으로 본 뉴욕

뉴욕 사람들의 성격 — 차가운 것인가, 독립적인 것인가

뉴욕 사람들은 차갑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길에서 말을 걸어도 무시하거나 퉁명스럽게 반응한다고. 한국에서 오신 분들 중 뉴욕 사람들의 무뚝뚝함에 상처받으신 분들도 있다. 친절하게 길을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하더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나는 이 평가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뉴욕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먼저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는 문화’에 가깝다. 800만 명이 좁은 섬에서 살아가려면, 서로의 영역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암묵적 규칙이 필요하다.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 눈이 마주쳐도 웃지 않는 것, 이것이 뉴욕식 상호 존중이다.

하지만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뉴욕 사람들은 놀랍도록 친절할 수 있다. 지하철 역에서 지도를 꺼내 한참 보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 ‘어디 가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짐이 무거운 사람을 보면 계단을 올려주는 사람이 있다. 뉴욕 사람들은 약자에게는 친절하다. 다만 그 친절함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상대방의 바쁜 시간을 빼앗는 것에는 민감하다.

뉴욕 지하철 — 혼돈 속의 질서

뉴욕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불편하고, 가장 더럽고, 그러면서도 가장 매력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이다. 1904년에 개통해 지금까지 운행 중인 노선도 있다. 24시간 365일 운행한다. 세계에서 24시간 운행하는 지하철 시스템은 몇 안 된다.

처음 뉴욕 지하철을 타시는 분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이 노선도의 복잡함이다. A, B, C, D, E, F… 알파벳과 숫자가 뒤섞인 수십 개 노선이 맨해튼을 종횡으로 연결한다. 그런데 같은 노선 번호라도 완행과 급행이 따로 있고, 같은 플랫폼에서 서로 다른 종착역을 가진 열차가 번갈아 온다. 처음에는 미칠 것 같지만, 3~4일 타다 보면 감이 잡힌다.

서울 지하철과 비교하면 확실히 낙후되어 있다. 에어컨이 없는 노선도 있고, 냉방 효율이 떨어지는 노선도 있다. 와이파이는 일부 역에서만 된다. 열차가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잦다. 하지만 뉴욕 지하철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다양성이다. 한 칸에 탄 사람들을 보면, 오페라 하우스에서 갓 나온 것 같은 정장 차림의 사람, 페인트가 묻은 작업복의 노동자, 힙합 의상을 입은 청년, 히잡을 쓴 이슬람 여성, 책을 읽는 노인이 나란히 서 있다. 이 공존이 뉴욕 지하철의 진짜 매력이다.

뉴욕에서 안전하게 여행하는 법

뉴욕이 위험한 도시라는 이미지는 1970~80년대의 것이다. 당시 뉴욕은 재정 파탄 직전이었고, 범죄율이 극도로 높았다. 지금의 뉴욕은 그때와 다르다. 1990년대 이후 범죄율이 대폭 감소해, 지금은 같은 규모의 다른 미국 도시들보다 오히려 안전한 편이다.

그러나 대도시인 만큼 주의는 필요하다. 소매치기는 주로 붐비는 관광지 —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 플랫폼, 관광버스 — 에서 발생한다. 가방은 앞으로 메고, 지갑은 뒷주머니 대신 앞주머니나 안쪽 주머니에 넣는 것이 기본이다.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걷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밤 시간대에 주의할 지역이 있다. 브롱스 남부, 브루클린 일부 지역은 밤에 혼자 다니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맨해튼 미드타운과 로어 맨해튼, 브루클린 덤보와 윌리엄스버그는 밤에도 비교적 안전하다.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걷는 것만 피하면, 대부분의 관광 지역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

저자의 한 마디   뉴욕 투어를 마치고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어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맞는 말이다. 뉴욕은 화려하고 동시에 지저분하고, 자유롭고 동시에 잔인하고, 다양하고 동시에 불평등하다. 그 모순들이 하나의 도시 안에 공존한다. 뉴욕을 온전히 보려면 빛나는 것과 그 그늘을 함께 봐야 한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뉴욕은 한 번 방문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두 번, 세 번 올 때마다 전혀 다른 도시가 보인다. 뉴욕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뉴욕의 가장 큰 매력이고, 내가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뉴욕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4월 말~6월 초 (봄 벚꽃) / 9월 중순~10월 중순 (단풍).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춥고 바람이 강하다

주요 관광지

센트럴파크, 자유의 여신상, 9/11 메모리얼, 브루클린 브리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타임스 스퀘어

꼭 먹어야 할 것

뉴욕 피자 (조각 피자), 베이글 with 크림치즈,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할랄 푸드, 32번가 한국 바비큐

추천 숙박 지역

미드타운(관광 접근성), 첼시(감각적),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현지 분위기)

주의사항

타임스 스퀘어 코스튬 캐릭터 팁 요구 주의. 지하철 야간 혼자 탑승 주의. 소매치기 조심

Chapter 3. 펜실베이니아 — 필라델피아

자유와 모순이 같은 돌 위에 새겨진 도시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도시다. 뉴욕과 워싱턴 D.C. 사이에 끼어 있어 관광객들이 종종 그냥 지나치는 곳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도시에 서봐야 한다.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여기서 서명되었고, 미국 헌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민주주의의 산실이다.

처음 필라델피아를 방문하는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이 있다. ‘뉴욕보다 훨씬 조용하네요.’ 맞다. 필라델피아는 뉴욕의 소음과 혼잡함과는 다른 도시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좁고 아늑한 골목, 곳곳에 박힌 역사의 흔적들. 걷기 좋은 도시고, 생각하기 좋은 도시다.

그런데 필라델피아를 ‘조용하고 안전한 역사 도시’로만 보면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빈곤율이 높은 대도시 중 하나다. 독립선언서가 서명된 건물에서 불과 몇 블록 거리에 미국에서 가장 처참한 마약 위기 현장이 있다. 자유와 이상의 발상지에서, 그 자유와 이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필라델피아는 그 모순 자체다.

나는 이 도시를 안내할 때마다 긴장을 조금 풀고 시작한다. 뉴욕처럼 압도적이지 않아서 손님들이 여유 있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품고 있는 위대함과 모순을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 필라델피아라는 도시 — 미국의 첫 번째 수도

필라델피아(Philadelphia)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왔다. ‘필로스(Philos, 사랑)’와 ‘아델포스(Adelphos, 형제)’의 합성어로, ‘형제애의 도시(City of Brotherly Love)’라는 뜻이다. 1682년 영국 퀘이커 교도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종교적 관용과 평화를 원칙으로 세운 도시다. 당시 다른 식민지들이 종교적으로 배타적이었던 것과 달리, 펜은 다른 종교와 민족도 함께 살 수 있는 땅을 만들고자 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1776년 독립선언서가 서명된 곳이고, 1787년 미국 헌법이 만들어진 곳이며, 1790년부터 1800년까지 미국의 수도였다. 워싱턴 D.C.가 수도가 되기 전까지, 이 도시가 신생 공화국의 심장이었다.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이 이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인구는 약 160만 명으로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다. 뉴욕에서 남서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워싱턴 D.C.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두 도시 사이의 이 위치가 필라델피아를 미국 동부 여행의 자연스러운 중간 기착지로 만든다. 보스턴에서 출발해 뉴욕을 거쳐 필라델피아, 그리고 워싱턴 D.C.로 이어지는 이 동부 여행 루트는 미국 역사 여행의 정석이다.

필라델피아의 지리와 분위기

필라델피아의 도심은 델라웨어강(Delaware River)과 스쿨킬강(Schuylkill River)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윌리엄 펜이 도시를 설계할 때 바둑판 모양의 그리드 구조를 택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맨해튼 설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에서 걷다 보면 뉴욕과 전혀 다른 스케일을 느낀다. 건물들이 낮고, 거리가 넓으며, 사람들의 걸음이 느리다. 유럽 도시를 연상시키는 붉은 벽돌 건물들, 곳곳에 있는 작은 공원들,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뉴욕의 긴장감이 없다. 그 느슨함이 처음에는 낯설지만, 반나절만 걸으면 오히려 편안해진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우리가 미국을 만든 도시다’라는 의식이 있다. 동시에 뉴욕에 비해 덜 알려지는 것에 대한 약간의 열등감도 있다. 필라델피아 이글스(NFL) 팬들의 열기가 뉴욕 자이언츠 팬들보다 더 거칠다는 말이 있다. 그 거칠음 속에는 ‘우리도 있다’는 외침이 담겨 있다.

2. 독립기념관 — 낡은 문서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이유

필라델피아 여행의 중심은 독립기념관(Independence Hall)이다. 1732년에 지어진 이 조지안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 안에서,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서명되었고, 1787년 미국 헌법이 만들어졌다. 이 건물 하나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법적, 정신적 기초를 담고 있다.

처음 이 건물 앞에 섰을 때, 나는 솔직히 기대만큼 압도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높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냥 단정한 붉은 벽돌 건물이다. 뒤에 높은 첨탑이 있지만 그것도 소박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 소박함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다.

건물 안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하나는 독립선언서가 서명된 ‘독립선언 방 (Assembly Room)’, 다른 하나는 헌법 제정 회의가 열린 방이다. 두 방 모두 당시 가구를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초록색 천을 깐 긴 테이블, 나무 의자들, 잉크 항아리. 56명의 대표들이 저 의자에 앉아 영국 왕에게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이 오늘날 미국을 만들었다.

독립선언서 — 서명한 사람들의 이야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6명.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그들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단어로 묶어 신화화하지만, 실제로는 각자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를 가진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존 행콕(John Hancock)은 가장 크고 굵은 글씨로 서명했다. 영국 왕이 안경 없이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이 서명이 당시에 얼마나 위험한 행위였는지를 생각하면, 그 크고 굵은 글씨 속에 담긴 용기와 오기가 느껴진다. 서명자들은 이 문서로 인해 영국에게 반역자로 규정되었고, 전쟁에서 패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서명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70세였다. 피뢰침을 발명하고, 신문을 발행하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독립혁명에 합류한 그는, 서명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반드시 함께 뭉쳐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 따로따로 교수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 유머 속에 담긴 진지함이 이 역사적 순간의 긴장감을 말해준다.

그런데 나는 이 위대한 순간 앞에서 항상 하나의 질문을 품는다. 독립선언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그 선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600명이 넘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서명자 56명 중 41명이 노예를 소유한 주인이었다. ‘모든 인간’의 범위에 그들 자신이 소유한 노예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손님들에게 말씀드리면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 ‘그래도 그 시대에 그 선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지 않나요?’라는 반응과, ‘그러면 그 선언은 위선 아닌가요?’라는 반응. 나는 어느 쪽도 완전히 맞고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위대함과 모순이 같은 인간 안에, 같은 문서 안에 공존한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읽는 방법이다.

한 손님이 독립선언 방에서 한참 서 계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역사가 바뀌었는데, 이 의자들은 그냥 의자네요.’ 나는 그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역사의 현장은 늘 그렇다. 위대한 결정이 내려진 곳이 놀랍도록 평범하다. 그 평범함 속에서 위대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3. 자유의 종 — 금 간 종이 말하는 것

독립기념관 맞은편에 자유의 종(Liberty Bell) 전시관이 있다. 1752년에 만들어진 이 종은 원래 필라델피아 주 의회 건물 탑에 달려 있었다. 독립선언서가 공포될 때, 그리고 이후 중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이 종을 울렸다.

이 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금(균열)이다. 종 표면에 굵은 금이 가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결함이 있었고, 여러 번 다시 주조했지만 결국 금이 갔다. 1846년 조지 워싱턴의 생일을 기념해 종을 치다가 금이 더 커졌고, 그 이후로는 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금 간 종을 볼 때마다 묘한 감동을 받는다. 완벽하지 않은 종. 울릴 수 없는 종. 그런데 그것이 ‘자유의 종’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정직한 상징이 아닐까. 미국이 선언한 자유와 평등도 처음부터 금이 가 있었다. 노예제라는 균열, 원주민 학살이라는 균열, 여성 참정권 배제라는 균열. 그 균열들을 품은 채로 울려 퍼진 자유의 소리.

종에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레위기 25장 10절. ‘이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이 구절은 원래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운 폐지론자들이 이 종에 주목하면서 ‘자유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역설적이게도,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이 만든 종에, 노예 해방 운동이 자유의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에게 나는 이 종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드리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자유의 종 같은 것이 있을까요? 금이 가 있지만 그 금이 오히려 의미를 갖는, 완벽하지 않지만 소중한 상징 같은 것.’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을 나란히 보고 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이상 위에 세워졌고, 그 이상이 얼마나 자주 배반당했는지를 함께 이해하게 된다.

4. 올드시티 — 발 아래 250년의 역사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이 있는 지역을 ‘올드시티(Old City)’라 부른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지역을 걷다 보면, 18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묘한 감각을 느낀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옆에 현대식 카페가 있고, 250년 된 교회 옆에 갤러리가 있다.

엘프레스 앨리 —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골목

올드시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엘프레스 앨리(Elfreth’s Alley)다. 1702년부터 사람이 살아온 이 좁은 골목은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해온 거리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폭이 3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골목 양옆으로 작은 붉은 벽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금도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집들 크기가 현대 기준으로는 매우 작다. 방 두세 개에 부엌 하나. 18세기 노동자 가정이 살던 집이다. 이 집들이 300년 넘게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역사를 지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매년 ‘돌아보기 날(Fete Day)’에는 집주인들이 집을 개방해 방문객들에게 내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이 골목에서 종종 ‘북촌 한옥마을 같다’고 하신다. 오래된 집들이 좁은 골목에 늘어선 모습이 비슷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북촌은 관광지로 정비되어 실제 주민이 줄어드는 반면, 엘프레스 앨리는 여전히 실제 생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 살아있음이 이 골목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크라이스트 처치 — 건국 아버지들이 기도하던 곳

엘프레스 앨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가 있다. 1695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등 건국의 아버지들 여럿이 예배를 드리던 곳이다. 지금도 현역 교회로 운영되고 있어, 일요일 예배 시간에 오면 현대 신도들이 건국의 아버지들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

교회 옆 묘지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묻혀 있다. 묘비는 단순하다. ‘Benjamin and Deborah Franklin.’ 이름만 새겨진 단순한 돌판. 세상을 바꾼 발명가이자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 사람의 무덤치고는 너무 소박하다. 미국의 건국 세대는 화려한 무덤보다 살아있을 때의 업적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묘비 위에 동전들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잘 쓰인 푼돈이 큰 돈이 된다(A penny saved is a penny earned)’라는 프랭클린의 유명한 말에서 유래한 전통이다. 방문객들이 동전을 던져두고 간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프랭클린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흐뭇해하실 것 같죠?’라고 말하곤 한다. 어김없이 웃으신다.

5.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로키 계단 — 두 개의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미술관이다. 1876년에 설립된 이 미술관은 페어마운트 파크(Fairmount Park) 언덕 위에 그리스 신전 스타일로 웅장하게 서 있다. 르누아르, 세잔, 피카소, 뒤샹의 작품들을 비롯해 아시아, 중동, 유럽, 미국의 미술품 24만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미술관에 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미술관 앞 72개의 계단이다. 영화 ‘로키(Rocky, 1976)’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달려 올라간 그 계단. 계단 아래에는 로키 발보아의 동상이 서 있다. 매일 수백 명이 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며 양 팔을 번쩍 들고 로키처럼 포즈를 취한다.

로키가 필라델피아의 상징이 된 이유

1976년에 만들어진 영화 로키는 필라델피아를 배경으로 한 복서의 이야기다. 무명의 복서 로키 발보아가 챔피언과의 경기를 앞두고 새벽마다 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는 장면이 영화의 핵심 장면 중 하나다. 입장에서, 재미라는 면에서 로키는 탁월한 영화였지만, 그것이 이렇게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로키는 필라델피아의 정서를 담고 있다. 뉴욕의 화려함이나 보스턴의 지성이 아닌, 가난하고 거칠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빈곤율이 가장 높은 대도시 중 하나다. 많은 시민들이 로키처럼 어렵고 불리한 조건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로키는 자신들의 이야기다.

나는 이 계단 앞에서 손님들에게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미술관 계단이 미술 작품보다 더 유명해진 곳은 세상에 여기뿐일 겁니다.’ 그 말에 다들 웃으신다. 그리고 어김없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신다. 70대 할머니도 달려 올라가시는 것을 봤다. 정상에 올라 양 팔을 번쩍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으시는 그 표정이 나는 좋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로키다.

6. 필라델피아의 음식 — 치즈스테이크가 도시를 대표할 때

필라델피아에도 그 도시만의 음식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필라델피아 치즈 스테이크 (Philly Cheesesteak). 얇게 썬 소고기를 그릴에 볶아 호기(hoagie) 빵 안에 넣고 치즈를 얹은 이 샌드위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에게 자존심의 문제다.

팻츠 대 제노스 — 뉴욕 피자 논쟁보다 더 진지한

필라델피아에는 치즈스테이크의 원조를 자처하는 두 가게가 있다. 팻츠 킹 오브 스테이크(Pat’s King of Steaks)와 제노스 스테이크(Geno’s Steaks). 두 가게는 불과 건너편에 마주 보고 있다. 1930년에 팻 올리비에리가 처음 치즈스테이크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고, 제노스는 1966년에 문을 열었다.

두 가게의 팬들 사이에는 진지한 논쟁이 있다. 팻츠는 훨씬 오래되었고 원조의 자부심이 있다. 제노스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유명하다. 어느 쪽이 더 맛있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손님들에게 두 곳 다 가보시라고 권한다. 반 개씩 사서 비교해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비교 자체가 필라델피아 경험의 일부다.

치즈스테이크를 주문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위드(Whiz)’라고 하면 치즈 소스(치즈 위즈)를 얹어주고, ‘위다웃(Witout)’이라고 하면 양파 없이 준다. 현지 방식으로 주문하려면 ‘원 위드(One Wit)’라고 하면 된다. 치즈 위즈와 양파를 함께 달라는 뜻이다. 처음에 이 표현을 가르쳐드리면 다들 어색해하지만, 막상 가게 앞에서 ‘원 위드!’ 하고 외치시면 뿌듯해하신다.

리딩 터미널 마켓 — 150년의 시장

1893년에 문을 연 리딩 터미널 마켓(Reading Terminal Market)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실내 시장 중 하나다. 기차역 아래에 만들어진 이 시장은 지금도 하루 수천 명이 찾는다. 아미쉬(Amish) 공동체에서 직접 가져온 유기농 채소와 수제 빵, 신선한 해산물, 치즈, 고기, 각국의 음식 부스들이 가득하다.

아미쉬(Amish)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독특한 존재다.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17세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로, 전기도 자동차도 사용하지 않는다. 리딩 터미널 마켓에 오면 검은 옷에 마차를 타고 오는 아미쉬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 옆에, 전기가 없는 집에서 온 사람이 신선한 채소를 팔고 있다. 이 장면 자체가 미국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리딩 터미널 마켓에서 한국 분들이 특히 좋아하시는 것은 더치 에그 롤(Dutch Egg Roll)이다. 아미쉬 스타일로 만든 두툼한 에그 롤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다. 줄이 항상 길지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시장 안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시식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7. 켄싱턴 — 미국에서 가장 아픈 거리

필라델피아를 이야기하면서 켄싱턴(Kensington)을 빠뜨리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독립기념관에서 북쪽으로 약 5킬로미터. 미국에서 마약 위기가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나다. ‘켄싱턴 애비뉴(Kensington Avenue)’는 미국 마약 위기의 상징적인 거리가 되었다.

나는 손님들을 켄싱턴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안전 문제도 있지만, 그것이 관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화려한 독립기념관만큼이나 켄싱턴의 현실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켄싱턴은 원래 노동자들의 동네였다. 19세기에는 섬유 공장들이 즐비한 산업 지대였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정들이 모여 살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공장들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동네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오피오이드(opioid) 계열 마약이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켄싱턴은 그 위기의 최전선이 되었다.

오피오이드 위기는 미국 사회 전체의 문제다. 제약 회사들이 중독성 강한 진통제를 ‘안전하다’며 과잉 처방하도록 의사들을 유도했고, 그 처방전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싼 마약(헤로인, 펜타닐)으로 넘어갔다. 이 위기로 매년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다.

자유의 종이 있는 거리에서 5킬로미터. 그 짧은 거리가, 독립선언서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상징한다. 필라델피아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도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이 거리가 있다는 것을, 미국을 제대로 보려면 함께 알아야 한다.

8. 필라델피아의 한인 커뮤니티와 교민들

필라델피아의 한인 커뮤니티는 뉴욕이나 LA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그러나 의미 있는 커뮤니티가 있다. 주로 필라델피아 북서쪽 교외 지역인 체리힐(Cherry Hill, 뉴저지)과 엘킨스 파크(Elkins Park) 지역에 한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한국 마트와 식당들이 있어 한국 음식을 크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드렉셀 대학교, 템플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 등 여러 대학이 있어 한국 유학생들도 상당수 거주한다. 특히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University of Pennsylvania)는 아이비리그 대학으로, 한국 유학생들에게 높은 인기를 갖고 있다.

교민 손님들과 필라델피아를 방문할 때, 나는 종종 독립기념관을 보고 난 후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민 1세대로 이 나라에 와서 살아온 분들이, 미국의 독립 역사를 보고 나서 하시는 말씀들이 있다. ‘이 사람들도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걸 만들었네요.’ 그 말 속에 자신의 이민 생활과 이 나라의 역사가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연결이 일어날 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vs. 서울 — 수도를 옮긴 두 나라

필라델피아를 안내하면서 내가 자주 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도 수도를 옮긴 나라라는 것이다. 처음 수도는 뉴욕이었다가, 필라델피아로 옮겼다가, 지금의 워싱턴 D.C.로 옮겼다. 그 결정 뒤에는 남부와 북부 주들 사이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다. 경제의 중심인 북부 도시들의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남부와 북부 중간쯤 되는 위치에 새 수도를 만들기로 합의한 것이다.

한국도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 집중 현상을 완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서였다. 미국의 수도 이전 결정과 한국의 행정수도 이전, 두 결정 모두 정치적 타협과 지역 균형의 고민이 담겨 있다. 250년의 시간이 다르고 규모도 다르지만, 인간이 도시를 설계하고 권력을 분산하려는 고민은 비슷하다.

필라델피아 이글스와 필라델피아 사람들

NFL 필라델피아 이글스(Philadelphia Eagles)는 미국에서 가장 열성적인 팬덤을 가진 팀 중 하나다. 이글스가 2018년 처음으로 슈퍼볼에서 우승했을 때,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새 축제를 벌였다. 가로등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 오랜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은 폭발이었다.

왜 그렇게 열성적인가. 뉴욕에 눌려 사는 도시, 뉴욕이나 보스턴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보상 심리가 스포츠에 투영된다. ‘우리도 최고다’를 가장 크게 외칠 수 있는 것이 스포츠다. 그 열기가 때로는 과격해지기도 하지만, 그 뒤에는 도시에 대한 진심 어린 애착이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하루를 보내는 법

필라델피아는 뉴욕이나 워싱턴 D.C.에 비해 여행자들이 상대적으로 짧게 머무는 경향이 있다. 동부 투어 일정에서 1박 2일, 혹은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하루 온전히 이 도시에 시간을 쓸 것을 권한다.

오전에는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부터 시작한다. 이른 아침에 가면 사람이 많지 않아 여유 있게 볼 수 있다. 성수기에는 독립기념관 입장이 시간제 예약제로 운영되므로, 미리 온라인으로 무료 예약하는 것이 필수다. 오전 중에 엘프레스 앨리와 크라이스트 처치를 걸어서 둘러본다.

점심은 리딩 터미널 마켓에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각자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고, 가격도 합리적이다. 오후에는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로키 계단을 방문한다. 계단을 달려 올라가며 사진을 찍는 것은 필수 코스다. 저녁은 팻츠나 제노스에서 치즈스테이크 한 번, 올드시티의 레스토랑에서 한 번. 두 곳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일정이 여유롭다면 두 곳 모두.

저자의 한 마디   필라델피아를 떠나면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이 있다. ‘와봐서 다행이에요. 그냥 지나칠 뻔했어요.’ 그 말이 맞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동부 여행에서 뉴욕이나 워싱턴 D.C.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발바닥으로 느끼고 싶다면, 독립선언서의 이상과 그 이상이 얼마나 자주 배반당해왔는지를 함께 보고 싶다면, 필라델피아는 그 어떤 도시보다 솔직한 교사가 되어준다. 나는 이 도시를 올 때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여행의 힘이다.

필라델피아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4월~6월, 9월~11월.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눈이 오기도 한다. 봄과 가을이 걷기에 가장 좋다

주요 관광지

독립기념관, 자유의 종, 필라델피아 미술관(록키 계단), 엘프레스 앨리, 반스 파운데이션

꼭 먹어야 할 것

팻츠 킹 오브 스테이크 (Pat’s King of Steaks) 또는 제노스(Geno’s Steaks), 소프트 프레첼, 터키힐 아이스크림

당일 코스

독립기념관 → 자유의 종 → 엘프레스 앨리 → 리딩 터미널 마켓 점심 → 필라델피아 미술관

숙박 추천

센터시티(Center City) — 주요 명소 도보 접근.

올드시티(Old City) — 역사 지구 인접

Chapter 4. 워싱턴 D.C.

이상을 설계한 도시, 권력이 살아 숨쉬는 곳

워싱턴 D.C.는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방식으로 태어난 도시다. 도시가 먼저 생기고 수도가 된 것이 아니라, 수도가 되기 위해 처음부터 설계된 도시다. 1790년, 미국 의회는 아무것도 없는 포토맥강 연안의 습지에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종이 위에 그림을 먼저 그리고 그 위에 도시를 얹은 것이다.

그 결정에는 깊은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경제 중심지인 북부 도시들(뉴욕, 필라델피아)에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려는 남부 주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새 공화국의 수도는 기존 도시들의 편견에서 벗어난 순수하게 새로운 공간이어야 한다는 건국 세대의 이상주의가 맞물렸다. 워싱턴 D.C.는 그 타협과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나는 워싱턴 D.C.를 처음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이 도시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동시에 봐야 합니다. 하나는 이 나라가 꿈꿨던 이상, 다른 하나는 그 이상이 어떻게 왜곡되고 배반당했는지.’ 그 두 가지를 함께 보지 않으면, 워싱턴 D.C.는 그냥 멋있는 기념관들의 모음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함께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지금을 이해하는 열쇠가 보이기 시작한다.

워싱턴 D.C.에서 나는 말이 많아진다.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이 도시가 던지는 질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도시에서는 감탄사가 많이 나오는데, 워싱턴 D.C.에서는 질문이 많이 나온다. 그것이 이 도시의 힘이다.

1. 워싱턴 D.C.라는 도시 — 권력의 해부학

워싱턴 D.C.는 미국의 어느 주(State)에도 속하지 않는다. D.C.는 ‘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다. 콜럼버스의 이름을 딴 특별 자치 구역. 이것은 단순한 행정 구분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가 있다. 수도가 특정 주에 속하게 되면 그 주가 연방 정부에 불균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건국 세대의 우려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이 결정의 부작용이 있다. 워싱턴 D.C.에 사는 약 70만 명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없었다. 196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통령 선거권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도 연방 의회에 투표권 있는 의원을 가질 수 없다. 미국의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 완전한 민주주의적 대표권을 갖지 못하는 역설. 이것도 미국의 민낯이다.

워싱턴 D.C.의 인구 구성도 흥미롭다. 주민의 약 45퍼센트가 흑인이다. 미국 수도의 중심부에서 흑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흑인들이 이 도시 건설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와 연결된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노예였다. 그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이 도시의 인구 구성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도시 설계 — 프랑스 군인이 그린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도시 설계는 프랑스 출신 군인 피에르 샤를 랑팡(Pierre Charles L’Enfant)이 맡았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설계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넓은 대로와 방사형 도로, 그리고 공원과 광장들을 배치한 웅장한 도시를 구상했다. 국회의사당이 도시 중앙에, 그 주변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대로들. 이 구조는 지금도 워싱턴 D.C.의 기본 골격이다.

랑팡의 설계는 단순한 도시 계획이 아니었다. 권력의 시각화였다. 넓고 직선적인 대로, 웅장한 공공건물들, 잘 정돈된 광장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질서와 이성을 상징했다. ‘우리는 유럽의 왕정과 다르다. 우리는 이성과 법에 따라 통치되는 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을 건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랑팡은 결국 해고되었다. 독립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당시 토지 소유주들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의 원안은 이후 다른 사람들이 수정하고 완성했다. 랑팡은 가난하게 죽었고, 수십 년간 거의 잊혀졌다가 나중에야 재평가받았다. 그의 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설계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다.

2. 내셔널 몰 — 미국의 거실

워싱턴 D.C.의 심장부는 내셔널 몰(National Mall)이다. 링컨 기념관에서 국회의사당까지 동서로 약 3킬로미터 뻗은 이 넓은 잔디밭은 미국의 거실이라 불린다. 양쪽으로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이 늘어서 있고, 중간에 워싱턴 기념탑이 서 있으며, 한쪽에는 반영못(Reflecting Pool)이 하늘을 담고 있다.

내셔널 몰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링컨 기념관 앞 계단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를 외쳤다. 1969년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수십만 명이 이곳을 가득 채웠다. 2009년 버락 오바마 첫 취임식에 약 180만 명이 모였다. 역사 교과서에서 읽은 그 장면들이 일어난 바로 그 잔디밭을 걷는 것이다.

워싱턴 기념탑 — 하늘을 찌르는 미국의 자존심

내셔널 몰 중앙에 하늘 높이 솟은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은 높이 169미터의 석조 오벨리스크다. 완공된 188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단순하고 거대한 탑은 어디서 봐도 워싱턴 D.C.의 기준점 역할을 한다.

가까이서 보면 탑 중간쯤에 색깔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 1848년에 공사를 시작했다가 남북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876년에 재개하면서 다른 곳에서 채석한 대리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통일된 완벽함을 원했지만, 역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음새가 지금도 탑 표면에 남아 있다. 마치 자유의 종의 균열처럼, 이 이음새도 완벽하지 않은 미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탑 꼭대기의 끝부분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완공 당시인 1884년에 알루미늄은 금보다 비쌌다. 가장 귀한 금속으로 탑의 정점을 장식한 것이다. 지금 알루미늄은 흔한 금속이 되었지만, 그 시절의 선택이 탑 꼭대기에 남아 있다. 역사는 그렇게 지나간 시대의 가치관을 물질 속에 새겨둔다.

반영못과 링컨 기념관 — 미국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거울

워싱턴 기념탑 서쪽으로 길게 뻗은 반영못(Reflecting Pool). 그 끝에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이 있다. 반영못의 잔잔한 수면에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관이 좌우 대칭으로 반사된다. 이 풍경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경관 중 하나로 꼽힌다.

링컨 기념관은 1922년에 완공된 그리스 신전 양식의 건물이다. 36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데, 링컨이 사망할 당시 미국의 주 숫자인 36개를 상징한다. 내부에는 거대한 링컨 좌상이 있다. 높이 5.8미터의 이 석상 앞에 서면,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링컨의 눈이 내셔널 몰 너머 국회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다.

링컨 기념관 앞 계단에 앉아 반영못 너머로 워싱턴 기념탑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워싱턴 D.C.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특히 이른 아침이나 저녁 노을 질 무렵, 반영못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시간. 그 순간 이 거대한 이상의 도시가 갑자기 아름답고 슬프고 복잡하게 다가온다. 손님들도 그 앞에서 오래 말을 잃는다.

서울에서 오신 70대 부부와 링컨 기념관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켰다고 하시던 남편분이 링컨 좌상을 오래 바라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노예를 해방했다고 배웠는데, 직접 보니 다르네요. 이게 진짜구나 싶어요.’ 나는 그 ‘진짜’라는 말의 무게를 느꼈다. 역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앉아서, 느끼는 것이다.

3. 백악관 — 권력의 집, 그러나 국민의 집

백악관(White House)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가까이 갈 수 없는 건물이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1600번지, 1800년 존 애덤스 대통령이 처음 입주한 이후 220년 넘게 미국 대통령의 집이자 집무실이었다.

처음 백악관 앞에 서는 분들이 대부분 하시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작네요.’ 맞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작다. 하지만 그것이 백악관의 매력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의 중심이 이렇게 소박하다는 것.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이나 영국 버킹엄 궁전의 위압감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왕이 아니라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사는 집이다’라는 공화국 정신이 건물 크기에도 반영되어 있다.

백악관의 역사 — 불태워지고 다시 세워지다

백악관은 한 번 불에 탄 적이 있다. 1814년, 영국군이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백악관을 불태웠다. 미영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다.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부인 돌리 매디슨은 영국군이 들이닥치기 직전,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떼어내 피신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불타고 남은 벽을 흰 페인트로 칠해 재건한 것이 ‘백악관(White House)’이라는 이름의 유래라는 설이 있다.

이 이야기를 손님들에게 드리면 다들 놀라신다. ‘미국 수도가 적군에게 점령된 적이 있었어요?’ 있었다. 그것도 건국 후 불과 38년 만에. 지금 우리가 압도적인 군사력의 상징으로 보는 미국도, 한때 수도가 불태워지는 굴욕을 경험했다. 모든 강대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역사는 늘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백악관 앞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는 항상 시위대가 있다. 핵무기 반대, 기후변화 대응 촉구, 이민자 권리 요구, 낙태권 옹호 또는 반대. 시위 내용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누군가가 항상 그 앞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 시위들이 백악관의 가장 중요한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의 집 앞에서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미국에서 나는 수십 년을 살면서 시위를 막는 경찰을 본 적이 없다.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하면 제지하지만, 평화적인 시위는 백악관 바로 앞에서도 허용된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 중 일부는 이 장면에서 광화문 광장의 촛불 집회를 떠올리신다. 권력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시민들. 그 행위가 민주주의의 근본이라는 것을, 워싱턴 D.C.에서 한국 분들이 확인하시는 순간이 있다. ‘우리도 저렇게 했잖아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맞다. 그 ‘저렇게’가 민주주의다.

4. 국회의사당 — 민주주의의 건물, 그 복잡한 이야기

워싱턴 D.C.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는 것은 국회의사당(United States Capitol)의 돔이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돔은 높이 88미터, 무게는 4,000톤이 넘는다. 내셔널 몰 동쪽 끝, 언덕 위에 서 있어 어디서든 보인다. 미국의 입법부, 상원과 하원이 이 건물에서 법을 만든다.

국회의사당도 1814년 영국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지금의 돔은 남북전쟁 중인 1863년에 완성되었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건설을 계속한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결단이었다. ‘공사를 계속하는 것이 우리가 연방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의 말 그대로, 돔 완공은 분열된 나라가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2021년 1월 6일 — 민주주의가 흔들린 날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시민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으로 쳐들어갔다. 창문이 깨지고 문이 부서졌다. 의원들이 대피했다. 다섯 명이 사망했다.

나는 이 사건을 손님들에게 반드시 이야기한다. 국회의사당 앞에 서면서, 그 아름답고 위엄 있는 건물에 폭도들이 들이닥친 날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건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 건물이 상징하는 가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의지로 지켜진다. 그 의지가 흔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2021년 1월 6일이 보여주었다.

한국 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드리면 여러 반응이 나온다. ‘그래도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라는 충격, ‘민주주의가 어디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 ‘그래도 결국 막아냈잖아요’라는 안도. 세 반응 모두 맞다. 민주주의는 취약하고, 그래서 더 소중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지켜야 한다.

5. 스미소니언 박물관 — 세계 최대의 지식 창고

내셔널 몰 양옆으로 스미소니언 재단(Smithsonian Institution) 소속 박물관들이 늘어서 있다. 항공우주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미국 역사박물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미술관들. 총 19개의 박물관과 동물원을 운영하는 스미소니언은 세계 최대의 박물관 복합체다. 그리고 모두 무료다.

스미소니언이 무료라는 사실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기부금 방식이지만 비용이 들고, 런던 대영박물관도 무료지만 특별 전시는 유료다. 스미소니언은 모든 상설 전시가 완전 무료다. ‘지식은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원칙이 이 무료 정책 뒤에 있다.

항공우주박물관 — 인류가 하늘을 정복한 이야기

스미소니언 박물관들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국립 항공우주박물관(National Air and Space Museum)이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첫 번째 비행기 ‘플라이어(Flyer)’가 이곳에 있다. 실제 목재와 천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비행기 앞에 서면, 인간이 처음 하늘을 날았을 때의 그 순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선 모듈도 이곳에 있다. 1969년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타고 달 표면에 내려앉은 바로 그 기계. 표면에 달 먼지가 아직 남아 있다. 나는 이 기계 앞에 설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이게 정말 달까지 갔다 온 물건이구나. 1969년에. 지금 기준으로도 놀라운 기술로 만들어진 이 기계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을 해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항공우주박물관에서 특히 관심을 보이시는 것 중 하나가 한국전쟁 관련 전시물이다. 한국전쟁에 사용된 F-86 전투기, 당시 전투 기록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그 앞에서 말이 줄어든다. 그냥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연결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 — 가장 용감한 박물관

2016년에 문을 연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NMAAHC)은 스미소니언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예제와 그 유산, 흑인 민권 운동,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와 예술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이 박물관은, 미국이 자신의 가장 어두운 역사를 국립 박물관으로 만든 용기의 산물이다.

박물관 지하층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는 구성이다. 가장 아래층에는 노예제의 역사가 있다. 실제 노예선의 구조를 재현한 공간, 노예들이 팔렸던 경매대, 노예들의 족쇄. 그 공간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흑인 방문객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백인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마주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시대가 앞으로 온다. 재건 시대, 짐 크로우 법, 할렘 르네상스,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 현재까지. 그리고 최상층에는 음악, 스포츠, 예술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미국 문화에 기여한 것들이 전시된다. 재즈, 힙합, 블루스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국 문화가 없었다는 것을 이 박물관이 보여준다.

나는 이 박물관을 손님들에게 꼭 추천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반나절은 써야 하는 곳이다. 무겁고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중요하다.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약간의 불편함을 동반한다.

6. 내셔널 몰의 기념비들 — 미국이 기억하는 방식

내셔널 몰과 그 주변에는 수십 개의 전쟁 기념비와 역사적 인물 기념비들이 있다. 그 기념비들을 걸으면서 보는 것이 워싱턴 D.C. 여행의 핵심이다. 각 기념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면, 미국이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가 보인다.

한국전쟁 기념비 — 잊혀진 전쟁의 기억

링컨 기념관 옆, 반영못 남쪽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가 있다. 1995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19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군인 조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비를 입고 소총을 들고 경계 태세를 취한 군인들이 사각형 풀밭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다. 밤에 조명이 켜지면 더욱 인상적이다.

기념비 옆 검은 화강암 벽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2,500여 개의 얼굴. 화강암 표면에 기묘하게 반사되어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그 얼굴들 앞에서, 나는 항상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의 표정을 살핀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 기념비 앞에서 감정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전쟁을 기억하시는 연세 드신 분들은 더욱 그렇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살려줬어요’ 라고 하신 분도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리는 한국전쟁이, 한국 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이 기념비 앞에서 그 간극이 느껴진다.

기념비 바닥에 새겨진 문구가 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이 짧은 문장 앞에서 많은 분들이 발을 멈춘다. 그 자유를 위해 지불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이 기념비는 말하고 있다.

베트남전 기념비 — 검은 벽이 말하는 것

한국전쟁 기념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베트남 참전 기념비(Vietnam Veterans Memorial)가 있다. 1982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당시 예일대 건축과 2학년생이었던 마야 린(Maya Lin)이 설계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21세였고,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기념비는 단순하다. 검은 화강암 벽이 V자 형태로 땅에 파고들어간 구조. 그 벽면에 베트남전쟁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미군 58,318명의 이름이 알파벳 순이 아닌 사망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처음 세워졌을 때 많은 비판이 있었다. ‘전쟁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왜 이렇게 어둡고 음울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념비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방문되는 기념비 중 하나가 되었다. 검은 화강암 표면에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보이는 것, 그 반사된 자신의 얼굴과 새겨진 이름들이 겹쳐 보이는 것.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한 면 위에서 만나는 것. 이 기념비는 전쟁의 영웅주의가 아니라 전쟁의 비극을 정면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 기념비 앞에서 이름을 찾는 사람들을 본다. 아버지의 이름, 형의 이름, 옛 친구의 이름. 벽에 손을 대고 이름을 손끝으로 더듬는 그 동작이, 어떤 긴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전쟁은 숫자가 아니라 이름이다.

마틴 루터 킹 기념비 — 꿈의 무게

2011년에 세워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비(Martin Luther King Jr. Memorial)는 백인이 아닌 인물로서는 내셔널 몰에 세워진 최초의 기념비다. 중국 조각가 레이 이신이 설계한 이 기념비는 높이 9미터의 킹 박사 상이 대리석 언덕에서 걸어나오는 형태다. ‘희망의 돌(Stone of Hope)’이라 불린다.

기념비 벽면에는 킹 박사의 연설과 글에서 발췌한 14개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중 하나가 유명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다른 것이다. ‘어둠이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그럴 수 있다. 증오가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럴 수 있다.’

한 가지 논란이 있다.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 중 하나가 원래 맥락에서 벗어나 킹 박사를 오만해 보이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었고, 실제로 그 문구는 나중에 수정되었다. 완벽한 기념비는 없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 그것도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7. 백악관 너머의 워싱턴 D.C. — 두 개의 도시

워싱턴 D.C.는 두 개의 도시다. 하나는 하얀 대리석 건물들과 넓은 대로와 박물관들로 이루어진 ‘공식적인’ 워싱턴 D.C.. 다른 하나는 그 화려한 외관 바로 뒤편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실제’ 워싱턴 D.C..

아나코스티아 — 강 건너의 또 다른 세계

포토맥강 지류인 아나코스티아강(Anacostia River) 동쪽 지역을 아나코스티아(Anacostia)라 부른다. 내셔널 몰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지만, 전혀 다른 세계다. 주민의 95퍼센트가 흑인이고, 빈곤율은 워싱턴 D.C. 전체 평균의 두 배 이상이다. 강 건너 백악관의 돔이 보이는 거리에서, 식품 사막(food desert,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펼쳐진다.

이 지역의 역사를 알면 더 씁쓸해진다. 아나코스티아는 원래 흑인들이 차별적인 주택 정책으로 강 건너로 밀려나면서 형성된 지역이다. 20세기 초중반, 워싱턴 D.C.의 주택 정책은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이었다. 흑인들은 백인 거주 지역의 집을 살 수 없었고, 은행 대출도 받기 어려웠다. 그렇게 강 건너로 밀려난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아나코스티아다.

나는 손님들을 아나코스티아로 데려가지 않는다. 안전 문제도 있고, 관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빠뜨리면, 워싱턴 D.C.의 절반을 보지 않는 것이다. 기념비들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의 이상이, 강 건너에서는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것을 함께 알아야 한다.

K 스트리트 — 권력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

워싱턴 D.C.에는 내셔널 몰의 기념비들 못지않게 중요한 공간이 있다. K 스트리트(K Street)다. 이 거리는 미국 로비스트들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거대 기업들, 이익 단체들, 외국 정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로비 회사들이 이 거리에 밀집해 있다.

미국 정치에서 로비(Lobby)는 합법적이고 공인된 활동이다. 시민이나 단체가 의원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청원권의 일부라는 논리다. 그러나 현실에서 로비는 돈이 있는 집단의 이익이 정치에 반영되는 통로가 된다. 거대 제약 회사, 석유 회사, 금융 기업들이 막대한 로비 자금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어낸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신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잖아요.’ 맞다. 권력과 돈의 유착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다만 미국은 그것을 공식화하고 투명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로비스트는 등록을 해야 하고, 로비 활동과 자금은 공개된다. 투명성이 부패를 완전히 막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볼 수 있다.

8. 워싱턴 D.C.의 음식과 문화

에티오피아 음식 — 워싱턴 D.C.가 선물한 미식 경험

워싱턴 D.C.에서 꼭 경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에티오피아 음식이다. U 스트리트 주변에 에티오피아 이민자들이 밀집해 있어, 정통 에티오피아 레스토랑이 밀집해 있다. 워싱턴 D.C.는 미국에서 에티오피아 음식이 가장 발달한 도시다.

에티오피아 음식은 인제라(Injera)라는 넓고 스펀지처럼 구멍이 난 발효 빵 위에 여러 가지 스튜를 올려 먹는 방식이다. 숟가락이나 포크를 쓰지 않고 빵을 손으로 찢어 스튜를 집어 먹는다. 처음 경험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먹어도 돼요?’라고 하신다. 이렇게 먹어야 한다. 그것이 에티오피아 방식이다.

한국 분들에게 에티오피아 음식은 낯설지만 의외로 잘 맞는 경우가 많다. 발효된 인제라의 신맛이 김치와 비슷한 감각을 주고, 스튜의 진한 향신료 맛이 한국 음식의 깊은 맛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처음 먹어봤는데 이게 맛있네요’라는 반응이 자주 나온다.

U 스트리트 — 재즈가 피어난 흑인 문화의 중심

U 스트리트 주변은 20세기 초 ‘흑인들의 브로드웨이(Black Broadway)’라 불리던 곳이다. 듀크 엘링턴이 이 동네에서 태어났고, 많은 재즈 클럽과 극장들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꽃피웠다. 짐 크로우 법으로 흑인들이 백인 전용 공연장에 갈 수 없던 시절, 이 거리가 흑인 문화의 오아시스였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폭동으로 U 스트리트는 쑥대밭이 되었다. 수십 년간 황폐화되었다가, 1990년대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어 지금은 트렌디한 바와 레스토랑, 라이브 뮤직 클럽이 들어선 동네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살던 흑인 주민들이 얼마나 밀려났는지는, 필라델피아 할렘과 같은 이야기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워싱턴 D.C.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새겨진 도시

워싱턴 D.C.는 한국인에게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한미 관계의 역사가 새겨진 도시다. 한국전쟁에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것이 이 도시의 백악관에서였고, 한미 동맹 조약이 체결된 것도 이 도시의 건물들 안에서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여러 번 이 도시에서 논의되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 특히 한국전쟁 세대 어르신들이 워싱턴 D.C.를 방문할 때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이 나라가 우리를 도와준 나라라는 감사함, 그러나 동시에 우리 운명이 타국의 수도에서 결정되었다는 씁쓸함. 그 두 감정이 한국전쟁 기념비 앞에서 함께 올라온다.

한국계 미국인들의 워싱턴 D.C. 커뮤니티도 있다. 버지니아 주 북부(NoVA)와 메릴랜드 주 일부에 한인들이 밀집해 있다. 특히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Fairfax) 카운티와 센터빌(Centreville) 지역에 한국 식당, 마트, 학원들이 모여 있어 미니 코리아타운을 형성한다.

워싱턴 D.C.를 걸으며 생각하는 것들

워싱턴 D.C.에서 온종일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 내셔널 몰 한 바퀴만 해도 5~6킬로미터가 넘는다. 기념비 하나하나를 제대로 보려면 더 많이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걸음들이 아깝지 않은 것은, 걷는 동안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도시를 걸으면서 자주 한국의 광화문 광장을 생각한다. 광화문 광장도 권력의 공간이면서 시민의 공간이다. 청와대 앞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있듯이, 백악관 앞에 링컨과 마틴 루터 킹이 있다. 각 나라가 어떤 사람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그 나라의 가치관을 말해준다.

워싱턴 D.C.를 떠나면서 손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기도 한다. ‘오늘 본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요?’ 대답이 다양하다. 링컨 기념관이라는 분, 한국전쟁 기념비라는 분. 그 다양한 대답들 속에서, 각자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가 보인다. 좋은 여행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의 한 마디   워싱턴 D.C.는 하루에 다 볼 수 없는 도시다. 이틀을 잡아도 겉만 훑기 바쁘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가 됐든, 내가 꼭 권하는 것이 있다. 내셔널 몰을 걷는 것을 서두르지 마시라는 것이다. 링컨 기념관 앞 계단에 앉아서 30분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계셔 보라. 워싱턴 기념탑이 반영못에 반사되는 것을 바라보고,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 도시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들어보라. 그 30분이 어떤 박물관 두 시간보다 많은 것을 줄 것이다.

워싱턴 D.C.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3월 말~4월 초 (포토맥강 벚꽃 절정), 9~10월 (선선하고 한적). 여름은 덥고 습하며 관광객이 많다

주요 관광지

내셔널 몰 일대 (링컨 기념관·워싱턴 기념탑·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스미소니언 박물관군(무료), 백악관 외관, 국회의사당

꼭 먹어야 할 것

벤스 칠리 볼(Ben’s Chili Bowl·역사적 소울푸드), 에티오피아 음식(애덤스 모건 지역), 메릴랜드 블루크랩

박물관 예약

스미소니언 계열 박물관은 무료지만 일부 인기 전시는 사전 예약 권장. 항공우주박물관·자연사박물관 등

숙박 추천

더 몰 주변(관광 접근 최고·비쌈) / 뒤퐁 서클(Dupont Circle·레스토랑·안전) / 버지니아 알링턴(가성비)

Chapter 5. 버지니아 — 리치몬드

남북전쟁의 상처가 시작된 곳,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리치몬드(Richmond)는 미국에서 가장 불편한 도시 중 하나다. 불편하다는 것은 시설이 나쁘다거나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160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나는 리치몬드를 처음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이 도시는 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곳입니다.’ 남북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패배한 쪽의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역사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동상은 세우기도 어렵지만 철거하기는 더 어렵다. 이 모든 질문들이 리치몬드의 거리 위에서 살아 숨쉰다.

리치몬드는 워싱턴 D.C.에서 남쪽으로 약 170킬로미터, 차로 두 시간 거리다. 동부 여행 루트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지나치지만, 미국의 남과 북이 어떻게 나뉘었고, 그 분열이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한 번은 서봐야 하는 곳이다. 동부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에 리치몬드에 하루를 쓰면, 지나온 도시들이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1. 버지니아라는 땅 — 미국의 시작이자 분열의 진원지

버지니아(Virginia)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 식민지다. 1607년 제임스타운(Jamestown)에 영국인들이 정착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버지니아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등 초대 대통령 네 명을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다. ‘대통령들의 어머니(Mother of Presidents)’라는 별명이 있다.

그러나 버지니아는 동시에 미국 노예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619년,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항구에 도착했다. 대규모 담배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노예 노동력이 필요했던 버지니아 식민지가 노예무역의 관문이 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배출한 땅이 동시에 노예제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땅이었다는 이 역설이 미국 역사의 핵심 모순을 담고 있다.

리치몬드는 제임스강(James River) 연안에 자리 잡은 버지니아의 주도(州都)다. 인구 약 23만 명의 크지 않은 도시지만, 그 역사적 무게는 인구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다. 미국 남부와 북부의 경계에 있는 이 도시는,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미국의 분열선 위에 서 있다.

버지니아의 두 얼굴 — 북버지니아와 남버지니아

현대의 버지니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워싱턴 D.C. 인근의 북버지니아(Northern Virginia)와 리치몬드를 포함한 나머지 남부 지역이다. 북버지니아는 연방 정부 기관과 방위산업체, IT 기업들이 밀집해 있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카운티들이 있다. 반면 남부 버지니아로 내려갈수록 농촌 지역이 넓어지고, 전통적인 남부 문화의 흔적이 짙어진다.

이 두 버지니아는 정치적으로도 다르다. 한때 전형적인 공화당 텃밭이었던 버지니아가 2000년대 이후 경쟁 주(Swing State)로 바뀐 것은, 북버지니아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다양화 때문이다.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버지니아의 정치 지형이 변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미국 정치를 바꾸는 과정이 이 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2. 남부연합의 수도 — 리치몬드가 짊어진 역사

1861년 4월, 남부 11개 주가 미합중국을 탈퇴해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했다. 그 수도가 처음에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였다가, 같은 해 5월 버지니아가 탈퇴하면서 리치몬드로 옮겨왔다. 이후 1865년 4월까지 약 4년간, 리치몬드는 미합중국과 전쟁을 벌인 반란 정부의 수도였다.

남부연합이 왜 싸웠는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있다. 남부 일각에서는 ‘주권(States’ Rights)’, 즉 연방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각 주가 자치권을 갖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명확히 말한다. 남부연합이 지키려 한 ‘주권’의 핵심은 노예제를 유지할 권리였다고. 남부연합 헌법은 노예제를 명시적으로 보호했고, 남부연합 부통령 알렉산더 스티븐스는 취임 연설에서 남부연합의 ‘초석은 노예제’라고 직접 말했다.

그 역사를 품은 도시가 리치몬드다.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집무실이 있었고, 남부 전선을 총괄했던 로버트 E. 리 장군이 활동했던 곳이다. 전쟁 말기 남부연합군이 후퇴하면서 직접 불을 질러 폐허가 된 도시이기도 하다. 리치몬드의 거리를 걷는 것은 미국이 자신과 싸웠던 전쟁의 상처를 밟고 걷는 것이다.

제퍼슨 데이비스와 남부연합 백악관

리치몬드 시내에 남부연합 백악관(Confederate White House)이 있다.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가 거주하며 집무를 본 곳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 가구와 생활용품들이 복원되어 있다. 아이들이 뛰놀던 공간, 손님을 맞이하던 응접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수십만 명의 노예를 소유한 체제를 이끈 사람이 이렇게 평범한 집에서 살았다는 것. 악은 언제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가족을 사랑하고, 종교를 믿고, 나름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분열시킨 사람이었다. 이 두 얼굴이 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것을, 이 건물이 보여준다.

3. 모뉴먼트 애비뉴 — 동상이 서고 쓰러지기까지

리치몬드에서 가장 논쟁적인 공간은 모뉴먼트 애비뉴(Monument Avenue)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남부연합 장군들과 지도자들의 거대한 기마 동상들이 세워진 이 넓은 대로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꼽혔다. 로버트 E. 리, 스톤월 잭슨, J.E.B. 스튜어트, 제퍼슨 데이비스의 동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동상들이 언제 세워졌는지를 알면 다른 시각이 생긴다. 남북전쟁이 끝난 것은 1865년이었지만, 대부분의 동상들은 189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에 세워졌다. 전쟁이 끝나고 20~50년이 지난 뒤에. 그 시기는 남부에서 흑인들의 권리를 짓밟는 짐 크로우(Jim Crow) 법이 강화되고, 흑인들에 대한 폭력과 린치가 극심하던 때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동상들이 단순한 전쟁 영웅 기념이 아니라, 흑인들에게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 너희는 여전히 우리 아래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분석한다. 패배한 전쟁의 영웅들을 거대한 동상으로 세우는 것, 그것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권력 관계를 재확인하는 행위였다.

2020년, 동상들이 쓰러지다

2020년 5월 25일,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촉발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그리고 그 여파가 리치몬드 모뉴먼트 애비뉴에 닿았다.

2020년 6월, 버지니아 주지사 랠프 노섬은 로버트 E. 리 동상 철거를 명령했다. 다른 남부연합 동상들도 잇따라 철거되었다. 수십 년간 ‘문화유산’이라며 지켜온 동상들이 불과 몇 주 만에 사라졌다. 일부는 크레인으로 철거되었고, 일부는 시위대가 먼저 끌어내렸다.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역사를 지워서는 안 된다’는 측과 ‘공공장소에서 노예제 옹호자를 영웅처럼 기리는 것은 다르다’는 측이 맞선다. 나는 이 논쟁을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역사를 정직하게 대하는 방법이다.

리치몬드에서 만난 백인 현지인 한 분이 텅 빈 동상 받침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상은 없어졌는데 받침대는 남아있네요.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을 못 한 거겠죠?’ 맞다. 받침대는 아직도 거기 있다. 역사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지, 리치몬드는 아직 답을 찾고 있다.

4. 아메리카 남북전쟁 박물관 — 전쟁을 양쪽에서 보다

리치몬드 시내에 있는 아메리카 남북전쟁 박물관(American Civil War Museum)은 전쟁을 북부와 남부 양쪽의 시각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드문 전시 공간이다. 박물관은 남부연합 백악관 바로 옆에 있다.

박물관 입구에서 방문객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북부 연방(Union)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 남부연합(Confederacy)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 물론 실제로는 두 시각이 하나의 전시 안에 교차하며 펼쳐지지만, 이 선택 자체가 이 박물관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전쟁은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실제 남북전쟁 참전 병사들의 일기와 편지들이다. 북부 병사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 남부 병사가 아내에게 쓴 편지. 적으로 마주선 두 사람이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그 편지들에서 느껴진다. 전쟁의 명분은 다르고 싸우는 이유도 달랐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이 박물관에서 종종 한국전쟁을 떠올리신다. 남과 북이 갈라져 싸운 전쟁. 형제가 적이 된 전쟁. 미국의 남북전쟁과 한국의 6.25전쟁 사이에는 물론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같은 나라 사람들이 총을 겨눈다’는 비극의 구조는 공명한다. 그 공명이 이 박물관을 한국 분들에게 더 깊이 다가오게 만든다.

5. 노예 교역소 유적 — 땅이 기억하는 것

리치몬드는 미국 남부에서 두 번째로 큰 노예 교역 중심지였다. 남북전쟁 이전, 리치몬드에서 수십만 명의 노예들이 사고 팔렸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떼어지고, 남편이 아내와 헤어졌다. 인간이 상품으로 거래된 시장이 이 도시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이렇다 할 표시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노예 교역소가 있던 자리에 주차장이 들어서고, 쇼핑몰이 들어섰다. 그 땅이 무엇을 기억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도시의 한 블록이다.

루코차비 아일랜드 — 자유를 향해 달린 사람들

제임스강 중간에 작은 섬이 있다. 루코차비 아일랜드(Lumpkin’s Jail, 또는 Devil’s Half Acre로 알려진 지역 근처)는 한때 노예 감금 시설이 있던 곳이다. 팔리기를 기다리는 노예들이 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이 강은 동시에 자유의 통로이기도 했다. 북부로 탈출하려는 노예들이 이 강을 건너려 했다.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이끈 지하 철도가 버지니아에서도 활발히 운영되었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 그들을 돕다가 법으로 처벌받은 사람들, 그 이야기들이 이 강변에 새겨져 있다.

2023년, 리치몬드 시는 과거 노예 교역소 부지에 새 박물관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하모니 스트리트(Harmony Street)’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역사의 상처를 덮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기억하겠다는 리치몬드의 선택이다. 과거를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이 도시는 천천히 배워가고 있다.

6. 리치몬드의 현재 — 상처 위에 피어나는 것들

리치몬드는 역사의 무게만큼이나 현재의 활력도 있는 도시다. 남북전쟁의 유적지와 노예제의 흔적들 사이에서, 이 도시는 예술과 문화와 음식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쇼즈 랜딩과 제임스강 — 도시를 살린 강

리치몬드 시내를 가로지르는 제임스강은 한때 도시의 산업 동맥이었다. 19세기에는 운하와 공장이 강을 따라 늘어섰다. 그 산업이 쇠퇴한 후 강변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지금은 도시의 가장 생기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쇼즈 랜딩 (Shockoe Bottom) 지역과 제임스강 공원(James River Park)은 리치몬드 시민들의 야외 활동 중심지다.

제임스강은 도심을 흐르면서도 급류와 바위가 있어 카약과 래프팅이 가능한 드문 도시 강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화이트워터 래프팅을 할 수 있는 미국 도시는 리치몬드가 유일에 가깝다.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 강변을 달리는 러너들. 역사의 무게와 현재의 활기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코리아타운과 한인 커뮤니티

리치몬드의 한인 커뮤니티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탄탄하다. 주로 리치몬드 서부 교외 지역인 헨리코 카운티(Henrico County)와 체스터필드 카운티 (Chesterfield County)에 한인들이 분포해 있다. 한국 식당과 마트가 있어 오랫동안 거주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버지니아 주 전체로 보면, 북버지니아의 한인 커뮤니티가 압도적으로 크다. 페어팩스, 애넌데일, 센터빌 등지에 미국에서 LA 다음으로 큰 한인 밀집 지역이 있다고 할 정도다. 리치몬드는 그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용하고 안전하며 생활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해 자녀 교육을 위해 정착하는 교민 가정이 꾸준히 늘고 있다.

교민 손님들과 리치몬드를 방문할 때,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 도시가 겪어온 분열과 치유의 과정이, 이민자로서 새로운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과 닮아 있다고. 상처를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과거를 덮지 않으면서 현재를 만들어가는 것. 리치몬드가 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많은 이민자들이 삶에서 하는 것도 그것이다.

7. 남북전쟁의 전적지들 — 버지니아 전역에 새겨진 전쟁

버지니아는 남북전쟁의 주요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진 주다. 전쟁 4년 동안 버지니아에서만 2,000회 이상의 전투와 교전이 있었다. 지금도 버지니아 곳곳에 국립 전쟁터 공원이 있다.

피터스버그 포위전 — 가장 긴 공방

리치몬드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피터스버그(Petersburg)에는 남북전쟁 최장 포위전의 현장이 있다. 1864년 6월부터 1865년 4월까지 약 9개월간, 북부 연방군이 남부연합의 보급 거점인 피터스버그를 포위했다. 이 포위전에서 약 7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터 공원을 걸으면 당시 참호(trenches)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병사들이 땅을 파고 몇 달을 버텼던 그 참호들. 풀이 자라고 나무가 우거졌지만, 지형의 흔적이 15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이 피터스버그 포위전의 교훈 없이 반복된 비극이었다는 것을, 이 땅에 서면 실감하게 된다.

애퍼매톡스 — 전쟁이 끝난 곳

리치몬드에서 서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애퍼매톡스(Appomattox)에 가면 남북전쟁이 끝난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 1865년 4월 9일,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부 연방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 문서에 서명한 곳이다.

항복이 이루어진 맥린 하우스(McLean House)가 복원되어 있다. 작은 응접실 안에 두 장군이 앉았던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이 작은 방에서 620,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 끝났다. 그랜트 장군은 항복한 남부군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적을 이겼다고 짓밟지 말라’는 링컨의 뜻이 담긴 결정이었다.

나는 이 작은 방 앞에서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전쟁을 끝내는 것보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더 오래 걸린다. 애퍼매톡스에서 항복이 이루어진 지 160년이 지났지만, 남북전쟁이 남긴 인종과 지역의 갈등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동상 논쟁이 2020년에도 불거진 것이 그 증거다.

7-1. 버지니아의 또 다른 유산 — 몬티첼로와 토머스 제퍼슨

리치몬드에서 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샬러츠빌(Charlottesville) 근처 언덕 위에 몬티첼로(Monticello)가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독립선언서 초안을 쓴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하고 살았던 저택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건물은 팔라디오 양식의 우아한 건축물로, 버지니아를 방문하는 역사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몬티첼로를 방문하면 제퍼슨의 천재성에 감탄하게 된다. 건축, 철학, 농업, 언어학, 음악까지 두루 통달한 르네상스적 인간. 그가 설계한 저택 곳곳에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숨어있다. 시계가 방 바깥의 날씨 풍향계와 연결되어 있고, 음식을 부엌에서 식당으로 올리는 소형 엘리베이터가 있으며, 두 개의 문이 하나의 손잡이로 동시에 열리는 구조가 있다. 18세기에 이런 것들을 고안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몬티첼로의 투어는 요즘 그 불편한 진실도 함께 다룬다. 제퍼슨이 소유했던 600명이 넘는 노예들. 그들이 이 아름다운 저택을 짓고, 농장을 운영하고, 제퍼슨의 일상을 유지했다. 저택 지하에는 노예들이 살던 좁은 공간이 있다. 화려한 응접실과 지하의 노예 숙소가 같은 건물 안에 있다. 이 건물 하나가 미국 건국 세대의 위대함과 모순을 동시에 담고 있다.

최근 몬티첼로는 노예들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복원하고 전시하기 시작했다. 제퍼슨의 이야기와 함께, 그의 노예였던 사람들 — 이름, 나이, 어떤 일을 했는지 — 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전시가 추가되었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 변화를 두고 ‘위인을 깎아내리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고, ‘비로소 정직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 논쟁 자체가 미국이 자신의 역사와 씨름하는 방식이다.

8. 한국인의 눈으로 본 리치몬드 — 분열과 치유에 대하여

리치몬드를 방문하는 한국 분들은 대부분 처음에 ‘왜 여기를’이라는 표정을 하신다. 뉴욕이나 워싱턴 D.C.보다 훨씬 덜 알려진 도시고, 화려한 관광 명소도 없다.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실 때는 표정이 달라진다. 무언가를 많이 생각하고 가신다.

분단의 기억과 공명하는 도시

한국은 분단된 나라다. 남북이 갈라진 채 70년이 넘었다. 통일이 언제 올지, 올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4년의 전쟁으로 끝났고, 연방은 유지되었다. 한국의 분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리치몬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처가 얼마나 오래가는가다. 1865년에 총이 멎었지만, 그 후 100년간 흑인들은 짐 크로우 법 아래 2등 시민으로 살았다. 2020년에도 조지 플로이드가 죽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원인이었던 불평등과 차별은 형태를 바꿔 지속되었다. 남북이 하나가 되더라도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리치몬드가 보여준다.

동시에 리치몬드가 보여주는 희망도 있다. 동상이 철거되고, 노예 교역소 부지에 박물관이 세워지고, 흑인 시장이 당선되고, 젊은 세대가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처는 깊지만, 치유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리치몬드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다.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동상 논쟁은 리치몬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자신의 역사에서 불편한 인물들, 불편한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문제, 한국의 친일파 처리 문제, 독일의 나치 역사 교육 방식. 이 모든 것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답들이다.

독일은 나치 시대의 건물들을 보존하면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표시한다. 아우슈비츠를 철거하지 않고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악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교훈을 남기는 방식이다. 리치몬드가 동상을 철거하면서 받침대를 남겨두고, 노예 교역소 부지에 박물관을 세우는 것도 비슷한 방향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정직한 선택이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리치몬드의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종종 우리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고 하신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의 동상과 거리 이름 문제, 군사독재 시대 인물들에 대한 평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도 여전히 씨름하고 있다는 것을. 리치몬드는 그 씨름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도시다.

저자의 한 마디   리치몬드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화려하지도, 압도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를 방문하고 나면 미국이 달리 보인다고 항상 말한다. 보스턴에서 시작해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를 거쳐 리치몬드에 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이상 위에 세워졌고, 그 이상이 어떻게 배반당했으며, 지금도 그 배반의 상처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동부 여행의 마지막에 리치몬드를 넣으면, 앞서 본 도시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역사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연결해서 봐야 보인다.

버지니아·리치몬드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4월~6월 (봄꽃과 온화한 날씨), 9월~11월 (단풍과 가을 하이킹). 여름은 덥고 습하다

주요 관광지

버지니아 미술관(VMFA·무료), 미국 남북전쟁 박물관, 잭슨 워드, 제임스강 래프팅·하이킹, 몬티첼로(토머스 제퍼슨 저택·샬러츠빌)

꼭 먹어야 할 것

버지니아 햄, 남부식 버거(Metzger Bar), 로컬 크래프트 맥주(더 브루어리 지구), 조개찜(Virginia Oysters)

당일 코스

VMFA 관람 → 잭슨 워드 벽화 거리 → 사우스 오브 카날 점심 → 제임스강 산책 → 버지니아 남북전쟁 박물관

숙박 추천

쇼크로 지구(Shockoe Bottom, 역사 지구 인접) / 팬 지구(The Fan, 빅토리아 건축·맛집 밀집)

Chapter 6. 플로리다 — 마이애미 & 키웨스트

카리브해와 미국이 만나는 곳, 은퇴자의 천국이자 이민자의 전쟁터

플로리다(Florida)는 미국에서 가장 미국답지 않은 주 중 하나다. 보스턴의 청교도 정신도 없고, 뉴욕의 야망도 없으며, 버지니아의 역사적 무게도 없다. 플로리다는 햇볕과 바다와 야자수의 주다. 그런데 그 가벼워 보이는 외관 아래에, 미국에서 가장 복잡한 인종과 이민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마이애미(Miami)를 처음 방문하는 손님들이 공항을 나오자마자 느끼는 것이 있다. 공기가 다르다. 뜨겁고 습하고, 어딘가 달콤한 냄새가 난다. 그리고 들리는 언어가 다르다.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더 많이 들린다. ‘이게 미국 맞아요?’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다. 맞다. 그런데 동시에, 지금껏 본 어떤 미국과도 다른 미국이다.

마이애미는 미국이면서 카리브해다. 쿠바, 아이티,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의 음악, 음식, 언어, 색깔이 마이애미라는 도시의 DNA다. 여기에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부유층 관광객들, 은퇴 후 따뜻한 날씨를 찾아온 노인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그늘에 사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 남쪽 끝으로 차를 몰면, 미국 본토의 마지막 점에 닿는다. 키웨스트(Key West). 쿠바까지 불과 145킬로미터. 헤밍웨이가 살았고, 해적들이 드나들었으며, 미국에서 가장 이상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섬이다. 마이애미와 키웨스트를 함께 보면, 플로리다라는 주가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미국에 속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1. 플로리다라는 주 — 햇볕 아래 숨겨진 복잡함

플로리다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다. 약 2,200만 명. 그런데 그 인구의 상당수는 원래 플로리다 태생이 아니다. 추운 북부에서 은퇴 후 따뜻한 날씨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 중남미에서 건너온 이민자들, 관광과 서비스업을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플로리다는 미국에서 이동과 정착의 역학이 가장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주다.

플로리다의 역사는 스페인에서 시작된다. 1513년 스페인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이 땅에 발을 디디며 ‘플로리다(꽃이 만발한 땅)’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약 300년간 스페인 영토였다가 1821년 미국에 팔렸다. 그 스페인의 유산이 지금도 플로리다 곳곳에, 특히 마이애미의 라틴 문화 속에 살아있다.

플로리다의 날씨는 미국에서 가장 독특하다. 북쪽은 전형적인 미국 남부 기후이고, 마이애미가 있는 남쪽은 열대성 기후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로 온화하고 쾌적하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로 매일 오후 스콜이 쏟아지고 허리케인 위험이 있다. 한국 분들이 플로리다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12월부터 3월까지다. 한국의 추운 겨울에 플로리다에 오면, 그 따뜻함 자체가 선물이다.

플로리다 맨(Florida Man) — 미국에서 가장 기이한 주의 비밀

미국인들 사이에서 플로리다는 기이한 뉴스의 산지로 유명하다. ‘플로리다 맨(Florida Man)’이라는 인터넷 밈이 있을 정도다. ‘악어를 안고 편의점에 들어간 남자’, ‘우주선이라며 자전거를 타고 케네디 우주센터에 침입한 남자’, ‘상어를 맨손으로 잡은 남자’. 이런 기이한 뉴스들이 유독 플로리다에서 많이 나온다.

왜 그럴까. 플로리다는 1970년대부터 공공 기록 공개법(Sunshine Law)을 시행해 체포 기록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공 기록이 자동으로 공개된다. 다른 주들은 기자들이 요청해야 볼 수 있는 정보가 플로리다에서는 누구나 바로 열람할 수 있다. 기이한 일이 플로리다에 더 많은 것이 아니라, 플로리다에서 더 잘 보이는 것이다. 투명성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이미지다.

2. 마이애미 — 미국이 아닌 미국

마이애미는 1896년에 공식 도시가 되었다. 미국의 주요 도시들과 비교하면 놀랍도록 젊은 도시다. 보스턴이 1630년, 뉴욕이 1626년에 시작된 것과 비교하면, 마이애미는 불과 130여 년의 역사를 가졌다. 그런데 그 짧은 역사 속에 미국에서 가장 복잡한 이민과 문화의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다.

현재 마이애미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히스패닉계다. 쿠바계가 가장 많고,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아이티, 니카라과 등 중남미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 마이애미 데이드 카운티에서는 스페인어가 영어보다 더 많이 쓰인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마이애미에서는 스페인어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정도다.

이것이 마이애미를 가장 미국답지 않게 만드는 특성이면서, 동시에 가장 미국다운 면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면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다만 마이애미는 그 이민자 문화가 워낙 강해, 미국의 다수 문화인 앵글로 색슨 문화가 오히려 소수처럼 느껴지는 특이한 곳이다.

리틀 하바나 — 망명자들이 만든 쿠바

마이애미에서 가장 독특한 동네는 리틀 하바나(Little Havana)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이후 쿠바 망명자들이 마이애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정착해 만든 동네가 리틀 하바나다. 지금은 2세, 3세로 넘어갔지만 이 동네에는 여전히 쿠바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 있다.

카예 오초(Calle Ocho, 8번가)는 리틀 하바나의 중심 거리다. 쿠바 음식점들, 시가(cigar) 공방, 살사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노인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체스를 두고, 도미노를 치며 스페인어로 정치를 논한다. 그 정치 토론의 중심은 언제나 쿠바다. 60년이 넘었지만 이 노인들에게 고향은 여전히 쿠바다. 그 그리움이 이 동네의 공기에 녹아 있다.

나는 교민 손님들에게 리틀 하바나를 안내할 때 이렇게 말한다. ‘이 분들의 마음을 우리 교민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는 마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어쩌면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 그 감정의 결이 이민 1세대라면 어디에 있든 비슷하다. 리틀 하바나의 노인들과 미국의 한인 교민들은 같은 언어로 살고 있다.

마이애미 비치와 아르데코 — 색깔의 도시

마이애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하얀 모래사장과 파란 바다 옆에 파스텔 색깔의 건물들. 그것이 마이애미 비치(Miami Beach)다. 마이애미 비치는 마이애미 본토와는 다른 섬이다. 비스케인만(Biscayne Bay)을 사이에 두고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마이애미 비치의 사우스 비치(South Beach) 지역에는 1920~40년대에 지어진 아르데코(Art Deco) 양식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분홍, 노랑, 민트, 라벤더 색의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오션 드라이브(Ocean Drive)는 마이애미 비치의 상징적인 거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아르데코 건축 보존 지구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들이 파스텔 색으로 칠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건물들이 낡고 퇴색하자, 플로리다의 강렬한 햇빛 아래 색이 잘 보이도록 파스텔 톤을 선택했다. 기능적인 선택이었던 것이 지금은 도시의 정체성이 되었다. 오션 드라이브를 걸으면 마치 설탕으로 만든 도시 안에 들어온 것 같다. 사진이 잘 나오는 거리인데,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사우스 비치의 낮과 밤

사우스 비치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동네다. 낮에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비치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오션 드라이브의 카페에서 쿠바 커피를 마신다. 파도 소리와 살사 음악이 섞인다. 여유롭고 화려하다.

밤이 되면 전혀 다른 도시가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럽들이 문을 열고,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마이애미는 세계 클럽 문화의 메카 중 하나다. 밤 11시에 시작해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파티. 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우스 비치의 밤은 그 에너지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마이애미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얼마나 비싼 값으로 유지되는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사우스 비치의 화려함 뒤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호텔과 레스토랑을 청소하고, 풀장을 관리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저임금 노동자들. 대부분 아이티나 중미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관광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도시가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마이애미의 빛은 그들의 노동 위에 서 있다.

3. 에버글레이즈 — 미국이 품은 가장 이상한 자연

마이애미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면 미국 본토에서 가장 독특한 생태계를 만난다. 에버글레이즈(Everglades) 국립공원이다. ‘풀의 강(River of Grass)’ 이라 불리는 이 광활한 습지는 플로리다 남부 전체를 덮는 거대한 생태계다.

에버글레이즈에서 유명한 것이 에어보트(Airboat) 투어다. 거대한 선풍기를 달고 수면을 미끄러지듯 달리는 이 배를 타고 습지 깊숙이 들어가면, 악어들이 그늘에 누워 있고, 왜가리가 수면 위를 날고, 매너티(manatee, 바다소)가 유유히 헤엄친다. 이 광경이 마이애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에버글레이즈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농업용수 개발과 도시 확장으로 습지 면적이 100년 전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악어 개체수는 회복되었지만, 플로리다 팬서(표범의 일종)는 멸종 직전이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염수가 담수 생태계를 침범하고 있다. 에버글레이즈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4. 마이애미의 불편한 이야기들

쿠바 이민자의 정치학 — 미국 선거를 움직이는 힘

플로리다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스윙 스테이트(경합 주) 중 하나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의 537표 차이가 조지 W. 부시의 당선을 결정했다. 그 선거를 기억하는 분들은 마이애미에서 플로리다의 정치적 무게를 실감하신다.

마이애미의 쿠바계 이민자들은 미국 정치에서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대체로 민주당 성향인 반면, 쿠바계 이민자들은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한다.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을 피해 망명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정치 성향을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쿠바계 이민자들의 정치 성향도 변하고 있다. 쿠바 혁명을 직접 경험한 1세대와, 미국에서 태어난 2~3세대의 정치적 우선순위는 다르다. 마이애미의 정치 지형이 변하는 것이 미국 전체 정치 지형의 변화를 예고한다.

젠트리피케이션 — 빛의 도시 뒤편

마이애미는 지난 20년간 급격한 부동산 가격 상승을 겪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부유층들이 세금이 없는 플로리다로 이주하면서, 마이애미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격근무가 가능해진 뉴욕 금융계 종사자들이 대거 마이애미로 이주하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마이애미에서 오래 살아온 중산층과 저소득층 이민자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리틀 하바나의 쿠바 노인들이 살던 아파트가 고급 콘도로 재개발된다. 에덴동산 같던 아이티 이민자 커뮤니티가 해체된다. 화려해질수록 원래 주민들이 사라지는 이 역설이 마이애미에서도 반복된다.

마이애미에 20년 가까이 사신 쿠바 출신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전에는 이 동네가 참 살기 좋았는데, 뉴욕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다 바뀌었어요. 월세가 두 배가 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멀리 가야 하고.’ 뉴욕에서 밀려난 사람이 마이애미로 오고, 마이애미에서 밀려난 사람은 또 어디로 가는가. 이 연쇄 이동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5. 오버타운과 윈우드 — 흑인 문화와 예술의 부활

마이애미에는 한국 분들이 잘 모르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오버타운 (Overtown)이라는 동네다. 20세기 초반 짐 크로우 법 시대에, 흑인들이 마이애미 비치와 다운타운의 백인 전용 지역에 갈 수 없었던 시절, 오버타운은 흑인들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운 공간이었다. 마이애미의 ‘흑인들의 브로드웨이’였다. 냇 킹 콜, 루이 암스트롱, 빌리 홀리데이가 이 동네에서 공연했다.

지금 오버타운은 역사의 영광과 현재의 빈곤이 공존하는 동네다. 그러나 최근 지역 예술가들과 커뮤니티 조직들이 이 동네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벽화들이 골목을 채우고, 작은 재즈 클럽들이 다시 문을 열고 있다.

오버타운 바로 북쪽, 윈우드(Wynwood)는 최근 10년간 마이애미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한 동네다. 한때 낡은 창고들뿐이던 이 지역이 세계적인 스트리트 아트의 메카가 되었다. 윈우드 월스(Wynwood Walls)라는 야외 갤러리에는 세계 각국의 유명 그래픽 아티스트들의 대형 벽화들이 가득하다. 매년 아트 바젤(Art Basel) 기간이 되면 전 세계 미술 시장의 중심이 마이애미로 이동한다.

6. 키웨스트 — 미국 본토의 끝, 세상의 끝에서

마이애미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고 내려가면, 미국 본토가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그 사라지는 지점에서 다리가 시작된다. 플로리다 키스(Florida Keys). 산호초 위에 형성된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오버시스 하이웨이(Overseas Highway)를 따라 약 200킬로미터를 달리면, 미국 본토 최남단 도시 키웨스트(Key West)에 닿는다.

오버시스 하이웨이를 달리는 경험 자체가 특별하다. 양옆으로 바다가 펼쳐지고, 도로는 지평선을 향해 곧게 뻗어있다. 왼쪽은 대서양, 오른쪽은 멕시코만. 하늘과 바다와 도로만 있는 이 드라이브는, 미국의 어떤 드라이브와도 다른 경험이다. 창문을 내리면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들어온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게 진짜 드라이브구나’라고 하시는 곳이다.

키웨스트라는 섬의 성격

키웨스트는 면적이 약 8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인구는 약 2만 5천 명. 그런데 이 작은 섬이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문화를 가진 곳 중 하나다. ‘콘치 공화국(Conch Republic)’이라는 별명이 있다.

1982년, 미국 연방 국경수비대가 키웨스트로 들어오는 유일한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해 마약 밀수를 단속했다. 그 바람에 키웨스트로 들어오는 차들이 수 킬로미터씩 줄을 서야 했다. 관광업이 타격을 받자, 키웨스트 시장이 연방 정부에 항의하며 ‘콘치 공화국 독립’을 선언했다. 물론 진짜 독립이 아닌 퍼포먼스였지만, 지금도 키웨스트 곳곳에 콘치 공화국 깃발이 걸려 있다. 이 유머와 반항 정신이 키웨스트의 정체성이다.

키웨스트는 규칙에서 자유로운 곳이다. 거리에서 술을 마셔도 되고, 닭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가장 좋은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있다. LGBTQ+ 커뮤니티가 오래전부터 정착해 가장 개방적인 문화를 가진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미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딱딱한 규범들이 이 섬에서는 녹아내린다.

헤밍웨이의 집 — 작가가 사랑한 섬

키웨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의 집이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 헤밍웨이가 살았던 이 스페인 식민지 양식의 집에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 대표작들을 썼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

헤밍웨이의 집에는 고양이가 많다. 헤밍웨이가 키우던 고양이의 후손들이 지금도 집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발가락이 여섯 개인 폴리댁틸(Polydactyl) 고양이들로, 유전적 특성이 대를 이어 전해졌다. 현재 약 60마리가 집 안팎을 누빈다. 박물관 해설보다 이 고양이들이 더 인기인 것은, 살아있는 것의 매력이 그렇다.

헤밍웨이는 키웨스트를 ‘세상 끝의 낙원’이라고 불렀다. 글을 쓰고, 낚시를 하고, 술을 마시고, 복싱을 했다. 그의 단골 술집 슬로피 조스(Sloppy Joe’s)는 지금도 듀발 스트리트(Duval Street)에서 영업 중이다. 낮부터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고 맥주가 넘치는 이 바에서, 헤밍웨이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 하는 것. 그것이 키웨스트에서 해야 할 것 중 하나다.

선셋 셀러브레이션 — 매일 저녁의 축제

키웨스트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말로리 스퀘어(Mallory Square)의 선셋 셀러브레이션(Sunset Celebration)이다. 매일 해가 질 무렵, 말로리 스퀘어 광장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 저글러, 마술사, 음악가, 불 쇼 아티스트들이 공연을 펼치고, 사람들은 멕시코만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박수를 친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광장 전체가 박수를 친다. 태양에게 박수를. 매일 저녁 이 의식이 반복된다. 처음에는 관광용 이벤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함께 하다 보면, 그 박수가 진심이 된다. 하루가 끝나는 것을 함께 축하하고, 내일 또 해가 뜰 것을 믿는 것. 이것이 키웨스트가 수십 년간 지켜온 작은 의식이다.

처음 이 선셋 셀러브레이션을 경험한 손님 한 분이 눈시울을 붉히셨다. 이유를 여쭤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매일 이렇게 저무는 하루를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왜인지 모르게 위로가 됐어요.’ 나는 그 말이 선셋 셀러브레이션의 가장 정확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7. 플로리다의 음식 — 바다와 라틴이 만든 식탁

쿠바 샌드위치 — 이민자의 음식이 미국의 음식이 되다

마이애미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 1순위는 쿠반 샌드위치(Cuban Sandwich)다. 쿠바식 빵(Cuban bread)을 납작하게 눌러 구운 후 그 안에 로스트 포크, 햄, 스위스 치즈, 피클, 머스터드를 넣은 이 샌드위치는 마이애미에서 태어났다.

쿠바 이민자들이 담배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점심으로 먹던 소박한 샌드위치가 기원이다. 이제 이 샌드위치는 마이애미를 넘어 미국 전역의 레스토랑 메뉴에 오르는 음식이 되었다. 이민자들의 소박한 점심이 미국의 음식 문화가 된 것이다. 리틀 하바나의 작은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쿠바노를 사서 거리를 걸으며 먹는 것, 그것이 마이애미를 가장 마이애미답게 즐기는 방법이다.

스톤 크랩과 시푸드 — 플로리다 바다의 선물

플로리다의 해산물은 미국에서 가장 신선하고 다양하다. 그 중 가장 특별한 것이 스톤 크랩(Stone Crab)이다. 10월부터 5월까지만 잡히는 이 게의 집게발 부분만 먹는데, 살이 달고 쫄깃해 한국 분들도 대부분 좋아하신다. 생선 튀김과 함께 먹는 ‘피시 앤 칩스’도 플로리다에서는 다른 맛이다. 대서양에서 갓 잡은 스내퍼 (Snapper)나 그루퍼 (Grouper)를 바로 튀기면, 살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 맛이 전혀 없다.

키웨스트에서는 키 라임 파이(Key Lime Pie)를 빠뜨릴 수 없다. 플로리다 키스 지역에서 자라는 작은 라임인 키 라임으로 만든 이 파이는 새콤달콤하고 크리미한 질감이 특징이다. 키웨스트의 어느 식당에서든 먹을 수 있는데, 가게마다 레시피가 조금씩 달라 여러 곳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한국의 레몬 케이크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맛이다.

8. 한국인의 눈으로 본 플로리다

은퇴 이민의 땅 — 교민 시니어들의 플로리다

플로리다는 미국 교민 시니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날씨, 상대적으로 낮은 생활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환경. 은퇴 후 북부나 중부에서 플로리다로 이주하는 한인 교민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올랜도(Orlando) 근처, 그리고 마이애미 북쪽 브로워드 카운티(Broward County)에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한국 마트, 한의원, 한국어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있어 언어 장벽 없이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뉴욕이나 LA에 비해 커뮤니티 규모가 작아서, 한인들끼리의 네트워크가 더욱 긴밀하다.

나는 플로리다에 은퇴 이민을 고려하시는 교민 분들을 안내할 때 꼭 드리는 말씀이 있다. ‘플로리다는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여행으로 좋은 것과 살기 좋은 것은 다릅니다. 허리케인 시즌, 여름 더위, 의료 접근성, 운전 의존도 — 이것들을 충분히 알아보고 결정하세요.’ 아름다운 곳이 항상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여행과 거주는 다른 경험이다.

미국의 끝에서 생각하는 것들

키웨스트 최남단 지점(Southernmost Point)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부표 모양의 표지물이 있다. ‘미국 본토 최남단, 쿠바까지 90마일(145킬로미터)’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표지물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항상 줄이 늘어서 있다.

나는 이 표지물 앞에 설 때마다 그 90마일이라는 거리를 생각한다. 불과 145킬로미터. 서울에서 대전 거리보다 짧다. 그 거리를 목숨을 걸고 뗏목으로 건너온 쿠바 망명자들이 있었다. 상어가 있는 바다를, 바람에 뒤집힐 수 있는 뗏목을 타고. 자유를 향해 그 거리를 건너온 사람들이 리틀 하바나에서 체스를 두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90마일이라는 거리가 때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거리가 된다.

동부 여행의 마지막 챕터로 플로리다를 읽고 나면, 보스턴에서 시작한 이 여행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자유를 위해 영국과 싸운 청교도들, 독립을 선언한 건국의 아버지들,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싸운 북부 연방군, 공산주의에서 탈출해 바다를 건넌 쿠바 망명자들.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그 열망이 얼마나 자주 배반당했는지와 함께.

저자의 한 마디   마이애미는 처음 오시는 분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도시 중 하나다. 날씨, 음식, 바다, 음악, 에너지 — 모든 것이 즐겁다. 그런데 나는 마이애미를 떠나면서 손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기도 한다. ‘오늘 가장 빛나는 것과, 가장 그늘진 것은 무엇이었나요?’ 사우스 비치의 파스텔 건물들과 리틀 하바나 노인들의 그리움, 윈우드의 벽화들과 밀려나는 이민자들, 키웨스트의 석양과 90마일 바다. 마이애미와 키웨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동시에 가장 복잡한 곳이다. 그 복잡함까지 함께 보고 가셨으면, 그것이 진짜 마이애미를 본 것이다.

플로리다·마이애미·키웨스트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11월~4월 (건기, 온화한 날씨). 12~3월이 최고 성수기. 5~10월은 우기와 허리케인 시즌으로 피하는 것이 좋다

마이애미 주요 명소

사우스 비치·오션 드라이브, 리틀 하바나 카예 오초, 윈우드 월스,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어보트 투어), 비스케인 국립공원

키웨스트 주요 명소

헤밍웨이 하우스, 말로리 스퀘어 선셋 셀러브레이션, 듀발 스트리트, 미국 최남단 지점, 슬로피 조스 바

꼭 먹어야 할 것

쿠바노 샌드위치(리틀 하바나), 스톤 크랩 클로, 키 라임 파이(키웨스트), 쿠바식 커피(카페 쿠바노)

마이애미→키웨스트

차량 약 3.5시간 (오버시스 하이웨이 드라이브). 중간 이슬라모라다 (Islamorada) 들러 해산물 점심 추천

숙박 추천

마이애미 비치: 사우스 비치 (관광·나이트라이프)

마이애미 본토: 브릭켈(Brickell, 비즈니스·안전)

키웨스트: 올드타운 게스트하우스

주의사항

마이애미 여름 체감 온도 40도 이상. 야외 활동 시 선크림 필수. 사우스 비치 주차비 매우 비쌈 — 우버 이용 권장

섹션 2 — 미국 서부 지역

자유를 찾아 끝까지 달려간 사람들

Chapter 7. 캘리포니아 —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의 꿈, LA 한인타운의 땀,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공항을 나와 첫 번째로 느끼는 것은 대부분 실망이다. 뉴욕의 압도적인 스카이라인도 없고, 보스턴의 고풍스러운 거리도 없다. 공항 밖으로 나오면 고속도로와 차들, 끝없이 펼쳐지는 낮은 건물들, 그리고 뿌연 스모그. ‘이게 그 유명한 LA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도 처음 LA에 왔을 때 그랬다. 미국 서부의 화려한 도시를 기대했는데, 첫인상은 그냥 크고 평평하고 뭔가 정리가 안 된 도시였다. 그런데 며칠을 지내다 보면 LA는 서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도시는 한눈에 보이는 도시가 아니다. 파헤칠수록, 걸을수록, 이야기를 들을수록 깊어지는 도시다.

LA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약 400만 명, 광역 LA로 넓히면 1,300만 명이 넘는다. 그 광대한 도시 안에 한국, 중국, 멕시코, 일본, 에티오피아, 아르메니아가 공존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나라의 이민자들이 함께 사는 도시. 그리고 그 이민자들 중에는 우리 한국인들도 있다.

나는 LA를 소개할 때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LA는 미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인이 미국에서 가장 복잡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한인타운, 1992년 LA 폭동의 상처, 2세대의 정체성 혼란, 그리고 지금도 매일 비행기에서 내리는 새로운 이민자들. LA의 한인 이야기는 미국 이민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챕터 중 하나다.

1.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 — 크고 평평하고 복잡한

LA의 공식 이름은 ‘El Pueblo de Nuestra Señora la Reina de los Ángeles’, 즉 ‘천사들의 여왕 성모의 마을’이다. 1781년 스페인 선교사들이 붙인 이름이다. 줄이고 줄여서 ‘Los Angeles(천사들의 도시)’가 되었다. 그 이름처럼 천사 같은 도시인지는 살아보면 알게 된다.

LA는 뉴욕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로 이루어진 도시다. 뉴욕이 수직으로 쌓아올린 도시라면 LA는 수평으로 펼쳐진 도시다. 고층 빌딩이 밀집한 다운타운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이 2~3층 주거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넓고 평평한 분지 지형에 도시가 펼쳐지다 보니, 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LA에서 자동차는 다리다.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이 자동차 의존성이 LA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다. LA의 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교통망 중 하나다. I-10, I-405, I-5, US-101이 도시를 종횡으로 가로지른다. 출퇴근 시간에 이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된다. LA에서는 ‘어디 사세요?’보다 ‘거기까지 차로 얼마나 걸려요?’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5마일 거리도 1시간이 걸릴 수 있다.

LA 카운티 안에는 공식적으로 88개의 독립 도시가 있다. 산타모니카, 베벌리힐스, 웨스트할리우드, 컬버시티, 토런스, 가디나 — 이것들이 모두 별개의 시이면서 광역 LA의 일부다. 그래서 LA에서 ‘어디 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이 정말 중요하다. 할리우드 사인을 보고 싶다면 할리우드로, 바닷가를 걷고 싶다면 산타모니카로,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면 코리아타운으로. 각각의 목적지가 차로 30분에서 1시간씩 떨어져 있다.

LA의 날씨 — 왜 모두가 LA로 오는가

LA의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다. 연평균 기온 약 18도, 연간 강수량은 서울의 절반 이하. 여름엔 덥지만 건조해서 한국의 여름처럼 끈적하지 않고, 겨울엔 서울처럼 칼바람이 불지 않는다. 눈은 거의 오지 않는다. 1년 중 300일 이상 맑다. 이 날씨가 수백만 명을 LA로 끌어들였다. ‘더 나은 날씨, 더 나은 삶’이라는 광고 문구가 실제로 날씨만큼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LA의 1월은 반팔 차림으로 다닐 수 있다.

한국의 1월 한파를 피해 LA로 오시는 분들이 그 날씨를 처음 경험할 때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 날씨에 살면 삶이 달라지겠다.’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 날씨가 사람의 기분을 바꾸고, 기분이 삶의 방식을 바꾼다. LA 사람들이 유독 야외 활동을 즐기고, 운동을 많이 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이 날씨의 영향이 크다. 물론 그것이 LA의 전부는 아니지만.

2. 할리우드 — 꿈의 공장, 꿈의 무게

할리우드(Hollywood). 이 이름이 주는 환상은 강렬하다. 영화와 드라마와 음악을 통해 전 세계 수십억 명의 마음속에 심어진 이미지들. 빛나는 레드카펫, 오스카 트로피, 선글라스를 쓴 스타들. 그 꿈의 공장을 직접 보겠다고 전 세계에서 LA로 온다.

그런데 실제 할리우드 거리에 처음 발을 디디면, 많은 분들이 당황하신다. 할리우드 대로(Hollywood Boulevard)는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고, 생각보다 상업적이다.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의 별들을 보려면 바닥을 내려다봐야 하는데, 그 바닥이 청소가 잘 안 된 경우도 많다.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별 바로 옆에 껌 자국이 있다. 이것이 할리우드의 첫 번째 진실이다. 꿈을 파는 곳과, 꿈을 쫓아온 사람들이 현실과 부딪히는 곳이 같은 거리 위에 있다.

명예의 거리와 그라우만스 차이니스 시어터

할리우드 대로와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를 중심으로 약 2.7킬로미터에 걸쳐 2,700개 이상의 별 모양 표지가 박혀 있다. 영화, 텔레비전, 음악, 라디오, 연극 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은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58년에 시작되어 지금도 매년 새로운 별들이 추가된다. 별 하나를 얻는 데는 약 5만 달러의 비용이 든다. 지명을 받은 당사자 또는 팬들이 이 비용을 부담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돈으로 사는 명예’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할리우드의 방식이기도 하다. 꿈과 돈이 항상 함께 다닌다.

명예의 거리 위에 있는 그라우만스 차이니스 시어터(Grauman’s Chinese Theatre)는 1927년에 지어진 붉은 지붕의 중국 신전 같은 건물이다. 이 영화관 앞마당에 500여 명의 영화 스타들이 직접 손바닥과 발바닥을 시멘트에 찍어 남긴 자국들이 있다.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존 웨인부터 한국인 배우 안성기와 이병헌등 다양한 나라의 스타들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손발 자국 위에 직접 손발을 맞춰보는 것이 관광객들의 의식이 되었다. 나는 이 손발 자국들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시멘트에 자국을 남긴 스타들 중 지금 몇 명이나 살아있을까. 명성이란 얼마나 덧없는가를, 역설적으로 이 영구적인 시멘트 자국들이 말해준다.

할리우드 사인 —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 것

LA의 상징 중 하나인 할리우드 사인(Hollywood Sign). 할리우드 힐스 산 중턱에 세워진 높이 14미터, 너비 110미터의 하얀 글씨. 1923년에 처음 세워질 때는 ‘HOLLYWOODLAND’였는데, 부동산 광고판이었다. 나중에 ‘LAND’ 부분이 제거되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덜 아름답다. 하이킹을 해서 가까이 접근하면 그냥 낡은 금속판이다. 멀리서, 도시 전체를 배경으로 봐야 그 상징성이 살아난다.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rvatory)에서 바라보는 할리우드 사인과 LA 전경이 가장 유명하다. 해질 무렵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노을 지는 LA를 바라보면, 이 광대하고 복잡한 도시가 갑자기 아름답게 보인다. 낮에는 할리우드 사인과 함께 LA 분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밤에는 수천만 개의 불빛이 별처럼 빛나는 야경이 펼쳐진다.

할리우드 산업의 속살

LA에서 10년 넘게 살다 보면 ‘영화계 종사자’를 주변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종사자’의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게 넓다. 영화 조감독부터, 엑스트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배우 지망생까지. LA는 미국 영화·드라마·음악 산업의 80퍼센트 이상이 집중된 곳이다. 영화 하나가 만들어지려면 시나리오 작가, 감독, 배우, 촬영 감독, 조명 기사, 의상 담당, 소품 담당, 후반 작업 스태프, 마케팅 팀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한다. 그들이 LA에서 밥을 먹고, 집을 빌리고, 차를 타고 다닌다. 할리우드 산업은 LA 전체 경제 생태계다.

그런데 이 산업에서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LA에는 배우 지망생이 수십만 명이라고 한다. 그들 중 실제로 생활비를 연기만으로 충당하는 사람은 5퍼센트도 안 된다는 통계가 있다. 나머지는 웨이터, 바리스타, 우버 드라이버로 일하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그 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 LA라는 도시의 가장 인간적인 면이기도 하다.

3. LA 코리아타운 — 미국 속의 한국, 한국 속의 미국

LA 코리아타운(Koreatown).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밀도 높은 한인 커뮤니티다. 윌셔 블러바드(Wilshire Boulevard)와 올림픽 블러바드(Olympic Boulevard) 사이, 노르만디 애비뉴에서 웨스턴 애비뉴까지 약 3평방킬로미터의 이 지역은, 한국어 간판과 한국 음식과 한국 문화로 가득 차 있다.

처음 코리아타운에 발을 들이면 이상한 감각이 온다. 분명 미국에 있는데, 서울 어딘가에 와 있는 것 같다. 한국어 간판, 한국 노래, 한국 음식 냄새. 그런데 주변을 좀 더 보면 손님들 중 한국인이 절반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코리아타운은 이제 한국인만의 동네가 아니다. 코리아타운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 거주 인구의 약 60퍼센트 이상이 히스패닉계다. 한국 간판들 사이로 스페인어가 들리고, 한국 식당 옆에 멕시코 타코 트럭이 있다.

코리아타운의 역사 — 1세대가 맨손으로 만든 것

LA 코리아타운의 역사는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LA로 왔다. 처음에는 작은 식료품 가게와 봉제공장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윌셔-올림픽 지역에 한국 비즈니스들이 집중되면서 코리아타운의 기틀이 잡혔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영어는 서툴고, 자본도 없고, 미국 사회의 인맥도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가족과 성실함뿐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문을 열고, 밤 11시에 문을 닫는 가게들. 특히 1970~80년대 한인들이 주로 진출한 업종이 청과물 가게(Grocery)였다. 흑인 동네와 히스패닉 동네에서 작은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한인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그들의 모습이 다른 커뮤니티와의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 갈등이 1992년에 폭발했다.

1992년 LA 폭동 — 코리아타운이 불탄 날

1992년 4월 29일. 이 날짜는 LA 한인 커뮤니티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흑인 남성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찰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LA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폭동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코리아타운이었다.

6일간의 폭동으로 코리아타운에서만 약 2,280여 개의 한인 사업체가 불타거나 약탈당했다. 피해액은 당시 화폐 가치로 약 4억 달러. 수백 가정이 평생 모은 재산을 하룻밤에 잃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폭동이 일어났을 때 경찰이 코리아타운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부유층 지역인 베벌리힐스와 웨스트 LA를 먼저 지켰다. 코리아타운은 스스로 지켜야 했다.

그래서 생겨난 장면이 세계 언론에 퍼졌다. 옥상 위에서 소총을 들고 가게를 지키는 한인들. ‘Roof Koreans(옥상 한인들)’이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나는 이 이야기를 손님들에게 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무장을 해서라도 지켜야 했던 삶의 터전.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한 소수자. 그리고 그 소총 사진이 전 세계에 퍼지면서 생긴 또 다른 오해들.

1992년 LA 폭동은 단순히 흑인과 한인의 갈등이 아니었다. 그 밑에는 구조적인 불평등이 있었다. 가난한 흑인 동네에 백인 자본이 들어오지 않을 때, 한인들이 그 공백을 채웠다. 한인들은 그 동네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그 동네에 살지는 않았다. 커뮤니티에 환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쌓였다. 그 갈등이 폭동으로 터진 것이다. 한인들만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한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LA에서 20년 이상 사신 교민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가게가 불탔어요. 평생 모은 것이 다 탔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우리가 더 강해졌어요. 다시 일어서면서 우리가 미국에 뿌리 내린 거라는 걸 알았어요.’ 폭동은 상처였지만,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선 것이 LA 한인 커뮤니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4. LA의 다른 얼굴들 — 베벌리힐스부터 스키드 로까지

베벌리힐스 — 부의 전시장

코리아타운에서 서쪽으로 10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우편번호 중 하나, 90210. 베벌리힐스(Beverly Hills)다. 코리아타운의 복잡하고 지저분한 거리에서 베벌리힐스로 넘어가는 순간 도시가 달라진다. 거리가 넓고 깨끗해지고, 나무들이 잘 가꿔져 있고, 고급 스포츠카들이 지나다닌다. 로데오 드라이브(Rodeo Drive)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쇼핑 거리 중 하나다. 구찌,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가 3블록 안에 모여 있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구경은 공짜입니다. 사는 건 다른 문제고요.’

스키드 로 — LA의 가장 어두운 곳

다운타운 LA 동쪽, 스키드 로(Skid Row). 불과 50블록 안에 약 4,000~8,000명의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이 지역은 미국에서 노숙자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텐트촌이 블록 전체를 덮고, 마약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있다. 베벌리힐스의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 같은 도시 안에서 이런 극단이 공존한다는 것. 이것이 LA이고, LA를 통해 보는 미국의 현실이다.

LA의 노숙자 문제는 미국에서 가장 심각하다. 광역 LA에 약 7만 5천 명의 노숙자가 있다. 매년 수억 달러의 예산을 쏟아붓지만 숫자는 줄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집값, 부족한 정신 건강 서비스, 마약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간단한 해법이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 해법을 찾지 못하는 동안, 스키드 로의 텐트촌은 계속 늘어간다. 나는 손님들을 스키드 로에 데려가지 않는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곳이 관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LA를 이야기하면서 이곳을 빠뜨리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베니스 비치 — LA의 자유

LA 서쪽 해안, 베니스 비치(Venice Beach). 모래사장과 바다 옆으로 오션프론트 워크(Ocean Front Walk)라는 보행자 전용 도로가 이어진다. 근육질 보디빌더들이 야외 체육관 머슬 비치에서 운동하고, 그 옆에서 스케이트보더들이 묘기를 부리고, 저글러와 마임 아티스트가 공연하고, 점쟁이가 판을 깔고, 마리화나 냄새가 가끔 풍겨온다. 이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곳. 이것이 캘리포니아가 말하는 자유다.

선셋 무렵 베니스 비치에서 파도를 바라보며 앉아 있으면, 무언가 마음이 풀리는 감각이 있다. 뉴욕의 긴장감, 보스턴의 역사적 무게, 워싱턴 D.C.의 권력의 냄새가 여기서는 사라진다. 모래사장 위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그것이 서부가 동부와 다른 점이고, LA가 다른 미국 도시들과 다른 점이다.

5. 산타모니카와 태평양 — 대륙의 끝에 서다

베니스 비치 바로 북쪽, 산타모니카(Santa Monica). LA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해안 도시는 태평양이 바로 앞에 있고, 쇼핑과 레스토랑이 가득하며,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져 있다. 산타모니카 피어(Santa Monica Pier)는 1909년에 지어진 목조 부두다. 부두 끝에 서서 태평양을 바라보면 한 가지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 대륙의 서쪽 끝에 서 있다는 것. 더 서쪽으로 가면 바다, 그 바다 건너 일본을 거쳐 한국이 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 부두 끝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하시는 말씀이 있다. ‘고향이 저 바다 건너에 있네요.’ 그 말이 나는 항상 마음에 남는다. 지구는 둥글고, 바다는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의 이쪽 끝에 우리가 서 있다. 동부의 자유의 여신상이 ‘오라’는 이민자들의 꿈이라면, 서부의 태평양은 ‘왔다’는 이민자들의 도착이다.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산타모니카 북쪽으로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Pacific Coast Highway, PCH)가 시작된다. 태평양을 왼쪽에 두고 달리는 이 해안 도로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왼쪽으로는 파란 태평양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말리부 힐스의 황금빛 언덕이 이어진다. 창문을 내리면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들어온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게 진짜 드라이브구나’라고 하시는 곳이다.

말리부(Malibu)는 LA 최고 부유층의 해안 주거지다. 도로 바로 옆에 바다를 향한 목조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급 주택들은 산불 위험에 매우 취약하다. 매년 가을이면 산타아나 바람(Santa Ana Winds)이 불어오면서 산불이 말리부를 위협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들 중 일부가 가장 위험한 자리에 있다. 아름다움과 위험이 공존하는 것, 이것도 LA다.

6. LA의 음식 — 세계를 한 접시에

코리아타운 음식 — 그리움과 진화 사이

LA 코리아타운의 한국 음식은 미국 음식 문화를 바꿨다. 한국식 바비큐(Korean BBQ)는 LA에서 시작해 전 미국으로 퍼진 음식 트렌드다. 코리아타운에서 꼭 먹어야 할 것들이 있다. 24시간 운영하는 순두부찌개 집, 새벽에도 줄을 서는 설렁탕 집, 냉면이 일품인 식당. 한국에서 오신 분들도 놀라는 수준의 식당들이 코리아타운 골목골목에 있다. 교민들에게는 그리움을 달래는 곳이고, 처음 오시는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미국에서 한국을 발견하는 곳이다.

코리아타운 바로 옆에 있는 한국 마트들도 볼거리다. H마트, 갤러리아 슈퍼마켓. 한국 라면, 과자, 음료는 물론이고 신선한 한국 채소, 두부, 된장, 고추장, 한국에서 직수입한 과자와 음료들이 즐비하다. 마트 안을 걷다 보면 서울 어딘가에 와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마트에서 익숙한 것들을 발견하며 반가워하시는 표정을 보는 것이 나는 좋다.

타코 트럭과 인앤아웃 — LA의 일상 음식

LA에서 한국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타코 트럭(Taco Truck)이다. 도로 가에 세워진 작은 푸드 트럭에서 만들어내는 멕시코 타코. 옥수수 또르띠야에 고기를 얹고, 고수와 양파와 살사 소스를 올린다. 가격은 보통 2~3달러 한 개. 이것이 LA 노동자들의 점심이다. LA에는 정통 멕시코 이민자들이 만드는 타코 트럭이 수천 대 있다. 한국 분들에게 드리면 대부분 ‘의외로 입맛에 맞다’고 하신다. 한국 음식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패스트푸드, 인앤아웃 버거(In-N-Out Burger).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이 버거 체인은 신선한 재료를 고집한다는 원칙이 있다. 매일 감자를 직접 썰어 튀기고, 냉동 고기를 쓰지 않는다. 비밀 메뉴(Secret Menu)도 있다. ‘애니멀 스타일(Animal Style)’이라고 주문하면 그릴에 구운 양파, 특제 소스, 피클이 추가된다. 이것을 알고 주문하면 현지인처럼 느껴진다.

7. LA의 예술과 문화 — 할리우드를 넘어서

게티 센터 — 언덕 위의 무료 미술관

석유 재벌 J. 폴 게티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게티 센터(Getty Center)는 1997년에 문을 열었다. 산타모니카 산맥의 언덕 위에 세워진 새하얀 건물들로 이루어진 이 미술관은, 미술관이기 전에 건축 작품이다. 입장료가 무료다. 단, 주차비가 22달러다. 이것도 LA다운 방식이다. 주차 없이는 갈 수 없는 도시에서, 미술관 무료 대신 주차비를 받는다. 전시 작품은 렘브란트, 고흐, 모네, 세잔 등 유럽 거장들이 중심이다. 하지만 게티 센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건물 밖이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LA 전경이 어마어마하다. 맑은 날에는 태평양이 보인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LA 필하모닉

다운타운 LA에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Walt Disney Concert Hall)이 있다. 2003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은빛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들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형태로, LA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LA 필하모닉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 건물을 처음 보는 분들은 하나같이 ‘이게 건물이에요?’라고 하신다. 건축에 관심 없는 분들도 그 독특한 외관에 발걸음을 멈춘다. LA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이, 이 도시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K-콘텐츠와 달라진 LA의 풍경

지난 10년간 LA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BTS가 빌보드를 석권하고, 기생충이 오스카를 받고,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전 세계 1위를 차지하면서 LA에서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할리우드 본사들이 한국 콘텐츠 제작사들과 협업을 늘리고 있다. 20년 전 LA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음식을 먹던 한인 이민자들이, 지금은 자녀들이 할리우드 산업 안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딱 맞는 변화다.

8. LA 주변의 자연 — 도시를 에워싼 극단의 풍경

LA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이 도시 주변에 미국의 여러 극단적인 자연환경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로 두 시간이면 사막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다. 이 다양성이 LA를 단순한 도시 여행지가 아니라 자연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만든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 사막의 기이한 아름다움

LA에서 동쪽으로 약 2시간.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Joshua Tree National Park)이 있다. 이름처럼 조슈아 트리라는 독특하게 생긴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거대한 화강암 바위들이 황량한 사막 위에 솟아있다. 지구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선셋 무렵 불그스름한 하늘 아래 조슈아 트리의 실루엣을 보면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밤이 되면 LA의 빛 공해에서 벗어나 은하수가 펼쳐진다. 한국 분들이 처음 밤하늘 은하수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게 진짜 밤하늘이구나.’ LA에서 이틀 머물다가 하루를 조슈아 트리에서 보내면, 도시와 자연의 극명한 대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리피스 천문대 — LA 전체를 품는 언덕

할리우드 북쪽, 그리피스 파크(Griffith Park) 언덕 위의 그리피스 천문대 (Griffith Observatory)는 LA에서 가장 가보아야 할 곳 중 하나다. 무료 입장이 가능하고, 내부에 우주와 천문학에 관한 전시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천문대 자체보다 그 앞 언덕에서 바라보는 LA 전경이 더 유명하다. 낮에는 할리우드 사인과 함께 LA 분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밤에는 수천만 개의 불빛이 별처럼 빛나는 LA 야경이 펼쳐진다. 나는 손님들에게 가능하면 해 질 무렵 도착해 노을이 지는 LA와 야경이 시작되는 두 장면을 모두 보시라고 권한다. 이 야경을 보면 왜 LA를 ‘천사들의 도시’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된다.

9. LA 한인 커뮤니티의 현재와 미래

교육열 —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

LA 한인 커뮤니티에서 교육은 언제나 뜨거운 주제다. 얼바인(Irvine), 플러튼 (Fullerton), 라크레센타(La Crescenta) 같은 LA 외곽 도시들은 한국인 이민자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한 곳이다.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좋은 학군이다. 학원(Hagwon)은 LA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어 그대로 통용된다. SAT 준비 학원, AP 과목 학원, 수학 전문 학원들이 빼곡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동시에 한국식 교육을 받는 2세들의 이중적인 교육 경험이 LA 한인 커뮤니티의 독특한 현상이다. 그 결과가 통계로 나타난다. LA의 UC(University of California) 시스템 — UC 버클리, UCLA, UC 샌디에이고 — 에서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아계 학생 비율이 30~40퍼센트에 달한다.

1세대의 희생, 2세대의 이동

최근 LA 한인 커뮤니티에서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다. 젊은 한인 2~3세들이 LA를 떠나고 있다. 천문학적인 집값, 교통 체증, 높은 세금, 코로나 이후 원격근무 확산으로 시애틀, 오스틴, 나시빌, 덴버 같은 도시로 이동하는 한인들이 늘었다. 1세대가 목숨 걸고 건너온 도시에서, 2~3세대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다시 이동한다. 이민의 역사는 계속 흐른다.

그러나 LA 코리아타운은 여전히 살아있다. 매년 한국에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온다. K-콘텐츠 열풍을 타고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코리아타운 식당에서 줄을 선다. LA 코리아타운은 변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살아있는 커뮤니티의 증거다.

코리아타운에서 30년 넘게 식당을 하신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딸이 뉴욕으로 갔어요. 기회가 더 많다고. 나는 여기 남아서 식당 해요. 딸이 성공하면 그게 내 성공이지.’ 1세대 이민자의 삶이 그 한 마디에 담겨 있다. 자신의 꿈이 아니라 자녀의 꿈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 그 희생이 LA를 만들었고, 미국을 만들었다.

10. 한국인의 눈으로 본 LA

LA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LA를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내가 드리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가 있다. 첫째, 교통. 모든 계획에 이동 시간을 두 배로 잡으라. 구글 맵이 30분이라고 해도 LA 교통 사정에서는 1시간일 수 있다. 관광 명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루에 너무 많은 곳을 계획하면 차 안에서만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둘째, 다양성. LA에서는 어떤 음식이든 그 나라 출신이 만든 정통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한국 식당만 다니면 LA의 반도 못 본다. 셋째, 날씨. 아무리 더운 날에도 저녁에는 시원해진다. 해안 도시이기 때문에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낮에는 선크림을 충분히 바르고, 저녁에는 가벼운 겉옷을 챙기라.

LA에서 꼭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음식 한 끼, 베니스 비치 선셋, 산타모니카 피어에서 태평양 바라보기,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LA 야경 보기, 인앤아웃 버거 애니멀 스타일 한 번. 그리고 가능하다면 코리아타운 새벽 3시 식당을 경험해 보시길 권한다. LA는 밤이 늦어도 문을 여는 식당들이 있다. 이민자들이 만든 도시는 쉬지 않는다. 그 새벽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이, 어떤 관광 명소보다 더 강렬하게 LA를 보여준다.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렌트카 없이 LA 투어를 계획하는 것. LA는 차가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다. 대중교통만으로 이동하려 하면 시간의 절반을 이동에서 낭비하게 된다. 특히 지하철은 뉴욕과 다르게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적 손해가 많다. 운전이 힘든 분들은 우버택시를 이용하길 추천한다.

LA를 처음 오시는 분들에게

LA는 뉴욕처럼 첫눈에 압도되는 도시가 아니다. 처음에는 실망스럽고, 크기만 하고, 뭔가 산만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틀, 사흘을 지내면서 조금씩 파고들면 이 도시가 얼마나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동부의 역사와 무게를 지나 서부에 오면, 미국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동부가 미국의 어제라면, 서부는 미국의 내일이다. 그 내일이 어떤 모습인지를, LA가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도시,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 그것이 로스앤젤레스다.

저자의 한 마디   LA는 처음에 실망스럽고 나중에 매력적인 도시다. 첫인상이 좋은 도시가 있고, 오래 볼수록 좋은 도시가 있는데, LA는 후자다. 보스턴이나 뉴욕처럼 도심을 걸어다니며 역사와 문화를 느끼는 도시가 아니라, 차를 타고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각각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도시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수고를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코리아타운의 새벽 식당에서 국밥을 먹는 것, 베니스 비치 선셋에서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것,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수천만 불빛으로 빛나는 LA를 내려다보는 것. 이것들이 내가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10월~4월 (건조하고 온화). 여름은 덥고 스모그가 심하다. 12~2월은 비가 오기도 하지만 관광객이 적고 서늘하다

주요 관광지

할리우드 대로·명예의 거리, 그라우만스 차이니스 시어터, 그리핏 천문대, 베니스 비치, 산타모니카 피어, 베벌리힐스 로데오 드라이브, 게티 센터, LA 코리아타운

꼭 먹어야 할 것

코리아타운 한국 바비큐·순두부·냉면, 인앤아웃 버거 (애니멀 스타일), 멕시코 타코 트럭, 몬테레이 파크 딤섬

추천 3일 코스

1일차: 할리우드 사인·그리핏 천문대→명예의 거리→코리아타운 저녁

2일차: 게티 센터→베벌리힐스·로데오 드라이브→베니스 비치 선셋

 3일차: 산타모니카 피어→인앤아웃 버거→다운타운 LA

숙박 추천

미드 시티 (코리아타운·다운타운 접근 좋음) / 산타모니카 (해변·안전·편리하지만 비쌈) / 토런스·가디나 (교민 많은 지역·가성비 좋음)

교통 주의

출퇴근 시간 (오전 7~10시, 오후 4~7시) 고속도로 극심한 정체. 주요 고속도로: I-405 (북남), I-10 (동서), US-101 (할리우드)

한인 커뮤니티

코리아타운 (비즈니스 중심), 토런스·가디나 (한인 밀집 거주지), 얼바인 (오렌지 카운티 한인 밀집), 다이아몬드바·로랜드 하이츠 (동부 LA 한인 밀집)

Chapter 8. 캘리포니아 — 샌프란시스코

히피에서 빅테크까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모순적인 도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모순적이며,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다.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하는 분들은 그 아름다움에 압도된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샌프란시스코 베이(Bay),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케이블카가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광경.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다. 아니, 사진보다 아름답다.

그런데 며칠을 걷다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기업들이 밀집한 실리콘밸리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노숙자 문제가 가장 심각한 도시 중 하나다. 자유와 평등을 외친 히피 운동의 발상지이면서, 지금은 억만장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가장 진보적인 도시라고 자부하면서, 정작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쫓겨나는 도시이기도 하다.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미국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모순’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움과 불평등, 이상과 현실, 자유의 이념과 자본의 논리가 이 작은 반도 위에 압축되어 공존한다. 그 공존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샌프란시스코를 제대로 여행하는 방법이다.

1.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 언덕과 안개와 바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 주 북부, 반도 끝에 위치한 도시다. 인구는 약 87만 명으로 미국 대도시 중에서는 크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면적이 좁고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 탓에 인구 밀도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LA가 수평으로 퍼진 도시라면, 샌프란시스코는 수직으로 쌓인 도시다. 언덕이 49개라는 말이 있다. 도시 전체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독특하다. 같은 캘리포니아인데 LA와 전혀 다르다. LA가 맑고 건조하다면 샌프란시스코는 안개와 바람이 특징이다. 여름에도 기온이 15~18도를 넘지 않는 날이 많다. 7월과 8월이 오히려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해류와 내륙의 뜨거운 공기가 만나면서 안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안개가 금문교를 감싸는 장면이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다.

한국에서 여름에 오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당황하는 것이 이 날씨다. 캘리포니아니까 덥겠지 하고 반팔만 챙겨 오셨다가, 안개 낀 샌프란시스코에서 추위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항상 미리 말씀드린다. 샌프란시스코는 여름에도 가디건이나 가벼운 재킷을 꼭 챙기시라고. 심지어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추운 달은 여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샌프란시스코의 지리 — 언덕과 바다와 교통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먼저 실감하는 것은 언덕이다.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서 출발해 몇 블록만 걸어도 경사가 시작된다. 어떤 언덕은 너무 가팔라서 일반 자동차가 오르내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 언덕들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Cable Car)가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중교통은 LA보다 훨씬 잘 되어 있다. 지하철(BART)과 버스, 케이블카, 트롤리버스가 도시 곳곳을 연결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차 없이도 여행이 가능하다. 오히려 차가 있으면 주차 문제로 더 고생할 수 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여행에서는 렌트카보다 대중교통과 도보를 권한다. 이 도시는 걸어서 발견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2. 금문교 —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구조물 중 하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는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다. 1937년에 완공된 이 현수교는 길이 2.7킬로미터, 수면에서 도로까지의 높이 67미터.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주탑 높이만 227미터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4년 4개월의 공사 기간 동안 1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처음 금문교 앞에 서면 그 규모에 압도된다. 사진으로는 크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실물은 훨씬 크고, 훨씬 붉고, 훨씬 아름답다. 다리 색깔은 ‘International Orange’라는 특별 주황색이다. 해군이 처음에는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원했지만, 안개 속에서도 잘 보이도록 이 밝은 주황색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색깔이 금문교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금문교 걸어서 건너기

금문교는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왕복 약 5킬로미터, 걸어서 1시간 30분 내외.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 만과 도시 전경은 압도적이다. 왼쪽으로는 태평양이 열리고, 오른쪽으로는 샌프란시스코 만이 펼쳐진다. 다리를 건너다 보면 아래로 시퍼런 바다가 보인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모자가 날아갈 정도다.

나는 이 다리를 수십 번 건넜지만, 건널 때마다 다른 감정이 든다. 안개가 자욱한 날 건너면 다리가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고, 맑은 날 건너면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한 가지 어두운 사실도 함께 말씀드린다. 금문교는 미국에서 자살자가 가장 많은 장소 중 하나다. 1937년 개통 이후 1,700명 이상이 이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아름다운 다리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금문교를 건너다 서울에서 오신 60대 남성 손님이 난간에 기대어 한참 바다를 바라보셨다. 한참 후에 말씀하셨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왜 사람들이 뛰어내릴까요.’ 나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과 고통스러운 것이 같은 장소에 있다. 그것이 삶과 닮았다.

3. 피셔맨스 워프와 알카트라즈 — 관광과 역사가 만나는 곳

샌프란시스코 북쪽 해안,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는 도시에서 가장 번잡한 관광 지역이다. 19세기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이민자 어부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이 항구 지역은, 지금은 해산물 식당과 기념품 가게, 거리 공연자들로 가득하다.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그 북적임 속에 샌프란시스코의 역사가 담겨 있다.

피셔맨스 워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클램 차우더(Clam Chowder)다. 샌프란시스코 사워도우(Sourdough) 빵 그릇에 담겨 나오는 이 크림 수프는 보스턴 스타일과 비슷하지만 빵이 다르다. 샌프란시스코 사워도우 빵은 도시의 독특한 공기 중 효모와 박테리아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똑같이 만들 수 없는 독특한 신맛을 가진다. 이 사워도우 빵을 그릇 삼아 클램 차우더를 먹는 것이 샌프란시스코 여행의 빠질 수 없는 경험이다.

알카트라즈 — 섬이 된 감옥

피셔맨스 워프에서 페리를 타고 약 15분. 샌프란시스코 만 한가운데 섬이 있다. 알카트라즈(Alcatraz). 1934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 연방 교도소로 사용된 이 섬은,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 명소 중 하나다.

알카트라즈는 ‘탈출 불가능한 교도소’로 알려져 있었다. 사방이 차갑고 세찬 조류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수영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알 카포네(Al Capone) 같은 당대 최악의 범죄자들이 수감되었다.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탈출에 성공한 사례가 없다. ‘공식적으로는’이라는 단서가 붙는 이유는, 1962년 세 명의 수감자가 탈출을 시도했는데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탈출에 성공한 건지, 차가운 바다에서 익사한 건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투어는 셀프 오디오 가이드로 진행된다. 실제 전직 수감자와 교도관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좁은 독방들, 식당, 운동장을 걷는다. 차가운 바다 위의 섬, 바람 소리, 차갑고 어두운 독방. 이 감각들이 합쳐지면 역사책에서 읽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시절이 실감된다.

4. 하이트 애시버리와 카스트로 — 자유의 발상지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반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의 발상지다. 1960년대 이 도시에서 시작된 두 개의 운동이 미국과 세계를 바꿨다. 하나는 히피 운동(Hippie Movement), 다른 하나는 동성애자 권리 운동이다.

하이트 애시버리 — 히피의 심장

하이트 스트리트(Haight Street)와 애시버리 스트리트(Ashbury Street)가 교차하는 이 동네는 1967년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의 중심이었다. 전국에서 약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이 동네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기성 사회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재니스 조플린, 그레이트풀 데드,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이 동네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지금의 하이트 애시버리는 그 시절의 흔적과 현재가 공존하는 동네다. 빈티지 옷가게, 레코드 가게, 채식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거리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미국 도시들에서 볼 수 없는 여유롭고 이상주의적인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동네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히피 문화를 사랑해서 이 동네에 정착한 예술가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분위기 때문에 오른 임대료를 감당 못 해 떠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동네가 이제 비싼 동네가 되어가고 있다는 역설. 이것도 샌프란시스코다.

카스트로 — 무지개 깃발이 태어난 곳

하이트 애시버리에서 몇 블록 내려오면 카스트로(Castro) 지역이 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LGBTQ+ 커뮤니티의 중심지다. 무지개 깃발이 건물들에 걸려 있고, 거리 곳곳에 다양성을 상징하는 예술 작품들이 있다.

1970년대 하비 밀크(Harvey Milk)가 이 지역에서 게이 권리 운동을 이끌며 샌프란시스코 시 감독관(감독위원)에 당선되었다. 미국 최초로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힌 선출직 공무원이었다. 1978년 그는 시청에서 암살당했다. 지금 카스트로에는 하비 밀크 광장이 있고, 그가 살았던 집 앞에는 기념 표지가 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카스트로를 방문할 때 다양한 반응을 보이신다.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호기심을 보이시는 분들도 있다. 나는 어느 반응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린다. 카스트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도 같은 거리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네입니다. 그것 자체가 이 동네가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5. 실리콘밸리와 테크 산업 — 세상을 바꾼 차고

샌프란시스코 남쪽, 산호세(San Jose)까지 이어지는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구글, 애플, 페이스북(메타),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우버, 트위터(X). 지금 우리가 매일 쓰는 서비스들의 본사가 여기 있다. 세계 IT 산업의 80퍼센트 이상이 이 작은 지역에서 태어났다.

실리콘밸리의 시작은 놀랍도록 소박하다.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잡스의 부모님 차고에서 첫 번째 애플 컴퓨터를 만들었다. 그 차고가 지금도 쿠퍼티노(Cupertino)에 있다. 그 소박한 차고에서 세상을 바꾼 회사가 시작되었다는 것. 미국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할 때 가장 강력한 증거가 이것이다.

구글과 페이스북 캠퍼스 — 꿈의 직장의 실체

구글 본사(Googleplex)가 있는 마운틴뷰(Mountain View)와 메타(페이스북) 본사가 있는 멘로파크(Menlo Park)는 외부에서도 어느 정도 구경할 수 있다. 구글플렉스 앞에서 안드로이드 로봇 조형물들과 사진을 찍는 것이 실리콘밸리 여행의 인기 코스다.

이 캠퍼스들은 ‘꿈의 직장’의 상징이다. 무료 식사, 수영장, 마사지 서비스, 낮잠실. 직원들이 일을 즐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제공한다는 철학이다. 그런데 그 후한 복지의 이면에는 직원들이 캠퍼스 밖으로 나갈 이유를 없애버리는 전략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일과 생활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실리콘밸리 문화의 빛과 그늘이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이 샌프란시스코에 미친 영향은 크다. 수만 명의 고연봉 IT 종사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몰려들면서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스튜디오 — 한국에서는 원룸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아파트 월세가 3,000~4,000달러. 한화로 400~500만 원. 이 집값을 감당하지 못한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도시 밖으로 밀려났다. 테크 기업들이 만들어낸 풍요가 역설적으로 도시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한인 IT 종사자들

실리콘밸리에는 상당수의 한국계 IT 종사자들이 있다. 구글, 애플,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 등에서 일하는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 한국에서 유학을 왔다가 취업한 경우도 많고, 이민 2세대로 미국에서 자라 IT 업계에 진출한 경우도 많다. 한국의 뛰어난 이공계 교육이 실리콘밸리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지역의 한인 커뮤니티는 주로 산호세(San Jose)와 프리몬트(Fremont), 쿠퍼티노(Cupertino), 밀피타스(Milpitas) 지역에 밀집해 있다. 특히 쿠퍼티노는 애플 본사가 있는 도시인데, 한국계와 중국계 이민자들이 많아 학군이 좋고 한국 마트와 식당이 잘 갖춰져 있다.

6. 차이나타운과 다양한 이민자들의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이민자의 역사가 가장 깊은 도시 중 하나다. 19세기 골드러시(Gold Rush) 시절, 중국 광동성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금을 캐러 캘리포니아로 왔다. 그들이 정착한 곳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이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자, 뉴욕 맨해튼을 제외하면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차이나타운이다. 게이트로 장식된 입구에서 시작해 이어지는 거리에는 한자 간판들, 홍콩식 빵집, 딤섬 레스토랑, 중국 약재상들이 빼곡하다. 평일 낮에도 좁은 골목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19세기 중국 이민자들의 고난

차이나타운의 화려한 외관 뒤에는 무거운 역사가 있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발에서 중국 이민자들이 한 역할은 지대했다. 대륙횡단 철도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의 약 80퍼센트가 중국인이었다. 가장 위험한 공사 구간인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의 터널 폭파 작업을 맡은 것도 그들이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철도가 완공되자 미국은 중국 이민자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되어 중국인의 미국 이민이 금지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특정 민족의 이민을 법으로 금지한 첫 사례였다. 이미 미국에 있던 중국인들도 귀화할 수 없었고, 이미 귀화한 경우에도 미국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 역사를 알고 차이나타운을 걷는 것은 다르다. 화려한 간판들과 붐비는 식당들이, 차별과 배제를 버텨내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산임을 알게 된다. 한국 이민자들의 역사와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차별받으면서도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결국 문화가 된 것.

7. 샌프란시스코의 불편한 현실 — 노숙자와 집값

샌프란시스코를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아름다운 도시를 기대하다가 가장 충격받는 것이 있다. 유니언 스퀘어 같은 번화가에서 불과 몇 블록 걸으면 갑자기 텐트촌이 나타난다. 노숙자들이 인도 위에 텐트를 치고, 쇼핑 카트에 짐을 싣고 다닌다. 세계 최고의 IT 기업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서, 이 풍경이 낯설고 충격적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 문제는 미국에서 뉴욕, LA 다음으로 심각하다. 인구 87만 명의 도시에 약 8,000명의 노숙자가 있다. 인구 대비 비율로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매년 수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집값이 근본 원인이다.

집값의 역설 — 진보의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이 사라지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를 자처한다. 환경 보호, 다양성, 사회 복지를 강조하는 정치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동시에 미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다. 1베드룸 아파트 평균 월세가 약 3,000달러를 넘는다. 연봉 10만 달러가 넘는 IT 엔지니어도 집값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는 도시다.

이 집값이 샌프란시스코를 만들어온 다양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다. 노동자, 예술가, 교사, 간호사, 소방관 — 도시가 기능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하이트 애시버리의 히피들이 외쳤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그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본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이 역설이 샌프란시스코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샌프란시스코에 10년 가까이 사신 현지인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이 도시가 너무 좋았어요. 다양하고, 아름답고, 자유롭고. 그런데 집값이 오르면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났어요. 이제 여기는 부자들만 사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어요. 그게 가장 슬퍼요.’ 가장 자유로운 도시가 가장 비싼 도시가 된 것의 비극이다.

8. 샌프란시스코의 음식과 동네들

미션 지구 — 라틴 문화의 심장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활기차고 맛있는 동네를 꼽으라면 미션 지구(Mission District)다. 중남미 이민자들, 특히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이 만든 이 동네는 라틴 문화와 예술, 음식이 풍성하다. 건물 벽에 그려진 대형 벽화들이 거리 전체를 갤러리로 만든다.

미션 지구에서 꼭 먹어야 할 것이 미션 스타일 부리토(Mission Style Burrito)다. 거대한 밀가루 또르띠야 안에 밥, 콩, 고기, 치즈, 살사, 사워크림, 과카몰리를 가득 채운 이 부리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탄생한 음식 형식이다. 일반 타코나 부리토의 두 배 크기다. 라 타퀘리아(La Taqueria)나 엘 파롤(El Farol) 같은 오래된 타케리아에서 줄을 서서 먹는 경험이 샌프란시스코를 가장 진정성 있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노스 비치 — 이탈리안 커피와 비트 세대

차이나타운 바로 옆, 노스 비치(North Beach)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동네다. 좁은 골목에 이탈리아 커피숍과 트라토리아들이 늘어서 있다. 이 동네에 있는 카페 트리에스테(Caffe Trieste)는 1956년에 문을 연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래된 에스프레소 카페다. 잭 케루악(Jack Kerouac)과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같은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작가들이 이 카페에서 글을 썼다. 비트 세대는 1950년대 미국 주류 사회에 반항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문학·예술 운동으로, 이후 1960년대 히피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노스 비치에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코이트 타워(Coit Tower)가 나온다. 1933년에 세워진 이 원통형 콘크리트 타워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 만 전경은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맑은 날에는 금문교와 알카트라즈 섬, 오클랜드 베이 브리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더 페리 빌딩 — 샌프란시스코의 부엌

샌프란시스코 만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시계탑이 있는 우아한 건물이 나온다. 더 페리 빌딩(The Ferry Building). 189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한때 실제 페리 터미널이었는데,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음식 시장이 되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는 파머스 마켓이 열린다. 유기농 채소, 신선한 치즈, 수제 소시지, 굴, 아이스크림, 수제 초콜릿. 캘리포니아가 자랑하는 식재료들이 총집합한 이곳에서 한 끼를 즐기는 것이, 가장 샌프란시스코다운 식사 경험이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에서 생각하는 것들

샌프란시스코는 내가 미국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도시 중 하나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열리고, 너무 불평등해서 마음이 아프다. 금문교와 노숙자 텐트촌이 같은 도시에 있다. 히피의 이상과 빅테크의 자본이 같은 거리를 공유한다. 이 공존이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직시하는 것이 샌프란시스코를 정직하게 보는 방법이다.

나는 손님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드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인가요?’ 대부분 금문교라고 하신다. 그런데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노숙자 텐트촌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 집값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놀라움, 하이트 애시버리의 자유로운 분위기, 이런 것들도 기억에 남는다고 하신다.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들을 함께 기억하는 것, 그것이 더 풍부한 여행 경험이다.

실리콘밸리의 한인들이 전하는 이야기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인 IT 종사자들을 가끔 만날 기회가 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받은 교육이 여기서 진짜 힘이 됩니다.’ 수학, 과학, 코딩. 한국 교육의 강점이 IT 산업에서 그대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또 다른 말도 한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기술만으로는 안 돼요. 자기 생각을 영어로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한국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에요.’

이 말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한국의 교육이 길러주는 것과 미국의 직장 문화가 요구하는 것 사이의 간극. 기술은 충분한데,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능력에서 막히는 경우. 이것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한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문화적 충돌이다.

저자의 한 마디   샌프란시스코는 하루 이틀로 이해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아름다운 것, 불편한 것, 모순적인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도시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판단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노숙자 텐트촌을 보며 바로 ‘미국이 이래서 안 돼’라고 결론 내리지 말고, 실리콘밸리를 보며 바로 ‘역시 미국은 대단해’라고 결론 내리지도 마세요. 그냥 보고, 듣고, 느끼세요. 그리고 돌아가서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 그 질문이 미국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9월~11월 (가장 맑고 따뜻). 봄(3~5월)도 좋음. 7~8월은 안개가 많고 차갑다. 연중 가디건·겉옷 필수

주요 관광지

금문교 (도보 횡단 권장), 피셔맨스 워프 + 클램 차우더, 알카트라즈 투어, 케이블카, 하이트 애시베리, 차이나타운, 코이트 타워

꼭 먹어야 할 것

사워도우 클램 차우더 (피셔맨스 워프), 미션 스타일 부리토 (미션 지구), 더 페리 빌딩 파머스 마켓, 노스 비치 이탈리안 커피

알카트라즈 예약

성수기(5~10월)에는 수 주 전 사전 예약 필수. alcatrazcruises.com에서 온라인 예약. 당일 현장 구매 거의 불가

추천 2일 코스

1일차: 금문교 도보 횡단→피셔맨스 워프 점심→알카트라즈 투어

 2일차: 케이블카→차이나타운→미션 지구 저녁 + 벽화 감상

숙박 추천

유니언 스퀘어 (관광 접근성 최고) / 피셔맨스 워프 주변 / 예산 절감 시 오클랜드 또는 버클리에서 BART로 이동

Chapter 9. 워싱턴 주 — 시애틀

비와 커피와 아마존의 도시, 태평양 건너편을 바라보는 사람들

시애틀(Seattle)은 미국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도시 중 하나다. 뉴욕의 화려함도 없고, 샌프란시스코의 극적인 지형도 없으며, LA의 야망도 없다. 비가 많이 오고, 날씨가 흐리고, 사람들이 말수가 적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며칠을 보내다 보면 조용히 매력에 빠져든다. 시애틀은 떠들썩하게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도시다. 그냥 거기 있다. 그런데 그 있음이 묵직하다.

시애틀이 세상에 준 것들을 생각해보면 놀랍다. 스타벅스(Starbucks)가 이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아마존(Amazon)이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마이크로소프트 (Microsoft)가 이 도시 옆에 있다. 보잉(Boeing)의 본사가 오랫동안 이 도시에 있었다. 너바나(Nirvana), 펄 잼(Pearl Jam), 지미 헨드릭스. 그런지(Grunge) 록의 발상지가 시애틀이다. 이 작은 도시가 세상에 커피 문화를 퍼뜨리고, 인터넷 쇼핑의 방식을 바꾸고, 음악의 한 장르를 만들어냈다.

나는 시애틀을 방문할 때마다 이 도시가 가진 조용한 자신감이 좋다. 큰소리치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꿔온 도시. 그 자신감의 원천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시애틀 여행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이해를 위해서는 이 도시의 비와 숲과 바다, 그리고 이 도시를 만들어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봐야 한다.

1. 시애틀이라는 도시 — 비와 녹음과 바다의 도시

시애틀은 워싱턴 주(Washington State) 서부, 퓨짓 사운드(Puget Sound)와 워싱턴 호수(Lake Washington) 사이의 좁은 반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캐스케이드 산맥, 서쪽으로는 올림픽 산맥이 도시를 에워싸고, 맑은 날에는 레이니어 산(Mt. Rainier)이 도시 어디서나 보인다. 인구는 약 75만 명으로 미국 대도시 기준으로는 작은 편이지만,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효과로 지난 20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 중 하나다.

시애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다. ‘우산의 도시’, ‘비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다. 실제로 시애틀은 연간 강수일이 약 150일에 달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연간 강수량 자체는 뉴욕이나 마이애미보다 적다. 비의 양이 많은 게 아니라 비가 오는 날이 많은 것이다. 보슬보슬 안개비가 자주 내리고, 하늘이 낮게 깔리는 날이 많다. 그래서 시애틀 사람들은 대부분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이 정도 비쯤은 그냥 맞는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 우산을 꺼내면 현지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비와 온화한 기온이 시애틀을 미국에서 가장 녹색이 짙은 도시로 만들었다. 도심 한복판에도 거대한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서 있다. 공원이 많고, 가로수가 풍성하며, 조금만 벗어나면 울창한 숲이 시작된다. 비가 오는 회색 하늘 아래 짙은 녹색 숲이 이어지는 풍경이, 시애틀 특유의 색깔이다. 처음에는 우울해 보일 수 있지만, 익숙해지면 그 차분함이 좋아진다.

시애틀의 이름 — 원주민 추장에서 도시 이름으로

시애틀이라는 이름은 드와미시(Duwamish) 부족의 추장 시앨(Chief Sealth)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초 유럽계 정착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시앨 추장은 그들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을 추구했다. 정착민들이 그를 기리는 의미로 도시 이름을 시앨에서 따왔다.

그러나 그 이름이 도시에 붙여진 이후 실제로 원주민들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이야기다. 드와미시 부족은 결국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고, 지금도 연방 정부로부터 공식 부족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도시 이름은 원주민 추장의 것인데, 그 추장의 후손들은 그 도시에서 여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이 역설이 시애틀의 이름 속에 담겨 있다.

2.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 시애틀의 심장

시애틀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이다. 1907년에 시작된 이 시장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 운영 파머스 마켓 중 하나다. 퓨짓 사운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시장은, 시애틀 사람들의 일상과 여행자들의 호기심이 만나는 곳이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있다. 생선 가게 ‘파이크 플레이스 피시(Pike Place Fish Co.)’의 생선 던지기 쇼다. 손님이 생선을 주문하면 직원들이 그 생선을 큰 소리로 외치며 공중으로 던지고, 다른 직원이 받는다. 이 퍼포먼스는 시애틀의 명물이 되었다. 처음 보시는 분들은 대부분 깜짝 놀라고, 그다음에는 웃으신다. 생선 가게가 어떻게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켓의 진짜 얼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생선 던지기 쇼만 있는 곳이 아니다. 지역 농부들이 직접 가져온 채소와 과일, 꽃, 수제 잼과 꿀, 신선한 해산물, 수제 공예품. 이 마켓을 제대로 즐기려면 주말 이른 아침에 오는 것이 좋다. 갓 구운 빵 냄새, 꽃 향기, 생선 냄새가 뒤섞이는 그 공간에서 시애틀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마켓 안에는 유명한 것들이 하나 더 있다. 세계 최초의 스타벅스 매장이다. 1971년에 문을 연 이 매장은 지금도 원래 자리에서 영업 중이다. 초록색 사이렌 로고 대신 갈색의 오래된 로고를 쓰고 있다. 전 세계에서 순례객처럼 찾아오는 곳이라 항상 줄이 길다. 커피 맛은 다른 스타벅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마신다는 의미가 특별하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줄이 너무 길면 바로 옆 독립 카페로 가세요. 훨씬 맛있고, 시애틀다운 경험이 됩니다.’

껌 벽 — 더럽지만 명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입구 옆 골목에 이상한 명소가 있다. 껌 벽(Gum Wall)이다. 수십 년간 관광객들이 씹다 버린 껌들이 건물 벽을 가득 덮고 있다. 색깔도 가지각색, 형태도 다양하다. 세계에서 가장 불위생적인 명소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2015년 한 번 청소했는데, 청소 후 며칠 만에 다시 껌이 붙기 시작했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껌이 추가된다.

나는 이 껌 벽이 묘하게 시애틀다운 것 같다. 규칙을 살짝 어기면서도, 그것이 문화가 되어버린 것. 처음 오시는 분들은 ‘이걸 왜 명소라고 하냐’고 하시지만, 막상 자기 껌도 하나 붙이고 가시는 분들이 많다.

3. 스페이스 니들과 시애틀 센터 — 미래를 꿈꿨던 도시

시애틀의 스카이라인을 상징하는 것은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이다. 1962년 시애틀 세계 박람회(World’s Fair)를 위해 건설된 이 탑은 높이 184미터, 꼭대기에 UFO처럼 생긴 원형 전망대가 있다. 건설 당시 ’21세기의 도시’를 주제로 한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다.

1962년의 시애틀 사람들이 21세기를 상상하며 만든 건물 앞에 서면, 묘한 감동이 있다. 그들이 꿈꾼 미래가 지금 우리의 현재다. 그리고 스페이스 니들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아마존 본사가 있다. 1962년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가, 60년 후 이 도시에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기업으로 태어났다. 미래를 꿈꾸는 것이 결국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시애틀이 보여준다.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에서 보이는 것들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에 오르면 360도 파노라마 전경이 펼쳐진다. 맑은 날에는 레이니어 산(Mt. Rainier, 4,392미터)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퓨짓 사운드의 짙푸른 바다, 올림픽 산맥의 설봉들, 녹음이 가득한 도시. 시애틀의 자연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 전망대에서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인지 몰랐어요.’ 맞다. 시애틀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도시다. 비가 많이 온다는 인상 때문에 많은 분들이 기대치를 낮추고 오시는데, 맑은 날의 시애틀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4. 아마존과 시애틀 — 한 기업이 도시를 바꾸다

1994년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뉴욕을 떠나 시애틀의 차고에서 아마존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온라인 서점이었다. 지금 아마존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이자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이며, 제프 베조스는 한때 세계 최고 부자였다. 이 모든 것이 시애틀의 차고에서 시작되었다.

아마존이 시애틀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지금 시애틀 도심 한복판에 아마존 캠퍼스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더 스피어스(The Spheres)’라는 세 개의 거대한 유리 구체다. 아마존 직원들이 일하는 이 건물 안에는 열대 식물 4만여 종이 자라는 실내 숲이 있다. 사무실이 숲이고, 숲이 사무실이다. 주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시애틀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아마존 효과 — 빛과 그늘

아마존이 시애틀에 가져온 것은 번영만이 아니다. 아마존 직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시애틀의 집값이 폭등했다. 2010년대 시애틀은 미국에서 집값이 가장 빠르게 오른 도시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시애틀에 살아온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샌프란시스코가 실리콘밸리 때문에 겪은 것을, 시애틀은 아마존 때문에 겪었다.

한 기업이 한 도시의 경제를 좌우하는 것의 위험성도 드러났다. 2018년 아마존이 제2본사(HQ2) 후보지를 물색할 때, 시애틀 시의회가 노숙자 지원을 위해 아마존 같은 대기업에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아마존이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시의회는 그 세금을 철회했다. 한 기업의 압력에 시 정부가 굴복한 것이다. 도시와 기업의 힘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시애틀에 오래 사신 현지인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존 오기 전 시애틀이 더 좋았어요. 물론 경제는 좋아졌지만, 동네 느낌이 없어졌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도시가 됐거든요.’ 성장과 공동체 감각,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애틀이 보여준다.

5. 스타벅스와 커피 문화 — 일상을 바꾼 한 잔

1971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세 명의 친구가 커피 원두를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그 가게의 이름이 스타벅스다. 처음에는 커피 음료를 파는 것이 아니라 커피 원두만 팔았다. 1987년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가 회사를 인수해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 문화를 미국식으로 재해석하면서 지금의 스타벅스가 탄생했다.

스타벅스가 세상에 준 것은 단순히 커피가 아니다. ‘제3의 공간(Third Place)’이라는 개념이다. 집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 스타벅스 이전에 미국의 커피숍 문화는 지금과 달랐다. 빠르게 테이크아웃하는 것이 주였다. 스타벅스가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일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공간으로 커피숍을 재정의했다. 그 문화가 지금 전 세계 카페 문화의 표준이 되었다.

시애틀의 커피 철학 — 스타벅스 너머

시애틀 사람들은 스타벅스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자부심과 반감이 공존한다. ‘스타벅스는 시애틀이 세계에 준 선물’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한편, ‘스타벅스 때문에 진짜 커피 문화가 상업화되었다’는 반감도 있다.

그래서 시애틀에는 스타벅스에 대항하는 독립 카페 문화가 강하다. 빅트롤라 커피(Victrola Coffee), 카페 비타(Caffe Vita), 라 마르조꼬(La Marzocco Cafe) 같은 독립 로스터리들이 스타벅스와 다른 방향의 커피 철학을 추구한다. 싱글 오리진(Single Origin) 원두, 직접 로스팅, 바리스타의 전문성. 시애틀의 독립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스타벅스와 확실히 다르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에게 나는 꼭 독립 카페를 한 번 경험해보시라고 권한다. ‘스타벅스 발상지’에 왔으니 스타벅스를 당연히 가시겠지만, 시애틀의 진짜 커피 문화는 그 골목 사이사이 작은 카페들에 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시애틀의 골목에서, 독립 카페의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것이 가장 시애틀다운 경험이다.

6. 그런지 록과 시애틀의 음악 — 고통이 만든 소리

1991년 9월 24일, 너바나(Nirvana)의 앨범 ‘Nevermind’가 발매되었다. 수록곡 ‘Smells Like Teen Spirit’이 라디오를 타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팝 음악이 지배하던 1980년대 미국 음악 시장에서, 거칠고 날것의 사운드가 폭발한 것이다. 그 폭발의 진원지가 시애틀이었다.

그런지(Grunge)는 시애틀에서 태어난 음악 장르다. 헤비메탈의 무거움과 펑크의 반항 정신, 인디 록의 날것의 감성이 합쳐진 이 음악은 1990년대 초 너바나, 펄 잼(Pearl Jam), 사운드가든(Soundgarden),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그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갑자기 세계 음악의 중심이 되었다.

커트 코베인과 시애틀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은 시애틀 출신은 아니다. 워싱턴 주 애버딘(Aberdeen)이라는 작은 도시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시애틀로 이사와 음악을 만들었고, 시애틀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에서 성장했다. 1994년 그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시애틀은 슬픔에 잠겼다.

시애틀의 캘 앤더슨 파크(Cal Anderson Park) 근처에 커트 코베인이 자주 앉아 있던 벤치가 있다. 지금도 팬들이 꽃을 놓고 간다. 왜 그렇게 많은 천재들이 젊어서 떠나는가.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 — 모두 스물일곱에 사망한 ’27 클럽’의 일원들이다. 그 불꽃 같은 삶이 음악이 되었고, 그 음악이 세대를 넘어 살아남는다.

뮤직 박물관 — 음악으로 읽는 미국

스페이스 니들 옆에 뮤직 박물관(MoPOP, Museum of Pop Culture)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폴 앨런(Paul Allen)이 설립한 이 박물관은 록 음악, 공상과학, 판타지, 게임 문화를 아우르는 독특한 공간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커트 코베인의 스웨터, 너바나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건물 자체도 예술 작품이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이 건물은 구겨진 금속 조각들이 이어붙인 것처럼 생겼다. 전통적인 건축 형태를 완전히 무시한 디자인이다. 건물 안에서 박물관을 보고 나와 건물 밖에서 그 형태를 바라보면, ‘이것도 그런지 정신의 건축적 표현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 규칙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시애틀의 정신이다.

7. 시애틀 주변의 자연 — 도시 옆의 압도적인 세계

시애틀은 자연 속의 도시다.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만 달리면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시애틀이 가진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레이니어 산 — 잠든 화산이 만든 성

맑은 날 시애틀 어디서든 보이는 레이니어 산(Mt. Rainier). 높이 4,392미터의 이 활화산은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다. 만년설로 덮인 새하얀 봉우리가 도시 어디서나 보일 때, 시애틀 사람들은 ‘마운틴이 나왔다(The Mountain is Out)’고 말한다. 비 오는 날이 많은 시애틀에서 레이니어 산이 보이는 날은 특별한 날이다.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Mt. Rainier National Park)은 시애틀에서 약 2시간 거리다. 여름에는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과 빙하를 볼 수 있고, 겨울에는 스키와 스노우슈 하이킹이 가능하다. 국립공원 입구인 파라다이스(Paradise)까지 올라가면 빙하 위를 걷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한국 분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코스는 여름의 야생화 시즌이다. 6~8월 레이니어 산 중턱의 초원이 온갖 색깔의 야생화로 뒤덮이는 광경은, 미국의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올림픽 국립공원 — 온대 우림의 기적

시애틀 서쪽, 올림픽 반도(Olympic Peninsula)에 올림픽 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이 있다. 이 공원에는 미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온대 우림 (Temperate Rainforest)이 있다. 하오 레인포레스트(Hoh Rainforest)는 연간 강수량이 3~4미터에 달하는 습기 가득한 숲이다. 거대한 나무들이 이끼로 뒤덮여 있고, 그 나무들 사이로 공기가 물처럼 흐른다.

처음 이 숲에 들어가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용하고, 축축하고, 온 세상이 초록으로 가득하다. 한국 분들이 이 숲에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어요.’ 나는 그 감탄이 좋다.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 숲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산후안 아일랜드 — 고래를 보다

시애틀 북쪽, 퓨짓 사운드를 건너 산후안 아일랜드(San Juan Islands)에 가면 범고래(Orca)를 볼 수 있다. 매년 여름, 이 지역 해협에서 범고래 가족들이 먹이를 찾아 헤엄친다. 배를 타고 나가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8. 시애틀의 한인 커뮤니티 — 태평양을 건너온 사람들

시애틀의 한인 커뮤니티는 LA나 뉴욕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특성이 있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같은 대기업에 취업한 한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다. LA 코리아타운처럼 상업 중심의 커뮤니티보다는, 전문직과 중산층 중심의 커뮤니티 성격이 강하다.

시애틀 한인들은 주로 도심 북쪽의 린우드(Lynnwood), 벨뷰(Bellevue), 레드먼드(Redmond) 지역에 많이 산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레드먼드에 있고, 아마존이 시애틀 도심에 있어 이 두 회사 한인 직원들이 그 사이에 정착한다. 한국 마트와 식당들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시애틀에서 만난 교민들의 이야기

시애틀에서 여러 해를 사신 교민 분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시애틀은 살기 좋아요. 자연이 아름답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날씨만 빼면요.’ 그 ‘날씨만 빼면’이 핵심이다. 겨울의 긴 흐린 날씨가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분들이 있다. 시애틀에는 ‘시애틀 블루스(Seattle Blues)’라는 말이 있다. 흐린 날씨로 인한 우울감을 지칭하는 말이다. 실제로 시애틀은 미국에서 항우울제 소비량이 높은 도시 중 하나라는 통계가 있다.

그럼에도 많은 교민들이 시애틀을 떠나지 않는다. 자연 때문이다. 주말에 레이니어 산을 하이킹하고, 여름에 산후안 아일랜드에서 고래를 보고, 겨울에 스노우슈를 신고 설산을 걷는다. 그 자연이 주는 경험이 흐린 날씨의 우울함을 상쇄한다고 하신다. 도시와 자연이 이렇게 가까운 곳은 미국에서 시애틀이 거의 유일하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시애틀 — 조용하지만 깊은 도시

시애틀 사람들의 성격

시애틀에는 ‘Seattle Freeze’라는 말이 있다. 시애틀 사람들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친절한데, 진짜 친구가 되기까지는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따뜻하지만(Friendly) 실제로 친해지기는 어렵다(Not Friendly)는 것. 뉴욕 사람들이 겉으로 차갑지만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직접적인 것과 반대다.

한국 분들이 시애틀 사람들을 만나면 처음에는 친절함에 좋아하시다가, 시간이 지나도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고 느끼시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시애틀 프리즈다. 나는 이것이 이 도시의 기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좀 더 안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북유럽 국가들의 사람들이 비슷하다.

시애틀과 한국 — 태평양으로 연결된 인연

시애틀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미국 대도시 중 하나다. 서울에서 시애틀까지 직항 비행기로 약 9~10시간. 미국 대도시 중 가장 짧은 비행 시간이다. 그 지리적 근접성이 역사적으로 한국과 시애틀의 인연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 온 초기 한인 이민자들 중 상당수가 시애틀을 거쳐 갔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배가 시애틀 항구에 닿았기 때문이다. 시애틀은 많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미국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 역사가 시애틀과 한국인의 인연을 오래전부터 만들어왔다.

지금도 시애틀과 서울의 연결은 가깝다. 한국 음식에 관심 있는 시애틀 시민들이 코리안 타운의 식당을 찾고, 시애틀의 커피와 자연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이 도시를 여행지로 선택한다. 태평양이 두 도시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고 있다.

시애틀에서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시애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들에게 나는 이런 말씀을 드린다. 시애틀은 빠르게 감동하는 도시가 아니다. 느리게, 조금씩 마음속에 스며드는 도시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생선 냄새, 비가 오는 날 독립 카페에서 마신 커피 한 잔, 스페이스 니들에서 바라본 레이니어 산, 그런지 음악이 흘러나오던 작은 라이브 바. 이것들이 시애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조용한 도시가 스타벅스와 아마존과 그런지 록을 세상에 내보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큰소리치지 않는 사람이 때로 가장 크게 세상을 바꾼다. 시애틀이 그것을 증명한다.

저자의 한 마디   시애틀은 비가 오는 날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비가 오는 날의 시애틀이 더 시애틀답습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핫클램 차우더를 손에 들고, 보슬비를 맞으며 퓨짓 사운드를 바라보는 것. 작은 카페에서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 이것이 진짜 시애틀 경험입니다. 맑은 날에는 스페이스 니들에서 레이니어 산을 보고, 비 오는 날에는 마켓과 카페와 뮤직 박물관을 즐기세요. 어느 날씨든 시애틀은 선물을 줍니다.

시애틀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7월~9월 (가장 맑고 따뜻, 레이니어 산 야생화 시즌). 10~5월은 비 오는 날이 많지만 관광객이 적고 도시 분위기가 좋다

주요 관광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최초 스타벅스 포함),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 아마존 더 스피어스, 뮤직 박물관(MoPOP), 알카이 비치, 워싱턴 대학교(UW) 캠퍼스

근교 자연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 (차 2시간), 올림픽 국립공원 하오 레인포레스트 (페리+차 2.5시간), 산후안 아일랜드 범고래 투어 (페리 3시간, 여름 한정)

꼭 먹어야 할 것

파이크 플레이스 클램 차우더, 독립 카페 싱글오리진 커피, 던저니스 크랩, 딕스 드라이브인 버거 (현지 인앤아웃)

추천 2일 코스

1일차: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아침→스페이스 니들→아마존 더 스피어스→뮤직 박물관

2일차: 알카이 비치 산책→벨뷰 쇼핑→맑은 날이라면 레이니어 산 당일치기

한인 커뮤니티

벨뷰·레드먼드 (마이크로소프트 인근, 한인 밀집), 린우드 (H마트·한국 식당 밀집), 연방 구역(Federal Way) (남쪽 한인 밀집)

날씨 준비

연중 방수 재킷 필수. 여름에도 긴 소매 하나는 챙길 것. 우산은 짧은 접이식보다 고어텍스 재킷이 더 실용적 (현지인들은 우산 잘 안 씀)

Chapter 10. 오리건 — 포틀랜드

미국에서 가장 실험적인 도시, 진보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포틀랜드(Portland)는 미국에서 가장 이상한 도시다. 좋은 의미에서. 도시 곳곳에 ‘이상하게 유지하라(Keep Portland Weird)’는 슬로건이 붙어 있다. 실제로 그 슬로건이 생활 방식으로 구현된 도시다. 도넛 가게가 예술 작품이 되고, 자전거가 자동차만큼 중요한 교통수단이며, 뒷마당에서 닭을 키우는 것이 허용된다. 노숙자들이 텐트를 치고, 마리화나 가게가 커피숍 옆에 있으며,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유니콘 의상을 입고 자전거를 탄다.

처음 포틀랜드에 오시는 분들은 당황하신다. ‘이게 미국 도시가 맞아요?’ 맞다. 그런데 다른 어떤 미국 도시와도 다르다. 포틀랜드는 미국 주류 사회의 바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다. 예술가, 환경운동가, 채식주의자, 자전거 애호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단지 이 분위기가 좋아서 온 사람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포틀랜드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러나 포틀랜드를 ‘히피들의 천국’이나 ‘진보의 유토피아’로만 보면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이 도시도 노숙자 문제로 신음하고, 마약 위기를 겪고, 인종 갈등의 상처를 안고 있다. 가장 진보적인 이상을 내세우면서, 그 이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날것으로 보여주는 곳이 포틀랜드다. 그 날것의 솔직함이 이 도시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1. 포틀랜드라는 도시 — 오리건의 이상한 심장

포틀랜드는 오리건 주(Oregon) 북서부, 컬럼비아강(Columbia River)과 윌라멧강(Willamette River)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인구는 약 65만 명.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약 280킬로미터, 차로 3시간 거리다. 태평양 연안에서 약 100킬로미터 내륙에 있어,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바다가 바로 보이지는 않는다.

포틀랜드의 도시 구조는 독특하다. 윌라멧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고, 다시 남북으로 나뉜다. 도심은 서쪽에 있고, 강 건너 동쪽은 주거 지역과 독립 상업 지구들이 발달해 있다. 블록이 매우 작아서 걷기 좋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있다.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 순위에 항상 상위권에 드는 도시다.

날씨는 시애틀과 비슷하다. 비가 많고, 겨울이 흐리다. 여름은 시애틀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건조하다. 7월과 8월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고 기온이 25~30도까지 오른다. 이 짧은 여름이 포틀랜드 사람들에게 황금 같은 계절이다. 여름 포틀랜드는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된다. 공원마다 사람들이 넘치고, 야외 페스티벌이 끊이지 않는다.

‘이상하게 유지하라’ — 슬로건이 된 생활 방식

‘Keep Portland Weird’. 이 슬로건은 원래 오스틴(Austin, 텍사스)에서 시작되었다. 포틀랜드가 그것을 빌려와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독립 서점과 소규모 상점들이 대형 체인에 밀리지 않도록 지역 비즈니스를 지원하자는 취지였다. 그것이 점점 포틀랜드의 전체적인 문화 정체성으로 확장되었다.

이 슬로건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이상한 것을 좋아하자’가 아니다. ‘획일화에 저항하자’는 뜻이다. 미국 전역에 같은 간판, 같은 메뉴, 같은 인테리어의 체인 식당과 대형 마트가 늘어나는 현상에 맞서, 독립적이고 개성 있는 것을 지키자는 것이다. 이 정신이 포틀랜드를 미국에서 가장 다양하고 창의적인 독립 비즈니스 생태계를 가진 도시로 만들었다.

2. 파월스 서점 — 책의 도시, 도시의 책

포틀랜드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파월스 북스(Powell’s Books)를 꼽는다. 1971년에 문을 연 이 독립 서점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도시 블록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건물 안에 약 100만 권의 책이 있다. 미국에서 가장 큰 독립 서점이다.

파월스에 처음 들어가면 압도당한다. 천장까지 책이 쌓여 있는 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지도를 주는데, 그 지도가 없으면 길을 잃는다. 신간과 중고책이 같은 선반에 놓여 있다. 아마존이 서점을 없애고 있는 시대에, 파월스는 오히려 더 번성하고 있다. 아마존 본사가 있는 시애틀에서 3시간 거리에서.

파월스가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 책 사이를 헤매며 예상치 못한 책을 발견하는 경험, 중고책 코너에서 누군가의 밑줄 그어진 흔적을 보는 경험, 서점 직원이 손으로 쓴 추천 카드를 읽으며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경험. 이것들은 아마존이 줄 수 없는 것이다.

포틀랜드에서 파월스 서점을 안내했을 때,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하시던 교민 손님의 따님이 한 시간을 혼자 돌아다니신 뒤 나오셨다. 손에 책 세 권을 들고. ‘이 서점에 있으면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 ‘ 그것이 파월스의 마법이다.

3. 음식 문화 — 미국 푸드 트럭의 수도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푸드 트럭 문화가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다. 도시 곳곳에 ‘푸드 카트 팟(Food Cart Pod)’이라는 공간이 있다. 주차장이나 빈 공터에 여러 대의 푸드 트럭이 모여 하나의 야외 음식 시장을 이루는 형태다. 멕시코, 태국, 에티오피아, 한국, 인도, 아이슬란드 음식까지. 세계 각국의 음식을 한 공간에서 골라 먹을 수 있다.

포틀랜드의 푸드 카트 팟은 단순한 먹거리 장터가 아니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음식으로 미국에 진입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대형 레스토랑을 열 자본은 없지만, 작은 트럭 하나로 자신의 나라 음식을 팔 수 있다. 그 음식이 입소문을 타면 고정 식당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포틀랜드의 유명한 레스토랑 중 상당수가 푸드 트럭으로 시작했다.

부두 도넛— 포틀랜드가 도넛을 예술로 만든 방법

포틀랜드는 도넛으로도 유명하다. ‘부두 도넛(Voodoo Doughnut)’은 포틀랜드를 상징하는 가게가 되었다. 2003년에 문을 연 이 가게는 도넛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부두 인형 모양의 도넛에 프레첼 십자가를 꽂은 것, 베이컨이 올라간 메이플 도넛, 시리얼이 뿌려진 도넛, 캡틴 크런치 도넛. 보통 도넛 가게에서 볼 수 없는 창의적인 조합들이다.

새벽에도 줄이 늘어서는 이 가게는 포틀랜드의 ‘이상하게 유지하라’ 정신을 가장 달콤하게 구현한 사례다. 도넛 하나에 스토리가 있고, 비주얼이 있고, 경험이 있다. 한국 분들이 이 가게에서 도넛을 들고 사진을 찍으실 때의 표정이 나는 좋다. 나이에 상관없이 다들 어린아이 같아진다. 달콤한 것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커피와 브루어리 — 독립의 맛

포틀랜드는 스페셜티 커피와 크래프트 맥주로도 유명하다. 스텀프타운 커피 (Stumptown Coffee)는 포틀랜드에서 시작해 미국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이끈 브랜드다. 지금은 뉴욕 등 여러 도시로 확장했지만 포틀랜드 본점의 느낌은 다르다. 포틀랜드 독립 카페들의 커피 철학은 시애틀과 비슷하면서도 더 실험적이다. 자연 발효 커피, 콜드 브루 칵테일, 커피와 와인을 섞은 음료까지.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도 포틀랜드의 명물이다. 인구 대비 브루어리 수가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다. 동네마다 작은 브루어리가 있고, 각각 독특한 레시피의 맥주를 만든다. 해질 무렵 포틀랜드의 작은 브루어리 야외 테이블에 앉아 현지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것이 포틀랜드를 가장 포틀랜드답게 즐기는 방법이다.

4. 포틀랜드의 자연 — 도시가 숲으로 향할 때

포레스트 파크 — 도심 안의 야생

포틀랜드 북서쪽 언덕에 포레스트 파크(Forest Park)가 있다. 약 5,200에이커 규모의 이 공원은 미국 도시 공원 중 가장 큰 곳 중 하나다. 공원 안에 약 80킬로미터의 하이킹 트레일이 있다. 다운타운에서 차로 10분이면 닿는 이 숲 안으로 들어가면,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다. 수백 년 된 더글러스 전나무와 서양 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이끼가 낀 바위들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른다.

포레스트 파크는 포틀랜드 사람들의 일상이다. 출근 전에 하이킹을 하고, 주말에 가족과 함께 숲을 걷는다. 개를 데리고 온 사람, 조깅하는 사람, 버섯을 채집하는 사람들이 같은 숲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을 즐긴다. 도시와 자연이 이렇게 일상적으로 가까운 곳이, 포틀랜드가 많은 사람들에게 ‘살고 싶은 도시’가 된 이유 중 하나다.

컬럼비아강 협곡 — 바람과 폭포의 드라이브

포틀랜드에서 동쪽으로 약 30분. 컬럼비아강 협곡(Columbia River Gorge)이 시작된다. 컬럼비아강이 캐스케이드 산맥을 뚫고 흐르면서 만들어낸 이 협곡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협곡 북쪽 오리건 쪽 도로 (Historic Columbia River Highway)를 따라 달리면, 양옆으로 현무암 절벽이 솟아오르고 크고 작은 폭포들이 절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멀트노마 폭포(Multnomah Falls)다. 620피트(약 189미터) 높이에서 두 단계로 떨어지는 이 폭포는 오리건에서 가장 많이 방문되는 자연 명소다. 폭포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목이 아플 정도로 높다. 폭포 위의 다리까지 올라가면 협곡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 분들이 이 폭포를 보고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진보다 훨씬 크네요.’ 폭포는 항상 그렇다. 실물이 훨씬 크고 훨씬 시원하다.

5. 포틀랜드의 불편한 진실 — 진보의 이상과 현실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 하나를 자처한다. 환경 보호, 다양성, 사회적 평등을 강조하는 정치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이 진보적인 이상이 현실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노숙자 위기 — 가장 진보적인 도시의 가장 큰 실패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노숙자 문제가 가장 심각한 도시 중 하나다. 인구 65만 명의 이 도시에 약 5,000명 이상의 노숙자가 있다. 인구 대비 비율로는 LA나 뉴욕보다 높다. 도심 곳곳에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고, 다운타운 거리에서 노숙자들을 피해 걷기 어려울 정도다.

2020년 오리건 주는 미국 최초로 마약 소지를 비범죄화했다. 헤로인, 코카인, 메스암페타민을 소량 소지해도 형사 처벌 대신 치료를 받도록 한 것이다. 진보적인 마약 정책의 실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마약 사용이 오히려 늘었고, 공공장소에서의 마약 사용이 더 눈에 띄게 되었다. 치료 시설과 지원 체계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범죄화만 시행된 것이 문제였다. 결국 2024년 오리건 주는 이 정책을 다시 철회했다.

이 실험의 실패는 포틀랜드가 마주한 진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현실의 복잡함을 무시한 이상주의는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다. 그 교훈을 포틀랜드가 온몸으로 겪고 있다.

인종 문제 — 가장 백인 비율이 높은 진보 도시

포틀랜드는 역설적으로 미국 대도시 중 백인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백인이다. 다양성을 외치는 진보적인 도시가 실제로는 가장 동질적인 도시라는 아이러니다. 그 이유는 역사에 있다.

19세기 오리건 주는 헌법에 흑인의 이주와 거주를 금지하는 조항을 뒀다. 미국에서 그런 조항을 명시한 거의 유일한 주였다. 그 조항은 1926년에야 공식 폐지되었다. 이 역사가 오리건의 인구 구성에 오랜 영향을 미쳤다. 포틀랜드가 ‘다양성을 지지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의 무게는 이 역사와 함께 읽어야 한다.

포틀랜드를 처음 방문한 교민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도시가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우리 같은 동양인은 별로 안 보이네요.’ 그 관찰이 정확하다. 진보를 외치는 것과 실제로 다양한 것은 다른 이야기다. 포틀랜드는 그 간극을 솔직하게 직면하는 중이다.

6. 포틀랜드의 예술과 문화 — 창의성의 생태계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꼽혀왔다. LA나 뉴욕에 비해 생활비가 낮고(물론 최근에는 올랐지만), 창의적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으며, 독립 정신을 지지하는 문화가 있다. 음악가, 화가, 작가, 영화감독, 디자이너들이 포틀랜드를 창작 기지로 삼아왔다.

펄 디스트릭트와 갤러리들

다운타운 북쪽의 펄 디스트릭트(Pearl District)는 한때 산업 지대였다가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 변모한 동네다. 갤러리, 부티크, 레스토랑, 서점들이 낡은 창고 건물들을 채웠다. 포틀랜드판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자본이 흡수하면서, 원래 이 동네를 활성화한 예술가들은 점점 밀려났다. 샌프란시스코, 브루클린에서 반복된 패턴이 여기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펄 디스트릭트는 여전히 포틀랜드에서 가장 세련되고 걷기 좋은 동네다. 주말 오후에 이 동네를 걸으면, 카페와 갤러리를 드나드는 사람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커플들, 야외 식당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여유로운 도시 생활이 여기 있다.

포틀랜드 아트 뮤지엄과 문화 시설들

포틀랜드 아트 뮤지엄(Portland Art Museum)은 미국 서부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다. 1892년에 설립된 이 미술관에는 유럽 고전 회화, 아시아 미술, 미국 원주민 예술, 현대미술이 두루 있다. 특히 북서부 원주민들의 예술품 컬렉션이 인상적이다. 이 지역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예술품들에 담겨 있다.

포틀랜드는 독립 영화 씬도 활발하다. 매년 포틀랜드 국제 영화제(Portland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열리고, 작은 독립 영화관들이 상업 영화가 아닌 독립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미국 주류 문화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포틀랜드의 스크린에서 살아남는다.

7. 한국인의 눈으로 본 포틀랜드

포틀랜드의 한인 커뮤니티

포틀랜드의 한인 커뮤니티는 규모가 크지 않다. LA나 시애틀에 비해 한국 마트나 식당도 적다. 그러나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포틀랜드 남쪽 비버튼(Beaverton)과 힐스버러(Hillsboro) 지역에 인텔(Intel) 반도체 공장이 있는데, 이 공장에 취업한 한인 엔지니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포틀랜드의 한인들은 다른 대도시의 한인 커뮤니티보다 작지만, 커뮤니티 결속력이 강한 편이다. 규모가 작으니 서로 더 잘 알고, 도움이 필요할 때 연결이 빠르다.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규모와 결속력은 종종 반비례한다.

포틀랜드에서 배우는 것

나는 포틀랜드를 방문한 후 손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린다. ‘포틀랜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인가요?’ 대부분 파월스 서점 또는 멀트노마 폭포라고 하신다. 그런데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포틀랜드의 분위기 자체가 기억에 남는다고 하신다.

미국에서 가장 규격화된 곳들 — 맥도날드가 있고, 스타벅스가 있고, 월마트가 있는 — 을 지나 포틀랜드에 오면, 도시도 개인처럼 개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모든 도시가 같아져가는 시대에, 포틀랜드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한다. 그것이 항상 성공하지는 않는다. 마약 비범죄화 실험처럼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더 나은 방식을 찾으려는 시도.

한국 사회도 비슷한 질문 앞에 있다. 서울이 도쿄나 뉴욕과 비슷해져가는 것이 발전인가, 아니면 상실인가. 각 지역이 자신만의 개성을 잃어가는 것이 효율인가, 아니면 빈곤인가. 포틀랜드를 걸으면서 그 질문들이 떠오른다. 정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질문을 갖고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포틀랜드 여행의 가치가 있다.

저자의 한 마디   포틀랜드는 계획 없이 걸어도 좋은 도시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윌라멧강 옆을 따라 걷다가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고, 골목에서 발견한 벽화 앞에서 멈추고, 이상하게 생긴 도넛을 사 먹고, 작은 브루어리에서 현지 맥주를 마시는 것.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나면 포틀랜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은 안다. 그 느낌이 이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파월스 서점만큼은 꼭 가세요. 시간을 많이 잡고. 들어가면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포틀랜드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6월~9월 (건조하고 따뜻, 포레스트 파크 하이킹 최적). 7~8월 여름이 가장 좋다. 10~5월은 시애틀처럼 비가 많다

주요 관광지

파월스 서점 (2~3시간 확보 권장), 빕 앤드 도넛, 파이오니어 코트하우스 스퀘어, 펄 디스트릭트, 포레스트 파크 하이킹, 포틀랜드 아트 뮤지엄

근교 자연

멀트노마 폭포 (동쪽 30분), 컬럼비아강 협곡 드라이브, 마운트 후드 (Mt. Hood, 동쪽 1.5시간, 스키·하이킹)

꼭 먹어야 할 것

부두 도넛, 스텀프타운 커피, 로컬 크래프트 맥주, 푸드 카트 팟 (SW 10th & Alder 교차로 추천)

시애틀→포틀랜드

암트랙 캐스케이드 열차 3.5시간 (경치 아름다움), 차량 3시간 (I-5 고속도로)

추천 1박 2일 코스

1일차: 파월스 서점→펄 디스트릭트 점심→포레스트 파크 하이킹→크래프트 브루어리 저녁

2일차: 토요 마켓→멀트노마 폭포 당일치기→부두 도넛

주의사항

다운타운 일부 구역 노숙자 텐트촌 밀집. 야간 혼자 다닐 때 주의. 마리화나 판매점 합법 운영 중 (성인 21세 이상)

Chapter 11. 네바다 — 라스베이거스

사막 위의 욕망, 쇼 뒤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삶

라스베이거스(Las Vegas)는 미국에서 가장 솔직한 도시다. 다른 도시들이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고 숨길 때, 라스베이거스는 그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도박, 쇼, 술, 나이트클럽, 결혼식.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들이 사막 한가운데 네온사인으로 빛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난 일은 라스베이거스에 남는다(What Happens in Vegas, Stays in Vegas)’라는 슬로건이 이 도시의 철학이다. 일상에서 억누른 것들을 여기서 풀고 가라는 초대장.

라스베이거스를 처음 방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 중 하나를 보이신다. ‘이게 뭐야, 대단하다’와 ‘이게 뭐야, 너무 하다’. 둘 다 맞는 반응이다. 라스베이거스는 그 두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도시다. 화려함에 압도되면서 동시에 그 화려함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 그 이중감이 라스베이거스 경험의 핵심이다.

나는 라스베이거스를 수백 번 방문했다. 처음에는 그 화려함에 놀랐고, 나중에는 그 화려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카지노 안에 시계가 없는 이유, 창문이 없는 이유, 산소를 주입한다는 설이 도는 이유.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을 더 오래, 더 많이 쓰도록 설계된 장치들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인간의 욕망을 연구한 가장 정교한 실험실이다.

1.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 — 사막에 핀 신기루

라스베이거스는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한가운데 있다. 네바다 주 남부, 해발 610미터의 분지 위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주변이 온통 사막이다. 여름에는 기온이 45도를 넘기도 한다.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 이런 도시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아니,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집념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물은 콜로라도강(Colorado River)에서 온다. 후버 댐(Hoover Dam)이 그 물을 저장하고, 미드 호수(Lake Mead)가 라스베이거스를 포함한 이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 사막 위의 도시가 1년 내내 수영장을 채우고, 분수를 뿜고, 골프 코스를 푸르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물 덕분이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미드 호수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수위가 역대 최저를 기록하면서, 라스베이거스의 물 공급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사막 위의 욕망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자연이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구는 약 65만 명이지만 관광객까지 포함하면 매년 4,000만 명 이상이 이 도시를 거쳐 간다. 인구 대비 방문객 비율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막 한가운데 이런 도시가 생겨난 것도 놀랍지만, 그 도시에 매년 4,000만 명이 온다는 것은 더 놀랍다. 그것이 라스베이거스의 힘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역사 — 마피아에서 메가 리조트로

라스베이거스의 현대적 역사는 1931년 네바다 주가 도박을 합법화하면서 시작된다. 같은 해 후버 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건설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을 위한 카지노와 술집들이 생겨났다. 1940~50년대에는 마피아 자본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개발에 투입되었다. 벅시 시겔(Bugsy Siegel)이 세운 플라밍고 (Flamingo) 호텔이 현대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시작이었다.

1960~70년대에는 하워드 휴스(Howard Hughes)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들을 사들이면서 마피아의 영향력을 줄이고 기업형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이후 MGM, 시저스, 힐튼 같은 대기업들이 들어오면서 라스베이거스는 마피아의 도시에서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도시로 변했다. 1990년대에는 스티브 윈(Steve Wynn)이 럭셔리 리조트 개념을 도입해 미라지(Mirage), 벨라지오(Bellagio) 같은 메가 리조트들이 세워졌다. 그것이 지금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모습이다.

2. 더 스트립 — 인류가 만든 가장 화려한 거리

라스베이거스 블러바드(Las Vegas Boulevard), 일명 ‘더 스트립(The Strip)’. 약 6.5킬로미터에 걸쳐 세계 최대 규모의 호텔 카지노들이 늘어선 이 거리는 밤에 가장 화려하다. 낮에는 그냥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지만, 밤이 되면 수백만 개의 조명이 켜지면서 사막이 불야성이 된다.

더 스트립을 처음 걷는 분들은 그 스케일에 압도된다. 벨라지오 앞 분수 쇼, 파리 호텔의 에펠탑, 뉴욕 뉴욕 호텔의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 스카이라인, 베네치안 호텔 안의 인공 운하와 곤돌라, 시저스 팰리스의 로마 광장. 세계 각국의 명소를 압축해놓은 이 거리는 걷는 것만으로 ‘세계 여행’을 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 착각이 라스베이거스의 전략이다.

벨라지오 분수 — 무료 쇼의 법칙

더 스트립에서 가장 유명한 무료 볼거리는 벨라지오 호텔(Bellagio Hotel) 앞 분수 쇼다. 인공 호수 위에서 음악에 맞춰 1,200개의 분수가 춤을 추는 이 쇼는 낮에는30분마다, 밤에는 15분마다 진행된다. 낮에도 아름답지만 밤에는 더욱 극적이다. 조명을 받은 물기둥이 최대 140미터까지 솟아오른다.

이 분수 쇼가 공짜인 이유가 있다. 벨라지오 앞 인도가 자연스럽게 카지노 입구와 연결되어 있다. 분수 쇼를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은 카지노가 한다. 라스베이거스의 공짜는 없다. 공짜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람을 카지노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다.

호텔들의 경쟁 —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더 스트립의 호텔들은 서로 더 크고 더 화려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 MGM 그랜드는 5,000개 이상의 객실을 가진 세계 최대 호텔 중 하나다. 베네치안과 팔라조를 합치면 7,000개가 넘는다. 이 규모를 이해하려면 숫자를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호텔의 객실 수가 보통 1,000개 미만이다. 라스베이거스 호텔들은 그것의 5~7배다.

그런데 이 거대한 호텔들이 비어있는 날이 거의 없다. 매년 4,000만 명의 방문객들이 이 객실을 채운다. 경기 침체기에도 라스베이거스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다. 사람들이 힘들수록 현실 도피의 욕구가 강해지고, 라스베이거스는 그 도피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불황에 강한 도시, 그것이 라스베이거스의 역설적인 강점이다.

3. 카지노의 과학 — 인간 심리를 해킹하는 공간

카지노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있다.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카지노에는 창문이 없다. 시계도 거의 없다. 밖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다. 그 공간 안에 있는 한 시간의 흐름이 멈춘다. 이것이 카지노 설계의 첫 번째 원칙이다. 시간을 없애라.

두 번째 원칙은 출구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카지노 바닥은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 슬롯머신과 테이블 게임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어 직선으로 걸을 수 없다. 화장실을 찾으려 해도, 음식점을 찾으려 해도, 반드시 게임 구역을 통과해야 한다. 지나치면서 눈길이 간다. 눈길이 가면 발걸음이 느려진다. 발걸음이 느려지면 앉게 된다. 앉으면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세 번째는 돈을 ‘칩’이나 ‘크레딧’으로 바꾸는 것이다. 100달러 지폐를 잃는 것과 100달러어치 칩을 잃는 것은 심리적으로 다르다. 칩은 추상적이다. 진짜 돈이라는 느낌이 약하다. 그 추상성이 사람들이 더 쉽게, 더 많이 베팅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칩 대신 카드에 크레딧을 넣어 쓰는 방식이 많아졌는데, 이것은 더욱 추상적이다. 진짜 돈을 잃고 있다는 감각이 더욱 희미해진다.

슬롯머신의 심리학

카지노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것은 슬롯머신이다. 블랙잭이나 포커는 전략이 개입되고 딜러와 상호작용이 있지만, 슬롯머신은 그냥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행위가 왜 사람들을 몇 시간씩 붙잡아두는가.

심리학에서 ‘간헐적 강화(Variable Ratio Reinforcement)’라는 개념이 있다. 보상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을 때, 그 행동을 가장 강하게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슬롯머신이 정확히 이 원리로 작동한다. 언제 잭팟이 터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음 번에는 될 것 같다는 기대로 계속 버튼을 누르게 된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뇌 구조가 이 패턴에 취약하게 되어 있다.

처음 라스베이거스에 온 손님 한 분이 슬롯머신 앞에서 한 시간을 보내셨다. 나중에 말씀하셨다. ‘이상하게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그냥 다음 번엔 될 것 같아서.’ 그 말이 슬롯머신 설계자가 원하는 정확한 반응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덫에 걸리는 것이 인간이다.

4. 쇼와 엔터테인먼트 — 도박 도시에서 공연 도시로

라스베이거스는 더 이상 단순한 도박 도시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거점으로 변모했다. 세계 최정상 가수와 코미디언, 마술사, 서커스 단원들이 상주하며 공연한다. 엘튼 존, 셀린 디온, 브루노 마스, 레이디 가가가 라스베이거스 전용 공연장에서 장기 공연을 했다. 이것을 ‘레지던시(Residency)’라고 부른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듯, 세계 최정상 아티스트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한다. 수용 인원 수천 명의 화려한 공연장, 세계 최고 수준의 음향과 조명 시스템, 그리고 매일 방문하는 수십만 명의 잠재 관객. 아티스트 입장에서도 라스베이거스는 매력적인 무대다.

태양의 서커스 — 라스베이거스가 만든 예술

라스베이거스 엔터테인먼트의 상징 중 하나가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시작한 이 서커스 단은 라스베이거스와 함께 성장했다. 현재 라스베이거스에서만 여러 편의 태양의 서커스 공연이 동시에 진행된다. 각각 다른 호텔 전용 공연장에서.

태양의 서커스는 기존 서커스의 개념을 완전히 바꿨다. 동물이 없다. 대신 인간의 몸이 예술이 된다. 공중 곡예, 수중 퍼포먼스, 가면극, 현대 무용이 결합된 이 공연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예술 경험이다. 처음 보시는 분들은 ‘서커스가 이런 것이었어?’라고 하신다. 라스베이거스가 서커스를 예술로 격상시켰다.

스포츠 이벤트의 메카

최근 라스베이거스는 스포츠 이벤트의 새로운 메카가 되고 있다. 2020년 NFL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Las Vegas Raiders)가 도시 연고 팀으로 이전했다. 2023년에는 NHL 라스베이거스 골든 나이츠(Vegas Golden Knights)가 스탠리컵을 차지했다. 2023년 F1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가 개최되었다. 스트립을 가로지르는 서킷 위로 F1 머신들이 달렸다. 2028년에는 MLB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Athletics) 팀도 라스베이거스로 홈구장을 이전할 예정이다.

스포츠와 도박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라스베이거스는 스포츠 도박의 메카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카지노에 스포츠 북(Sports Book)이 있어 세계 각국의 스포츠 경기에 베팅할 수 있다. 한국 분들이 놀라시는 것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한국에서는 불법인 스포츠 도박이 라스베이거스에서는 합법적으로 카지노 한 켠에서 버젓이 이루어진다.

5. 스트립 뒤편 — 노동자들의 라스베이거스

더 스트립의 화려한 불빛 뒤에, 그 불빛을 유지하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객실을 청소하는 룸 클리너, 카지노 딜러,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경비원, 요리사, 공연 무대 스태프. 그들 없이는 라스베이거스가 하루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더 스트립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라스베이거스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이다. 특히 멕시코와 중미에서 온 이민자들이 호텔 청소, 식당, 건설 분야에 많이 종사한다. 팁에 크게 의존하는 서비스업의 특성상 수입이 불안정하고, 심야 근무와 주말 근무가 많다. 24시간 운영되는 카지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은 쉽지 않다.

컬리너리 유니온 — 노동자들이 지켜온 권리

라스베이거스에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서비스업 노동조합 중 하나가 있다. 컬리너리 유니온(Culinary Union, UNITE HERE Local 226)이다. 약 6만 명의 호텔·카지노 노동자들이 가입된 이 노조는 수십 년의 투쟁을 통해 의료보험, 연금, 상당한 수준의 임금을 쟁취했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노동자들이 미국의 다른 서비스업 종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은 이 노조 덕분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손님들에게 드릴 때 이렇게 말씀드린다. ‘지금 이 호텔에서 편안하게 쉬실 수 있는 것은, 수십 년간 싸워온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서비스의 이면에 노동의 역사가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팁을 드리는 것과 모르고 드리는 것은 다르다.

다운타운 라스베이거스 — 스트립의 그늘

더 스트립에서 북쪽으로 약 3킬로미터, 프리몬트 스트리트(Fremont Street) 주변이 다운타운 라스베이거스다. 이곳은 라스베이거스의 원래 중심지였다. 1950~60년대 영화에서 자주 나오던 빈티지한 카지노들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스트립에 비해 훨씬 낡고 쇠퇴한 느낌이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는 이 지역을 살리기 위해 1994년에 만들어진 야외 공간이다. 블록 길이의 아치형 구조물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밤마다 음악과 함께 화려한 빛 쇼가 펼쳐진다. 스트립보다 소박하지만, 여기에는 스트립에 없는 것이 있다. 진짜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의 일상이다.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오는 곳이다.

6. 후버 댐 — 사막을 길들인 인간의 의지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콜로라도강을 막아 세운 후버 댐(Hoover Dam)이 있다.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해 1936년에 완공된 이 댐은 당시 세계 최대의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높이 221미터, 두께 201미터.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장엄한 인공 구조물 중 하나다.

후버 댐은 라스베이거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기반 시설이다. 이 댐이 만들어낸 미드 호수가 라스베이거스에 물을 공급하고, 댐의 수력 발전이 전기를 공급한다. 사막 위의 화려한 도시가 가능한 것은 이 댐 덕분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빛나는 네온사인 뒤에 후버 댐이 있다.

댐 건설 중 112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대공황 시기,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혹독한 환경에서 일했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협곡 안에서, 안전장비도 제대로 없이. 그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라스베이거스가 서 있다. 후버 댐을 방문하면 그 거대한 콘크리트 앞에서 그 시절 노동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미드 호수의 위기 — 사막의 경고

후버 댐이 만든 미드 호수는 미국에서 가장 큰 인공 저수지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2022년 미드 호수의 수위는 1936년 댐 완공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상 수위의 30퍼센트 수준. 수위가 낮아지면서 수십 년 전 물에 잠긴 마을과 기념물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시신도 발견되었다.

이 위기가 라스베이거스에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무한한 자원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이 도시가, 실은 취약한 자연 환경 위에 있다는 것. 사막 위에 골프 코스를 만들고, 분수를 뿜고, 수영장을 채우는 삶이 언제까지 가능한가. 기후변화가 라스베이거스에 가장 직접적인 경고를 보내고 있다.

7. 라스베이거스의 음식 — 뷔페의 왕국

라스베이거스 하면 뷔페다. 미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뷔페들이 라스베이거스에 있다. 왜 라스베이거스에 뷔페가 발달했을까. 처음에는 카지노들이 도박꾼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저렴한 뷔페를 제공한 것이 시작이었다. 밥 먹으러 카지노를 나갈 필요가 없도록. 그 전략이 라스베이거스 뷔페 문화를 만들었다.

지금의 라스베이거스 뷔페는 그 전략적 기원을 훨씬 넘어섰다. 벨라지오의 더 뷔페(The Buffet), 윈 호텔의 더 뷔페 앳 윈(The Buffet at Wynn) 같은 곳들은 미국 최고 수준의 요리들을 무제한으로 제공한다. 랍스터, 킹크랩, 프라임 립, 스시, 디저트. 한국 분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만족하시는 것 중 하나가 이 뷔페다.

스테이크하우스와 셀럽 셰프들

뷔페 외에도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최고 수준의 파인 다이닝을 자랑한다. 고든 램지(Gordon Ramsay), 울프강 퍽(Wolfgang Puck), 조엘 로부숑(Joël Robuchon) 같은 세계적인 셰프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 셰프들에게 라스베이거스는 매력적인 시장이다. 매일 수십만 명의 방문객들이 오고, 그중 상당수가 특별한 저녁 식사를 원한다.

한국 분들에게 내가 특히 추천하는 것은 라스베이거스의 한국 식당들이다. 도시 규모에 비해 한국 식당이 잘 갖춰져 있다. 한국 타운이 스트립 근처에는 없지만, 차로 10~15분 거리의 주거 지역에 한국 마트와 식당들이 있다. 스트립의 화려한 식당들에 지쳤을 때, 한국 식당에서 김치찌개 한 그릇은 진정한 위로가 된다.

8. 한국인의 눈으로 본 라스베이거스

도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많이 하시는 질문이 있다. ‘도박을 해봐야 할까요?’ 나는 이렇게 답한다. ‘경험으로 조금은 해보셔도 됩니다. 하지만 잃어도 괜찮은 금액만 하세요. 그리고 따려는 기대는 처음부터 접으세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의 하우스 에지(House Edge), 즉 카지노의 수학적 이점은 게임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플레이어에게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슬롯머신은 보통 5~10퍼센트의 하우스 에지를 갖는다. 100달러를 넣으면 장기적으로 90~95달러만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블랙잭은 규칙을 완벽히 따르면 하우스 에지가 0.5퍼센트까지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한 전략 없이 플레이하므로 하우스 에지는 높아진다. 도박으로 돈을 따는 것이 가능한가? 단기적으로는 가능하다. 그것이 도박의 매력이다. 장기적으로는 항상 카지노가 이긴다. 그것이 카지노 비즈니스가 수십 년째 번성하는 이유다.

라스베이거스가 가르쳐주는 것

라스베이거스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이 도시를 ‘솔직한 거울’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품화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도박, 쇼, 식탐, 사치. 이것들이 나쁜 것인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는 그 인간적인 것들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솔직함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함께 보는 것. 카지노의 심리적 설계, 노동자들의 삶, 사막과 물의 위기. 화려한 쇼를 즐기되, 그 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라스베이거스를 여행자로서 정직하게 경험하는 방법이다.

라스베이거스를 딸과 같이 방문한 손님이 카지노에서 200달러를 잃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00달러가 아깝긴 한데, 카지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경험한 값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아요. 다시는 안 하겠지만.’ 그 200달러어치의 경험이 앞으로의 삶에서 훨씬 큰 돈을 지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저자의 한 마디   라스베이거스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 도시다. 더 오래 있으면 그 화려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쳐간다. 첫날 밤 더 스트립을 걷고, 태양의 서커스 쇼를 보고, 카지노를 한 번 경험하고, 좋은 뷔페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밤의 라스베이거스 야경을 즐겨라. 다음날은 후버 댐을 보러 가거나 인근 레드 록 캐니언을 하이킹하라. 그것으로 라스베이거스 여행은 완성된다. 삼사일 있으면 카지노에 더 많은 돈을 쓰게 될 뿐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짧게, 강렬하게.

라스베이거스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3월~5월, 9월~11월 (봄·가을). 여름(6~8월)은 45도 이상 극심한 더위. 겨울(12~2월)은 시원하고 관광객 적어 호텔 저렴

더 스트립 주요 호텔

벨라지오(분수 쇼), 시저스 팰리스(고급), 베네치안(이탈리아풍), 뉴욕뉴욕(뉴욕 테마), MGM 그랜드(규모 최대), 윈(럭셔리)

무료 볼거리

벨라지오 분수 쇼(밤15분마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전구 쇼(밤), 카지노 내부 구경, 더 스트립 야경 산책

추천 공연

태양의 서커스 각 버전, 레지던시 공연(시즌 따라 다름), 블루맨 그룹(Blue Man Group), 매직 쇼

꼭 먹어야 할 것

호텔 뷔페(벨라지오·윈 추천), 인앤아웃 버거, 고든 램지 버거(링크 프로머네이드), 스트립 스테이크하우스

근교 당일치기

후버 댐 (동쪽 50km, 1시간), 레드 록 캐니언 (서쪽 30km, 하이킹), 불의 계곡 (북쪽 1.5시간)

주의사항

도박 예산은 처음부터 정하고 그것만 사용. 더 스트립 보행자 도로가 넓어 지도상 거리보다 시간이 많이 걸림

Chapter 12. 애리조나 — 그랜드캐년 · 피닉스 · 세도나

시간의 단면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아지는가

그랜드캐년(Grand Canyon) 앞에 처음 섰을 때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님들 앞에서 늘 말이 많은 나인데, 그 앞에서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수백 번 사진으로 보았던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언어가 사라졌다.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감정이 벅차오름에 살짝 눈물이 났다.

그랜드캐년은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 봐야 안다. 콜로라도강이 수백만 년에 걸쳐 깎아낸 이 협곡은 길이 446킬로미터, 평균 너비 16킬로미터, 깊이 1,600미터다. 숫자로는 실감이 안 된다. 실제로 서봐야 그 규모가 무엇인지, 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지를 몸으로 안다. 수백만 년의 지구 역사가 한눈에 펼쳐지는 이 장소 앞에서, 어떤 걱정도 어떤 고민도 갑자기 사소하게 느껴진다.

애리조나(Arizona)는 그랜드캐년만 있는 주가 아니다. 세계적인 관광지 그랜드캐년, 그 아래 사막 도시 피닉스(Phoenix), 그리고 붉은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풍경의 세도나(Sedona). 이 세 곳이 서로 다른 얼굴로 애리조나를 구성한다. 그 세 곳을 함께 여행하면, 미국 서부의 자연이 얼마나 다양하고 압도적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1. 애리조나라는 주 — 사막과 협곡의 땅

애리조나는 미국 남서부에 위치한 주다. 북쪽으로는 유타와 콜로라도, 동쪽으로는 뉴멕시코,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1.4배. 그 넓은 땅의 상당 부분이 사막이다.

애리조나의 기후는 극단적이다. 해발이 낮은 남부 사막 지대는 여름에 섭씨 45도를 넘기도 한다. 반면 그랜드캐년이 있는 북부 고원 지대는 해발 2,100미터로, 여름에도 선선하고 겨울에는 눈이 쌓인다. 같은 주 안에서 열대 사막과 고산 기후가 공존한다. 이 극단적인 기후 차이가 애리조나의 다양한 생태계와 풍경을 만들어냈다.

애리조나는 미국에서 원주민 문화가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주 중 하나다. 나바호(Navajo), 호피(Hopi), 아파치(Apache) 등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지금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랜드캐년 주변 땅의 상당 부분이 나바호 네이션(Navajo Nation), 즉 나바호 자치 구역이다. 나바호 네이션은 애리조나, 유타, 뉴멕시코 세 개 주에 걸쳐 있는 미국 최대의 원주민 자치 구역이다. 면적이 서울의 약 300배에 달한다.

애리조나의 역사 — 스페인, 멕시코, 그리고 미국

애리조나는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멕시코로부터 미국에 넘어왔다. 그 이전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더 이전에는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이 역사의 층위가 지금도 애리조나 문화 곳곳에 남아 있다. 스페인어 지명들, 멕시코 음식 문화, 원주민 예술과 언어. 애리조나는 미국이지만, 동시에 그 이전 역사들도 살아있는 땅이다.

애리조나 남부, 멕시코 국경 지역은 미국 이민 문제의 최전선이다. 사막을 건너 미국으로 들어오려는 이민자들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 국경수비대와 이민자들의 쫓고 쫓기는 긴장이 매일 이 사막에서 벌어진다. 그 긴장이 애리조나 정치의 색깔을 오랫동안 규정해왔다. 이민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정치인들이 애리조나에서 강한 지지를 받는 이유다.

2. 그랜드캐년 — 시간의 단면

그랜드캐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하다. 말을 잃는다. 어떤 분들은 그냥 한참 서 계신다. 어떤 분들은 눈물을 흘리신다. 어떤 분들은 웃으신다. 그 다양한 반응들이 모두 같은 감정에서 나온다. 압도됨.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완전한 압도감.

그랜드캐년의 지층은 지구 역사의 책이다. 가장 깊은 곳의 암석은 약 17억 5천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것이 약 30만 년 전임을 생각하면, 그 17억 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다. 협곡 벽에 새겨진 지층 하나하나가 수천만 년을 상징한다. 그 앞에 서면 인간의 삶 전체가, 아니 인류의 역사 전체가 한없이 짧게 느껴진다.

사우스 림 vs 노스 림

그랜드캐년에는 두 개의 주요 전망 지역이 있다. 사우스 림(South Rim)과 노스 림(North Rim)이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사우스 림으로 간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차로 약 4.5시간, 피닉스에서 약 3.5시간 거리다. 연중 개방되며, 각종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노스 림은 사우스 림과 직선거리로는 16킬로미터이지만, 차로 가려면 협곡을 빙 돌아 약 5시간이 걸린다. 방문객 수가 사우스 림의 10분의 1도 안 되고, 5월부터 10월까지만 개방된다. 그 대신 더 한적하고, 뷰가 다르고, 덜 상업화된 그랜드캐년을 경험할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분들에게 노스 림은 숨겨진 보석이다.

사우스 림의 뷰포인트들

사우스 림을 따라 여러 개의 전망 포인트(Viewpoint)가 있다. 매더 포인트 (Mather Point)는 방문자 센터 바로 옆에 있어 처음 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서게 되는 곳이다. 데저트 뷰(Desert View)는 사우스 림 동쪽 끝에 있어 협곡의 다른 부분을 볼 수 있다. 호피 포인트(Hopi Point)는 일몰 때 가장 아름다운 뷰를 보여주는 곳으로, 일몰 시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

나는 손님들에게 가능하면 이른 아침에 오시라고 권한다. 해가 뜨면서 협곡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극적이기 때문이다. 협곡 벽의 붉은 암석이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변하는 그 순간, 많은 분들이 사진 찍는 것을 멈추고 그냥 바라보신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감동이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 안다.

서울에서 온 70대 내외분이 그랜드캐년 앞에 처음 서셨을 때, 남편분이 아내분의 손을 꼭 잡으셨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아내분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 이런 거 보러 살았구나.’ 그 한 마디가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랜드캐년은 삶의 이유를 새로 발견하게 만드는 곳이다.

3. 그랜드캐년 하이킹 — 아래로 내려가는 것의 의미

그랜드캐년을 림(rim, 가장자리)에서만 보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그랜드캐년은 아래로 내려가야 보인다. 협곡 안으로 들어가는 하이킹 트레일들이 있다.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Bright Angel Trail)과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South Kaibab Trail)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경고가 있다. 그랜드캐년 하이킹은 내려갈 때는 쉽고 올라올 때 힘들다. 그리고 하이킹을 시작할 때는 체력이 넘치고, 올라올 때는 이미 지쳐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너무 깊이 내려갔다가 탈진해서 구조를 요청한다. 국립공원 측에서는 낮 동안에는 하이킹을 말리고,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할 것을 권장한다.

처음 오시는 분들, 특히 연세 드신 분들에게 나는 림 트레일(Rim Trail)을 권한다. 협곡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이 평탄한 트레일은 약 13킬로미터로, 걷기 편하면서도 여러 각도에서 협곡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협곡 안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그 가장자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다.

경비행기 투어

그랜드캐년을 가장 극적으로 경험하는 방법 중 하나는 경비행기 투어다. 사우스 림이나 라스베가스에서 출발하는 경비행기 투어들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랜드캐년은 또 다른 압도감이 있다. 비용이 좀 있긴 하지만, 한 번의 경험으로는 가장 극적인 뷰를 제공한다.

4. 원주민의 땅 — 그랜드캐년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

그랜드캐년이 국립공원이 된 것은 1919년이다. 그런데 그 이전부터 이 땅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바수파이(Havasupai) 부족은 4,000년 이상 그랜드캐년 안에서 살아온 부족이다. 1882년 미국 정부는 그들을 협곡 안에서 쫓아내고, 아주 작은 구역만 남겨주었다. 1919년 국립공원이 되면서 그들은 공원 안에서 농사를 지을 권리마저 잃었다.

이 역사를 알고 그랜드캐년을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매년 찾는 이 아름다운 공원이, 원주민들에게는 빼앗긴 땅이다. 물론 1975년 의회가 하바수파이 부족에게 더 많은 땅을 돌려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돌아온 땅은 원래 땅의 일부일 뿐이다. 그 역사의 무게가 그랜드캐년의 아름다움 아래에 깔려 있다.

그랜드캐년 안에 하바수파이 마을인 수파이(Supai)가 있다. 미국 본토에서 도로가 닿지 않는 유일한 마을이다. 헬리콥터나 말을 타고, 또는 걸어서 약 13킬로미터를 들어가야 한다. 마을 근처에 하바수 폭포(Havasu Falls)가 있다. 에메랄드빛 물이 붉은 협곡 벽을 타고 떨어지는 이 폭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로 꼽힌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이는 그 파란 폭포가 바로 이곳이다.

5. 세도나 — 붉은 바위가 품은 신비

그랜드캐년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도로가 숲을 지나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을 내려오면 갑자기 풍경이 바뀐다. 붉은 사암 암석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세도나(Sedona)다. 처음 이 풍경을 보면 눈을 의심하게 된다. 이런 색깔이, 이런 형태의 암석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세도나의 붉은 바위들은 2억 7천만 년 전에 만들어진 사암이다. 산화철 성분이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그랜드캐년이 수백만 년의 시간을 수직으로 보여준다면, 세도나는 그 시간을 수평으로 펼쳐 보여준다. 붉은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실루엣들 —벨 락(Bell Rock), 캐드럴 락(Cathedral Rock), 커피팟 록(Coffeepot Rock) — 이 세도나 특유의 풍경을 만든다.

세도나의 볼텍스 — 신비와 관광 사이

세도나는 뉴에이지(New Age) 영성의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볼텍스 (Vortex)’라는 개념이 세도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볼텍스는 지구 에너지가 강하게 집중되는 지점으로, 세도나에 세 개의 주요 볼텍스 포인트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벨 락(Bell Rock),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 보이튼 캐니언 (Boynton Canyon)이 그 곳이다.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 볼텍스 포인트들을 찾아온다. 명상을 하고, 에너지를 받고, 삶의 방향을 찾으려 한다. 세도나에는 크리스털 가게, 점성술사, 명상 가이드, 영적 치유사들이 즐비하다. 이것이 진짜인가 관광 상품인가에 대한 논쟁은 있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린다. ‘볼텍스의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바위들 앞에 서면 뭔가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지구 에너지인지,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감동인지는 각자가 결정하면 됩니다.’

세도나 하이킹

세도나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하이킹이다. 도시 주변으로 200킬로미터 이상의 트레일이 이어져 있다. 데블스 브리지(Devil’s Bridge)는 자연이 만든 거대한 사암 아치 위를 걷는 트레일로, 세도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왕복 약 5킬로미터, 2~3시간 소요. 아치 위에서 바라보는 세도나의 붉은 바위들과 오크 크릭 계곡이 압도적이다.

캐드럴 록(Cathedral Rock) 트레일은 짧지만 가파르다. 왕복 약 1.5 킬로미터인데, 바위 표면을 기어오르는 구간이 있어 체력이 필요하다. 정상에서 보이는 세도나 전경은 트레일의 힘든 구간을 충분히 보상한다. 특히 일몰 무렵 세도나의 붉은 바위들이 더욱 붉어지는 그 순간, 캐드럴 록 정상에 있다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보게 된다.

6. 피닉스 — 사막 위의 현대 도시

애리조나 주도 피닉스(Phoenix)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다. 인구 약 160만 명, 광역 피닉스는 490만 명으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는 사막 위에 있다. 연평균 강수량이 200밀리미터도 안 되는 사막에, 거의 500만 명이 살고 있다.

피닉스의 여름은 극단적이다. 6월부터 9월까지 낮 기온이 40~45도를 넘는다. 한낮에 야외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매년 수십만 명이 피닉스로 이주한다. 왜? 겨울 때문이다. 11월부터 4월까지 피닉스의 날씨는 15~25도로 완벽하다. 미국 북부와 중부의 혹독한 겨울을 피해 따뜻한 피닉스로 이주하는 은퇴자들을 ‘스노버드(Snowbird)’라고 부른다.

피닉스와 한인 커뮤니티

피닉스의 한인 커뮤니티는 크지 않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주로 피닉스 북동쪽 스코츠데일(Scottsdale)과 챈들러(Chandler), 메사(Mesa) 지역에 한인들이 분포해 있다. 인텔, TSMC(대만), 삼성 등 반도체 기업들이 피닉스 지역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한국인 기술자들이 유입되고 있다. 특히 최근 TSMC의 피닉스 공장 건설이 가속화되면서 한국계 관련 기업과 인력 유입도 늘어나는 추세다.

피닉스는 빠르게 한인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 중 하나다. 한국 마트와 식당도 늘어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비싼 집값을 피해 피닉스로 이주하는 한인 가정들도 있다. LA에서 피닉스까지 차로 약 6시간, 비행기로 1시간 20분이라 LA 한인 커뮤니티와의 연결도 유지할 수 있다.

스코츠데일 — 사막의 럭셔리

피닉스 동북쪽에 접한 스코츠데일(Scottsdale)은 애리조나 최고의 리조트 지역이다. 세계적인 골프 코스들, 럭셔리 스파 리조트, 고급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다. 겨울에는 전 세계의 부유층이 이 도시로 모여든다. 선선한 날씨, 아름다운 사막 풍경, 최고급 서비스. ‘사막의 럭셔리’가 스코츠데일의 정체성이다.

올드 타운(Old Town)은 낮에는 갤러리와 부티크가 가득한 예술 지구이고, 밤에는 바와 레스토랑이 북적이는 나이트라이프 중심지가 된다. 한국 분들에게 라스베이거스와 그랜드캐년 여행 중 하루 쉬는 곳으로 스코츠데일을 권하기도 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답고, 붐비지 않지만 볼 것이 있는 곳이다.

7. 사구아로 선인장과 사막의 생태계

애리조나 사막을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놀라는 것이 있다. 사막이 텅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구아로(Saguaro) 선인장이 사람 키의 열 배 높이로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사막은 황량한 곳이 아니라 극한의 환경에 적응한 생명들로 가득한 곳이다.

사구아로 선인장은 애리조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키가 최대 12미터까지 자라고, 무게는 수천 킬로그램에 달한다. 가장 오래된 사구아로는 150년 이상을 산다. 이 선인장은 매우 느리게 자란다. 처음 75년 동안은 높이 4미터도 안 된다. 특유의 팔처럼 뻗은 가지들이 생기려면 최소 75년이 걸린다. 그 가지가 있는 사구아로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나이를 생각한다. 지금 내가 보는 이 선인장은 내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기 서 있었다.

사구아로 국립공원과 투산

피닉스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투산(Tucson) 근처에 사구아로 국립공원(Saguaro National Park)이 있다. 사구아로 선인장이 가장 밀집한 이 공원에서 선인장 숲 사이를 걷는 경험은 독특하다. 특히 해 질 무렵, 노을 빛을 받은 사구아로들의 실루엣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은 서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한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 애리조나 사막에 있다.

투산은 피닉스보다 작고 조용하지만, 멕시코 문화의 영향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도시다. 멕시코 국경에서 불과 100킬로미터 거리다. 투산 스타일의 멕시코 음식, 특히 치미창가(Chimichanga)는 투산에서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큰 밀가루 토르티야에 속을 채우고 기름에 튀긴 이 음식은 투산 방문 시 꼭 먹어봐야 할 것이다.

8. 한국인의 눈으로 본 애리조나

그랜드캐년에서 생각하는 것들

나는 수십 번 그랜드캐년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의 감동은 매번 조금씩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 여름에는 폭풍이 협곡 위를 지나갈 때의 장엄함, 겨울에는 눈이 붉은 협곡 위에 내려앉은 고요함,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드는 새벽의 황홀함.

그랜드캐년 앞에서 내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수백만 년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비하면 우리의 걱정, 우리의 고민,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짧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그 짧은 시간 안에 이것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말을 들으시고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있다. 자연이 가르쳐주는 겸손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의 소중함.

사막에서 배우는 회복력

사막은 황량해 보이지만 생명력이 강한 곳이다. 비가 오지 않는 환경에서도, 극한의 더위에서도, 사구아로 선인장은 150년을 산다. 사막의 식물들은 물을 아끼고, 뿌리를 깊이 내리고, 혹독한 환경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켜 살아남는다.

이민자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사막에서 사는 것과 닮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 처음에는 힘들고 외롭지만, 조금씩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간다. 사구아로 선인장처럼 느리게 자라지만, 한번 자리 잡으면 150년을 버틴다. 그 이민자의 회복력을 사막에서 생각하게 된다.

세도나를 처음 방문하신 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너지 같은 건 모르겠는데, 이 바위들 앞에 있으니까 마음이 조용해지더라고요.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엇이 그 고요함을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요함 자체가 선물이다.

저자의 한 마디   애리조나는 서두르면 안 되는 곳이다. 그랜드캐년을 두 시간 만에 보고 가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을 뛰어다니며 사진만 찍고 나오는 것과 같다. 적어도 반나절, 가능하면 하루를 잡아라. 이른 아침에 도착해 일출을 보고, 림 트레일을 천천히 걷고, 여러 뷰포인트에서 오래 서 있어라. 협곡 안으로 조금이라도 내려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세도나도 마찬가지다. 드라이브만 하지 말고 트레일을 걸어라. 붉은 바위 사이를 걷는 것과 차창 너머로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애리조나는 자연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곳이다. 그 말을 들으려면 멈춰야 한다.

애리조나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그랜드캐니언: 9~11월, 4~6월. 세도나: 3~5월, 10~11월. 피닉스: 11~4월 (여름은 극심한 더위)

그랜드캐니언 입장

차량 35달러 (7일간 유효). 국립공원 패스(America the Beautiful Pass) 있으면 무료. 성수기 주차 매우 혼잡 — 셔틀버스 이용 권장

주요 뷰포인트

사우스 림: 매더 포인트(첫 방문), 호피 포인트(일몰), 데저트 뷰(전망 탑 포함). 세도나: 에어포트 메사(파노라마 뷰), 캐드럴 록(일몰), 데블스 브리지(하이킹 필요)

그랜드캐니언 하이킹 주의

1.6km 이상 내려가려면 물 최소 2리터, 간식, 모자, 선크림 필수.

여름 낮 시간 하이킹 금지. 초보자는 림 트레일(평탄) 권장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니언

차량 4.5시간 (US-93 → AZ-40 → AZ-64). 당일치기 가능하나 빡빡함 — 1박 권장. 사우스 림 내 롯지 예약 수개월 전 필수

꼭 먹어야 할 것

나바호 타코(Navajo Taco, 원주민 전통 빵 프라이 브레드 위 토핑), 그린 칠레 스튜, 투산 치미창가, 소노란 핫도그

피닉스 한인 커뮤니티

스코츠데일·챈들러 지역에 한국 마트·식당 밀집. 최근 반도체 기업 유입으로 한인 인구 증가 중

섹션 3 — 미국 남부 지역

상처가 만든 문화, 문화가 만든 영혼

Chapter 13. 루이지애나 — 뉴올리언스

고통에서 태어난 음악, 죽음을 축제로 만든 도시

뉴올리언스(New Orleans)는 미국에서 가장 미국답지 않은 도시다. 그런데 동시에 미국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온 도시이기도 하다. 이 역설이 뉴올리언스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아프리카 노예들이 미국에 첫발을 디딘 땅이며, 카리브해 문화와 미국 남부 문화가 뒤섞인 이 도시는 미국의 어떤 도시와도 다르다.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있다. 공기가 다르다. 미시시피강 하류, 바다와 강이 만나는 이 지점의 공기는 무겁고 습하고 뜨겁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음악이 들린다. 재즈, 블루스, 혹은 그 둘이 섞인 무언가. 낮이든 밤이든 뉴올리언스 어딘가에서는 언제나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음악이 이 도시의 심장 박동이다.

나는 뉴올리언스를 처음 방문한 분들이 이 도시를 떠날 때 보이는 표정을 잘 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경험했다는 표정이다. 맛있는 것을 먹었고, 아름다운 것을 보았고, 신나는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의 무게, 고통에서 피어난 문화의 아름다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독특한 정신. 그 모든 것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으로 남는다. 그것이 뉴올리언스가 방문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1. 뉴올리언스라는 도시 — 미시시피강이 만든 혼혈

뉴올리언스는 1718년 프랑스가 건설한 도시다. 미시시피강 하류, 멕시코만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처음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미 내륙과 대서양, 카리브해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 프랑스가 이 땅을 탐낸 이유였다.

1762년 프랑스가 스페인에 루이지애나를 양도하면서 뉴올리언스는 40년간 스페인 통치를 받았다. 그 시기에 지금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의 건물 대부분이 지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지구’라고 불리는 곳의 건물들이 실제로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이름과 실체가 어긋나는 방식으로 쌓인다.

1803년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았다. 역사상 가장 큰 영토 거래 중 하나인 루이지애나 구매(Louisiana Purchase)로, 미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었다. 뉴올리언스는 갑자기 미국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그 이전에 이미 프랑스, 스페인, 아프리카, 카리브해의 문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 정체성은 미국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크리올과 케이준 — 뉴올리언스의 두 문화

뉴올리언스를 이해하려면 두 개의 단어를 알아야 한다. 크리올(Creole)과 케이준(Cajun). 이 두 문화가 뉴올리언스의 음식, 음악, 언어, 생활 방식 전체를 규정한다.

크리올은 프랑스와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문화다. 유럽 이민자들, 아프리카 노예들, 카리브해에서 온 사람들이 섞이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혼혈 문화다. 크리올 음식은 섬세하고 복잡하다. 프랑스 요리 기법에 아프리카, 스페인, 카리브해 식재료와 향신료가 더해진 것이다. 크리올 언어는 프랑스어를 기반으로 아프리카 언어, 영어, 스페인어가 섞인 독특한 혼종 언어다.

케이준은 다르다. 18세기 캐나다 아카디아(Acadia) 지방에서 추방된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루이지애나 남부 습지 지역에 정착하면서 만든 문화다. 케이준 음식은 크리올보다 투박하고 강렬하다. 허브와 향신료를 듬뿍 쓰고, 소시지와 새우를 함께 끓이는 검보(Gumbo)나, 쌀과 고기를 함께 볶는 잠발라야(Jambalaya)가 케이준의 대표 음식이다.

2. 재즈의 탄생 — 고통이 만들어낸 세계 최고의 음악

재즈(Jazz)는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20세기 초, 콩고 스퀘어(Congo Square)라는 광장에서 흑인 노예들이 유일하게 허락된 휴일인 일요일마다 모여 아프리카의 리듬을 연주하고 춤을 췄다. 그 아프리카 음악이 유럽의 화성과 만나고, 블루스와 결합되면서 재즈가 탄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형식 중 하나가, 노예제라는 가장 잔인한 억압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 시드니 베체(Sidney Bechet). 이 이름들이 20세기 초 뉴올리언스 거리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음악이 뉴욕으로, 시카고로, 파리로, 전 세계로 퍼졌다. 지금 우리가 재즈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뿌리가 뉴올리언스의 흑인 커뮤니티에 있다.

재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뉴올리언스라는 도시의 특수성에 있다. 다른 미국 남부 도시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아프리카 음악을 허용한 콩고 스퀘어,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환경. 억압 속에서도 표현의 공간이 있었기에 재즈가 가능했다.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것이 재즈다.

프리저베이션 홀 — 재즈의 성지

프렌치 쿼터 한복판, 세인트 피터 스트리트(St. Peter Street)의 낡은 건물 안에 프리저베이션 홀(Preservation Hall)이 있다. 1961년에 문을 연 이 공연장은 전통 뉴올리언스 재즈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곳이다. 에어컨도 없고, 의자도 충분하지 않고, 음향 시스템도 소박하다. 그러나 매일 밤 이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재즈 연주는 세계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프리저베이션 홀 앞에는 항상 줄이 있다.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벽에 기댄 채 서서 듣거나, 낡은 나무 벤치에 앉아서 듣는다. 클라리넷, 트롬본, 트럼펫, 베이스, 드럼. 다섯 명의 연주자가 무대 아닌 무대에서 연주하면, 그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처음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음악이 공기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3. 프렌치 쿼터 — 시간이 멈춘 거리

뉴올리언스의 심장부는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다. 1718년 도시 건설 당시의 원래 구역으로, 지금도 당시의 거리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스페인 식민지 양식의 철제 발코니 장식, 안마당이 있는 저택들, 가스등을 닮은 거리 조명들. 미국에서 이렇게 오래된 건물들이 이렇게 많이 보존된 도시는 드물다.

프렌치 쿼터의 중심은 버번 스트리트(Bourbon Street)다. 낮부터 밤까지, 아니 밤새도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손에 술잔을 들고 거리를 걷는다. 뉴올리언스에서는 도로 위를 걷으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 합법이다. 컵에 담아 걸어 다니며 마시는 ‘고 컵(Go Cup)’ 문화가 버번 스트리트의 상징이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이 문화가 뉴올리언스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버번 스트리트의 빛과 그늘

버번 스트리트는 뉴올리언스 관광의 중심이지만, 현지인들은 잘 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넘치고, 음식 수준이 떨어지며, 바가지 요금이 흔하다. 뉴올리언스의 진짜 재즈와 진짜 음식을 원한다면 버번 스트리트를 벗어나야 한다. 프레스빌 (Frenchmen Street), 트레메(Treme), 가든 디스트릭트(Garden District)로 가야 현지인들의 뉴올리언스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버번 스트리트는 반드시 한 번은 경험하세요. 그 에너지 자체가 뉴올리언스의 한 면입니다. 하지만 거기서만 머물지 마세요. 조금만 걸어 나오면 전혀 다른 뉴올리언스가 있습니다.’ 관광지의 화려함과 그 뒤에 있는 진짜 도시. 그 두 곳을 모두 보는 것이 뉴올리언스를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이다.

프레스빌 스트리트 — 현지인들의 재즈

프렌치 쿼터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프레스빌 스트리트(Frenchmen Street)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현재를 보여주는 곳이다. 버번 스트리트가 관광객을 위한 재즈라면, 프레스빌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재즈다. 블루 나일(Blue Nile), 스포티드 캣(Spotted Cat) 같은 작은 바(Bar)들에서 라이브 재즈가 매일 밤 연주된다.

프레스빌에서는 음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다. 연주자들이 바 안을 돌아다니며 연주하고, 손님들이 일어나 춤을 춘다. 맥주 한 잔 들고 골목에 서서 세 개의 바에서 동시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된다. 그 자유로움이 프레스빌의 매력이다.

4. 검보와 크리올 음식 — 슬픔이 만든 위로의 맛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 음식 문화가 가장 독특하고 깊은 도시 중 하나다. 뉴욕의 음식이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가져온 음식들의 모음이라면, 뉴올리언스의 음식은 여러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실제로 융합한 결과다. 프랑스 요리 기법, 아프리카 식재료, 스페인 향신료, 카리브해 조리법, 그리고 미시시피강이 가져다주는 풍부한 해산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냄비 안에서 끓여진 것이 뉴올리언스 음식이다.

검보 — 뉴올리언스의 영혼

검보(Gumbo)는 뉴올리언스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검보’라는 이름 자체가 아프리카 반투어(Bantu)로 오크라(okra, 식재료)를 뜻하는 단어에서 왔다. 루(Roux)라는 밀가루와 버터를 오랫동안 볶아 만든 베이스에 각종 해산물, 소시지, 채소를 넣고 끓인 걸쭉한 스튜다. 매운 향신료가 더해져 깊고 복잡한 맛을 낸다.

검보를 한 입 먹으면 한국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거 부대찌개랑 비슷한데요?’ 완전히 틀린 비교는 아니다. 검보와 부대찌개 모두 여러 재료를 하나의 냄비에 넣고 끓이는 방식이고, 그 조합에서 깊은 맛이 나온다.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검보는 뉴올리언스 사람들의 혼혈 정체성 그 자체다.

검보는 집집마다, 식당마다 레시피가 다르다. 해산물만 넣기도 하고, 닭고기와 소시지만 넣기도 하고, 다 섞기도 한다. ‘정통’ 검보가 무엇인지를 두고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음식이 정체성이 될 때 그런 토론이 일어난다.

포 보이와 베녜 — 뉴올리언스의 일상 음식

포 보이(Po’boy)는 뉴올리언스 길거리 음식의 대명사다. 바삭한 프랑스 빵(French bread) 안에 새우 튀김, 굴 튀김, 소고기 등을 가득 채운 샌드위치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1920년대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던 샌드위치가 기원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가난한 사람들(Poor Boys)’을 위한 음식이라는 뜻에서 ‘포 보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베녜(Beignet)는 뉴올리언스의 아침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발효 도우를 기름에 튀겨 슈가 파우더를 듬뿍 뿌린 프랑스식 도넛이다. 카페 뒤 몽드(Cafe du Monde)는 1862년부터 베녜와 카페오레를 팔아온 뉴올리언스의 전설적인 카페다. 미시시피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이블에서 베녜를 먹으면 슈가 파우더가 옷에 날린다. 그 하얀 분가루를 털어내는 것이 뉴올리언스 아침 의식이다.

5. 재즈 퓨너럴 — 죽음을 축제로 만드는 방식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독특한 문화 중 하나가 재즈 퓨너럴(Jazz Funeral)이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장례식 행렬이 거리를 걸으면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느리고 슬픈 음악으로 시작하지만, 묘지를 지나면 갑자기 빠르고 신나는 음악으로 바뀐다.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구경하던 시민들이 행렬에 합류한다. 이것을 ‘세컨드 라인(Second Line)’이라고 부른다.

죽음을 슬픔으로만 보내지 않고 축제로 승화시키는 이 전통은 아프리카 문화에서 왔다. 많은 아프리카 문화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다. 그 이동을 축하하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다. 이 아프리카의 사생관이 뉴올리언스의 재즈와 결합하면서 재즈 퓨너럴이 탄생했다.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 이것이 뉴올리언스 정신의 핵심이다.

나는 손님들에게 재즈 퓨너럴을 직접 목격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미리 설명한다. 외부인이 합류해도 되는가? 된다. 구경만 해도 되는가? 된다. 다만 이것이 실제 장례식이고,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 슬픔과 축제가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을 존중하면서 함께하는 것. 그것이 이 문화를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이다.

6. 마르디 그라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파티

마르디 그라(Mardi Gras). 프랑스어로 ‘기름진 화요일(Fat Tuesday)’이라는 뜻이다. 가톨릭의 사순절(Lent) 시작 전날, 즉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전날의 축제다. 금식과 절제의 기간인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다.

뉴올리언스의 마르디 그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니발 중 하나다. 매년 2월 또는 3월, 약 2주간 도시 전체가 축제에 돌입한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행렬이 거리를 누비고, 구경꾼들에게 목걸이(Beads)와 작은 장식품들을 던진다. 거리 음악이 끊이지 않고, 밤새 파티가 이어진다.

마르디 그라의 색깔에도 의미가 있다. 보라는 정의, 금색은 권력, 녹색은 믿음을 상징한다. 이 세 가지 색이 마르디 그라의 공식 색이다. 이 기간에 뉴올리언스 전체가 보라, 금, 녹색으로 물든다. 2월의 뉴올리언스를 방문한다면 마르디 그라 시즌이 겹칠 수 있다. 엄청난 인파와 호텔 가격이 오르는 단점이 있지만, 그 에너지는 일생에 한 번 경험할 만한 것이다.

7. 허리케인 카트리나 — 도시가 무너진 날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다. 카테고리 3 등급의 이 허리케인이 직접적인 타격을 준 것도 컸지만, 진짜 재앙은 그 이후에 왔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방조제(Levee)가 무너지면서 도시의 80퍼센트가 물에 잠겼다. 약 1,800명이 사망했다. 수십만 명이 집을 잃었다.

카트리나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인재(人災)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경고되어 왔던 방조제의 취약함을 무시한 것, 사전 대피 명령이 너무 늦었던 것, 재난 대응이 너무 늦고 너무 부족했던 것.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였다는 것. 차가 없어서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대피 후 돌아올 자원이 없어 영영 뉴올리언스를 떠난 사람들. 카트리나는 미국 사회의 인종과 계층의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카트리나 이후 — 부활과 상처

카트리나 이후 20년. 뉴올리언스는 돌아왔다. 무너진 집들이 재건되었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으며, 관광객도 다시 몰려들었다. 그러나 완전한 회복은 아니다. 카트리나 이전에 약 48만 명이었던 뉴올리언스 인구는 지금 약 38만 명이다. 10만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특히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단 9번 구역(Lower 9th Ward)은 카트리나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다. 지금도 재건이 완료되지 않은 빈 땅들이 남아 있다. 배우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Make It Right 재단이 이 지역에 친환경 주택들을 지었지만, 그 프로젝트도 결함으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선의도 항상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카트리나 투어라는 것이 있다. 피해 지역을 버스를 타고 돌아보는 관광 상품이다. 나는 이 투어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는다.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 지역 커뮤니티가 운영하는 투어를 선택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8. 가든 디스트릭트와 묘지 투어 —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

가든 디스트릭트 — 남부의 귀족 문화

프렌치 쿼터에서 서쪽으로 스트리트카를 타고 약 20분. 가든 디스트릭트 (Garden District)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뉴올리언스가 펼쳐진다. 거대한 오크나무들이 거리를 덮고, 그 아래로 빅토리아 시대 양식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넓은 잔디밭, 화려한 기둥, 베란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여유. 이것이 19세기 미국 남부 상류층의 삶이었다.

이 아름다운 저택들이 얼마나 많은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면 그 아름다움이 복잡해진다. 플랜테이션(Plantation, 대농장)으로 부를 쌓은 남부 귀족들이 지은 이 집들. 작가 앤 라이스(Anne Rice)가 이 동네에 살면서 뱀파이어 소설을 썼다. 죽은 자들이 저택에 사는 이야기. 어쩌면 뉴올리언스라는 도시 자체가 그런 곳이다. 역사의 유령들이 아름다운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지상 묘지 — 죽음이 지상에 있는 이유

뉴올리언스의 묘지들은 다른 도시와 다르다. 땅 위에 있다.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무덤이 있다. 흰 대리석 구조물들이 마치 작은 도시처럼 줄지어 있다. ‘도시 안의 도시(Cities of the Dead)’라는 별명이 있다.

왜 지상 묘지인가. 뉴올리언스는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 많다. 땅을 파면 곧 물이 나온다. 지하에 묻으면 홍수 때 관이 떠내려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래서 지상에 구조물을 만들어 묻는 방식이 발전했다. 실용적인 이유로 시작된 것이 뉴올리언스만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

세인트 루이스 묘지 1번(St. Louis Cemetery No. 1)은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다. 1789년에 만들어진 이 묘지에는 뉴올리언스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신화적 인물로 알려진 부두 여왕 마리 라보(Marie Laveau)의 묘도 여기 있다. 지금도 그녀의 묘 앞에 꽃과 주술 도구들을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뉴올리언스

고통에서 만든 아름다움

뉴올리언스를 여행하면서 나는 반복적으로 같은 생각을 한다. 이 도시가 가진 모든 아름다운 것들 — 재즈, 음식, 건축, 축제 — 이 모두 고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노예제의 억압 속에서 재즈가 태어났다. 가난과 이민의 역사에서 크리올 음식이 만들어졌다. 죽음의 공포에서 재즈 퓨너럴이 생겨났다.

이것이 뉴올리언스가 세상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인간은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가장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고통이 깊을수록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지는 예술이 더 깊어진다. 재즈가 그 증거다.

뉴올리언스와 한국의 공명

한국 분들이 뉴올리언스에서 종종 느끼는 것이 있다. 이 도시가 낯선데 어딘가 익숙하다는 감각이다. 나는 그 익숙함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봤다. 한국도 고통의 역사에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온 민족이기 때문이 아닐까. 판소리, 민요, 아리랑. 한국의 전통 음악도 슬픔과 한(恨)이 깊이 배어 있다. 그 한이 소리가 되고, 그 소리가 예술이 된다.

재즈와 판소리. 완전히 다른 음악이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억압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 그 공명이 한국 분들이 뉴올리언스 음악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감정은 통한다.

뉴올리언스의 재즈 바에서 음악을 듣던 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사람들이 연주하는 거 들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부르시던 민요가 생각났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슬픔을 소리로 만드는 인간의 방식이 문화를 초월해서 통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한 마디   뉴올리언스는 최소 3박을 권한다. 하루는 프렌치 쿼터와 버번 스트리트, 하루는 프레스빌과 트레메 지역의 현지 재즈, 마지막 날은 가든 디스트릭트와 묘지 투어, 그리고 카페 뒤 몽드에서 베녜로 마무리.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이 도시는 느린 템포로 움직인다. 미시시피강처럼 천천히, 하지만 깊게.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뉴올리언스가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재즈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으로 나오는 것처럼, 뉴올리언스도 계획보다 즉흥이 더 잘 맞는 도시다.

뉴올리언스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10월~4월 (덥고 습한 여름 회피). 마르디 그라(2~3월)는 최고 성수기로 호텔 비쌈. 10~11월이 날씨·가격 균형 최적

주요 명소

프렌치 쿼터, 버번 스트리트, 프레스빌 스트리트(현지 재즈), 프리저베이션 홀, 카페 뒤 몽드, 잭슨 스퀘어, 가든 디스트릭트, 세인트 루이스 묘지

꼭 먹어야 할 것

검보 (Dooky Chase’s, Commander’s Palace), 베녜 + 카페오레 (카페 뒤 몽드), 새우 포 보이, 잠발라야, 굴 튀김

재즈 공연

프리저베이션 홀 (매일 밤, 사전 예약 권장), 프레스빌 스트리트 바들 (무료~소액 커버차지), 버번 스트리트 (무료 입장 많지만 수준 낮음)

추천 3일 코스

1일차: 카페 뒤 몽드 아침→잭슨 스퀘어→프렌치 쿼터 산책→프리저베이션 홀 저녁

 2일차: 가든 디스트릭트→묘지 투어→프레스빌 스트리트 밤 재즈

 3일차: 국립 남북전쟁 박물관→버번 스트리트→미시시피강 유람선

날씨 주의

여름(6~9월) 기온 35도 이상 + 고습도 = 불쾌지수 극심. 허리케인 시즌(6~11월) 겹침. 야외 활동 시 수분 보충 필수. 모기 기피제 권장

치안

프렌치 쿼터·가든 디스트릭트는 관광객 많고 비교적 안전. 경계 지역 벗어나면 밤에 혼자 다니는 것 주의. 귀중품은 호텔에 두고 다닐 것

Chapter 14. 테네시 — 내슈빌 & 멤피스

컨트리와 블루스, 두 개의 남부 — 음악이 역사가 된 도시들

테네시(Tennessee) 주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다. 내슈빌(Nashville)과 멤피스(Memphis). 두 도시는 약 34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서로 전혀 다른 음악을 품고 있다. 내슈빌은 컨트리 뮤직의 수도다. 멤피스는 블루스와 로큰롤의 고향이다. 그런데 이 두 음악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 미국 남부라는 땅,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온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에서.

나는 처음 테네시를 방문했을 때, 이 주가 미국 음악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왜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 그냥 컨트리 뮤직이 있는 곳, 엘비스 프레슬리가 있는 곳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슈빌과 멤피스를 직접 걸으면서, 음악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고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 두 도시의 음악을 이해하면, 미국 남부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미국 대중음악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 중 컨트리 뮤직이나 블루스에 관심 있는 분은 많지 않다. 나도 처음엔 그 음악들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 음악들이 만들어진 맥락을 알고 나서 들으면 전혀 다르게 들린다. 음악이 역사가 될 때, 역사가 음악이 될 때. 테네시가 그것을 보여준다.

1. 테네시라는 주 — 산과 강 사이의 남부

테네시 주는 미국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는 미시시피강이 경계를 이룬다. 주의 모양이 길고 좁아서 동서 길이가 약 800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이 때문에 테네시 내에서도 지역마다 지형과 문화가 다르다. 동부는 산악 지형으로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이 있고, 중부는 내슈빌이 있는 완만한 분지 지역이며, 서부는 미시시피강 변 저지대로 멤피스가 있다.

테네시는 미국에서 음악 산업이 가장 집중된 주다. 내슈빌은 컨트리 뮤직의 세계적인 메카이고, 멤피스는 블루스, 소울, 로큰롤의 발상지다. 여기에 녹스빌 (Knoxville)과 채터누가(Chattanooga) 같은 도시들도 각각 독특한 음악 유산을 갖고 있다. 테네시가 ‘음악 주(Music State)’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가 있다.

테네시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중요한 전쟁터였다. 북부와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이 주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테네시 주 자체가 분열되어 동부는 연방(북부)을 지지하고 서부와 중부는 남부 연합을 지지했다. 그 분열의 상처와, 그 이후 재건과 인종 갈등의 역사가 테네시의 음악 속에 깊이 배어 있다.

2. 내슈빌 — 컨트리 뮤직의 수도

내슈빌(Nashville). ‘뮤직 시티(Music City)’라는 별명이 있다. 컨트리 뮤직의 세계 수도다. 도시 어디서나 기타 소리가 들린다. 식당에서, 바에서, 심지어 공항에서도 라이브 음악이 연주된다. 세계 각지에서 음악가 지망생들이 이 도시로 몰려든다. 내슈빌에서 성공하면 컨트리 뮤직의 정상에 선 것이다.

내슈빌을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생각보다 세련됐네요.’ 맞다. 많은 분들이 컨트리 뮤직을 시골 음악 정도로 생각하고, 내슈빌도 촌스러운 도시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오신다. 실제 내슈빌은 최근 10년 사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세련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고층 빌딩들이 올라가고, 세계적인 레스토랑들이 들어서고, 기술 스타트업들이 모여든다. 컨트리 뮤직이라는 뿌리 위에서 도시 자체가 변모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스트리트 — 내슈빌의 심장

내슈빌의 중심은 다운타운의 브로드웨이 스트리트(Broadway Street)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같은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곳이다. 낡고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들, 오래된 혼키통크(Honky-Tonk) 바들이 줄지어 있다. 혼키통크는 라이브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는 바로, 내슈빌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술을 마시며 컨트리 음악을 듣고, 마음 내키면 일어나 춤을 춘다.

브로드웨이 스트리트에서 가장 유명한 혼키통크 중 하나가 투시즈 오차드 라운지 (Tootsies’ Orchid Lounge)다. 1960년에 문을 연 이 바는 수십 년간 수많은 컨트리 스타들이 무명 시절을 보낸 곳이다. 낮부터 밤까지 라이브 컨트리 음악이 연주되고, 입장료가 없다. 미국 전통 바의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브로드웨이 스트리트를 처음 걷는 한국 분들은 처음에는 낯설어하신다. 컨트리 음악이 귀에 익지 않고, 이 문화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주 한 잔 들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발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컨트리 음악의 힘이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몸이 먼저 반응한다.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

내슈빌에서 음악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꼭 가야 할 곳이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Country Music Hall of Fame and Museum)이다. 1967년에 설립된 이 박물관은 컨트리 뮤직의 역사를 통해 미국 남부의 역사를 보여준다. 행크 윌리엄스(Hank Williams), 조니 캐시(Johnny Cash), 패치 클라인(Patsy Cline), 돌리 파튼(Dolly Parton). 이 이름들이 컨트리 뮤직의 판테온이다.

박물관 안에는 전설적인 뮤지션들의 악기, 의상, 직접 쓴 악보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물건들 앞에서 음악이 단지 소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담긴 것임을 실감한다. 특히 조니 캐시의 전시는 인상적이다. 죄수들 앞에서 공연했던 그, 마약과 싸우면서도 음악을 놓지 않았던 그. 그 삶이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수십 년을 넘어 지금도 불린다.

3. 컨트리 뮤직이란 무엇인가

컨트리 뮤직을 모르고 내슈빌을 방문하면 절반을 잃는다. 그러나 컨트리 뮤직은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낯선 미국 음악이기도 하다. 팝, 재즈, 힙합, 록은 어느 정도 친숙한데 컨트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컨트리 뮤직을 이해하는 약간의 배경 지식이 내슈빌 여행을 훨씬 풍부하게 만든다.

컨트리 뮤직의 뿌리는 18~19세기 미국 남부와 애팔래치아 산악 지역에 정착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영국 이민자들의 민요에 있다. 그들이 가져온 포크 음악이 미국 남부의 풍토 속에서 변형되고, 아프리카 블루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컨트리 뮤직이 형성되었다. 기타, 피들(바이올린), 밴조, 페달 스틸 기타. 이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컨트리 뮤직의 색깔이다.

컨트리 뮤직의 가사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트럭 운전사의 외로움, 농장 생활의 고단함,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 신에 대한 믿음, 고향 마을에 대한 사랑.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그 소박함이 미국 남부와 중서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잡아왔다. 한국의 트로트와 비교하는 분들이 있다. 완벽한 비교는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는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그랜드 올 오프리 — 컨트리의 성지

내슈빌에서 컨트리 뮤직의 가장 성스러운 공간은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다. 1925년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이 쇼는 지금도 매주 공연이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라이브 음악 쇼다. 1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컨트리 뮤직의 가장 중요한 무대였다.

그랜드 올 오프리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컨트리 뮤지션에게 최고의 영예다.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것과 함께. 이 무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공연했고, 패치 클라인이 노래했고, 돌리 파튼이 스타가 되었다. 지금도 매주 화·금·토·일에 공연이 있다. 내슈빌에 온다면 한 번은 이 공연을 보시길 권한다. 컨트리 뮤직을 잘 모르더라도, 그 무대가 품고 있는 역사의 무게는 느낄 수 있다.

4. 멤피스 — 블루스와 소울의 땅

내슈빌에서 서쪽으로 약 340킬로미터. 미시시피강 변에 멤피스(Memphis)가 있다. 내슈빌이 세련되고 성장하는 도시라면, 멤피스는 거칠고 낡고 상처 입은 도시다. 인구는 약 60만 명이지만 빈곤율이 높고, 범죄율도 미국 대도시 중 상위권이다. 그런데 이 거칠고 상처 입은 도시에서 미국 음악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 탄생했다.

멤피스는 블루스의 도시다. 19세기 말 미시시피 델타(Mississippi Delta) 지역에서 흑인 농장 노동자들이 만든 블루스가 멤피스로 흘러들어왔다. 비일 스트리트(Beale Street)는 그 블루스가 살아숨쉬는 거리다. 그리고 멤피스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블루스를 흡수해 로큰롤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블루스가 없었다면 로큰롤이 없었고, 로큰롤이 없었다면 지금의 팝음악이 없었다. 멤피스는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비일 스트리트 — 블루스가 살아있는 거리

멤피스 다운타운의 비일 스트리트(Beale Street). 여러 블록에 걸쳐 블루스 바와 식당들이 늘어선 이 거리는 멤피스를 상징한다. 낮에는 조용하지만 밤이 되면 라이브 블루스 음악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내슈빌의 브로드웨이 스트리트가 화려하고 세련되다면, 비일 스트리트는 좀 더 거칠고 날것이다. 그 날것의 느낌이 오히려 블루스에 더 어울린다.

블루스는 재즈보다 더 단순하고 더 직접적인 음악이다. 12마디 구조의 반복, 구슬프고 꺾이는 기타 소리, 가슴에서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 처음 들으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단순한 구조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면 달리 들린다. 블루스는 인간이 고통을 음악으로 다루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다.

비일 스트리트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손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드린다. 이 음악을 만든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목화밭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밤에 음악을 만들었던 흑인 농장 노동자들. 그들에게 음악은 도피가 아니었다. 견디기 위한 수단이었고,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 맥락을 알고 들으면 블루스가 전혀 다르게 들린다.

5. 선 스튜디오와 엘비스 — 로큰롤이 태어난 방

멤피스에서 가장 성지 같은 장소는 선 스튜디오(Sun Studio)다. 706 유니언 애비뉴. 1950년 샘 필립스(Sam Phillips)가 문을 연 이 작은 스튜디오에서 미국 음악 역사가 바뀌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조니 캐시, 제리 리 루이스, 로이 오비슨. 이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모두 이 한 방에서 첫 번째 음반을 녹음했다.

1954년 7월 5일, 열아홉 살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 스튜디오에서 ‘That’s All Right’을 녹음했다. 그날이 로큰롤의 탄생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흑인 블루스의 리듬과 백인 컨트리의 멜로디가 처음으로 하나의 곡 안에서 만난 날. 백인 소년이 흑인 음악의 에너지를 담아 연주했을 때, 그 음악은 인종의 경계를 넘었다. 그것이 로큰롤이 가진 혁명적인 힘이었다.

그레이스랜드 — 엘비스의 왕국

선 스튜디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레이스랜드(Graceland)가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았고, 1977년 마흔두 살의 나이에 사망한 그의 저택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연간 약 60만 명이 방문하는 멤피스 최고의 관광지다.

그레이스랜드를 방문하면 엘비스가 얼마나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였는지를 실감한다. ‘정글 룸(Jungle Room)’이라는 방은 인공 폭포와 실제 식물, 하와이안 가구들로 가득하다. 식당은 황금색으로 도배되어 있고, 당구실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천으로 덮여 있다. 그 과도하고 화려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엘비스라는 인물의 복잡함을 보여준다.

엘비스의 무덤도 그레이스랜드 정원에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 옆에 묻혔다. 무덤 앞에 꽃을 놓는 팬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가 사망한 지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매일 이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음악이 사람을 이렇게 오래 붙잡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음악의 힘이다.

그레이스랜드에서 손님 한 분이 엘비스 무덤 앞에서 한참 계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어릴 때 엘비스 노래 정말 좋아했는데. 그 시절 생각이 나네요.’ 음악은 시간을 건너간다. 지금 이 무덤 앞에 서 있는 분의 청춘이 거기 있었다.

6. 마틴 루터 킹과 멤피스 — 역사가 멈춘 곳

멤피스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이 도시에서 암살당했다. 로레인 모텔(Lorraine Motel) 2층 발코니에서 저격당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그 로레인 모텔이 지금 국립 민권 박물관(National Civil Rights Museum)이 되었다. 모텔 건물 자체를 보존한 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그가 서 있던 발코니, 그가 머물던 306호 방이 그대로 있다. 박물관 안에서는 미국 민권 운동의 역사 전체를 다룬다. 1955년 로자 파크스(Rosa Parks)의 버스 거부 사건, 1963년 버밍엄의 교회 폭탄 테러, 1965년 셀마 행진. 그 모든 역사의 끝에 이 모텔 발코니가 있다.

나는 이 박물관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박물관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미국의 강함이라는 생각도 한다. 가장 부끄러운 역사를, 가장 아픈 순간을, 국립 박물관으로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는 것. 과거를 직시하고 기억하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멤피스 BBQ — 남부 바비큐의 정수

멤피스 음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멤피스 스타일 바비큐(BBQ)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바비큐 스타일 중 하나다. 돼지 갈비(Pork Ribs)에 드라이 럽(Dry Rub, 향신료를 비벼 넣은 것)을 발라 느린 불에 천천히 훈연하는 방식이다. 소스보다 고기 자체의 맛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멤피스 BBQ의 대표 식당 중 하나가 코리아타운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일 스트리트 근처 거리에 있다. 특히 ‘더티 그릴(The Dirty Grill)’, ‘찰리 버고스 렌더즈보스 (Charlie Vergos’ Rendezvous)’ 같은 오래된 식당들이 수십 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분들에게 멤피스 BBQ를 드려보면 반응이 두 가지다. 고기가 뼈에서 살살 떨어질 만큼 부드러워 놀라시는 분들과, 소스가 없어 아쉬워하시는 분들. 나는 양쪽 모두 이해한다. 멤피스 BBQ는 소스 없이 고기 자체를 즐기는 경험이다. 처음엔 낯설어도 두 번째 입에서 그 맛을 알게 된다.

7. 내슈빌과 멤피스 — 같은 남부, 다른 얼굴

같은 테네시 주에 있지만 내슈빌과 멤피스는 전혀 다른 도시다. 내슈빌은 성장하고 있고, 멤피스는 씨름하고 있다. 내슈빌은 젊은 인구가 유입되고 있고, 멤피스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내슈빌은 세련되어가고, 멤피스는 낡아가고 있다. 이 두 도시를 함께 방문하면 같은 남부라도 얼마나 다른 이야기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 차이의 원인 중 하나는 인종 구성이다. 내슈빌의 흑인 인구 비율은 약 28퍼센트인 반면, 멤피스는 약 64퍼센트다. 미국에서 흑인 인구가 다수인 대도시들이 대체로 더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것은 흑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수백 년간 이어온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다. 노예제로 시작해 짐 크로우 법으로 이어진 차별이, 지금도 도시의 경제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멤피스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비일 스트리트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는 뮤지션들, 국립 민권 박물관을 운영하는 사람들, 멤피스 BBQ를 대를 이어 만드는 식당 주인들. 이 도시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이 사람들 덕분이다. 멤피스는 상처 입었지만 살아있다. 그리고 그 살아있음이 이 도시의 음악 안에 있다.

8. 스모키 마운틴과 테네시의 자연

테네시 동부에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이 있다. 테네시와 노스캐롤라이나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공원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방문되는 국립공원이다. 연간 방문객이 1,200만 명이 넘어 그랜드캐년이나 옐로스톤보다도 많다.

‘스모키(Smoky)’라는 이름은 산 위를 항상 감싸고 있는 안개 때문에 붙여졌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일부인 이 산들은 둥글게 깎인 형태로 오랜 세월 바람과 비에 닳은 모습이다. 웅장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있다. 봄에는 야생화, 여름에는 짙은 녹음, 가을에는 미국 동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 겨울에는 눈 덮인 고요함. 사계절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진 산이다.

스모키 마운틴은 체로키(Cherokee)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19세기 초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을 명령했다. 수천 명의 체로키인이 이 여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노스캐롤라이나 쪽에 체로키 보호 구역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산의 역사에도 그 슬픔이 새겨져 있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테네시

음악이 역사인 곳

내슈빌과 멤피스를 함께 여행하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음악은 그냥 오락이 아니다. 음악은 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다. 컨트리 뮤직은 미국 남부 백인 노동자들의 삶을 담았고, 블루스는 흑인들의 고통과 저항을 담았다. 그 두 음악이 섞여 로큰롤이 되었고, 로큰롤에서 팝음악이 나왔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대부분의 대중음악이 이 테네시의 두 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분들에게 이 음악들이 처음에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그 음악들이 만들어진 맥락을 알고 나면 낯설지 않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음악으로 버텼다는 것, 그 음악이 시간을 넘어 살아남았다는 것. 이것은 보편적인 이야기다. 한국의 민요와 판소리가 그랬던 것처럼.

테네시에서 만난 남부 사람들

테네시 사람들은 미국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 중 하나다. ‘남부의 환대(Southern Hospitality)’는 실제로 존재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먼저 나선다. 뉴욕이나 LA 사람들의 쿨한 독립성과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다.

물론 이 친절함이 모든 것을 덮지는 않는다. 남부의 보수적인 가치관, 인종 간의 여전한 긴장, 경제적 격차. 이런 복잡한 것들이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도 있다. 그러나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났을 때의 따뜻함은 진심이다. 테네시에서 어려움에 처하면 뉴욕보다 도움받기 훨씬 쉽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내슈빌 혼키통크 바에서 컨트리 뮤직을 처음 들으신 손님이 맥주 한 잔을 다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음악, 처음엔 이상한 줄 알았는데 자꾸 듣다 보니 우리 고향 노래 같은 느낌이 나네. 왜 그럴까.’ 그것이 바로 컨트리 뮤직이다. 고향, 가족, 일상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것. 어디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저자의 한 마디   내슈빌과 멤피스를 함께 여행하려면 최소 3박 4일을 권한다. 내슈빌에서 2박, 멤피스에서 1박. 내슈빌에서 브로드웨이 혼키통크 경험과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 그리고 그랜드 올 오프리 공연을 보고. 멤피스에서 선 스튜디오, 국립 민권 박물관, 그레이스랜드, 그리고 비일 스트리트 블루스 바를 경험하라. 두 도시를 모두 본 사람만이 테네시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컨트리와 블루스, 백인의 남부와 흑인의 남부, 성장하는 도시와 씨름하는 도시. 그 두 얼굴이 하나의 주 안에 있다.

테네시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4월~6월, 9월~11월 (온화한 날씨). 여름은 덥고 습함. 스모키 마운틴 단풍은 10월 초~중순

내슈빌 주요 명소

브로드웨이 스트리트 혼키통크 바들,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박물관), 그랜드 올 오프리(공연), 파르테논 복제 건물(센테니얼 파크)

멤피스 주요 명소

비일 스트리트(블루스 바), 선 스튜디오(투어, 예약 권장), 그레이스랜드(엘비스 저택), 국립 민권 박물관(로레인 모텔)

꼭 먹어야 할 것

멤피스 드라이럽 BBQ 갈비, 내슈빌 핫 치킨(Nashville Hot Chicken, 매운 프라이드 치킨), 케이준식 메기 튀김, 비스킷과 그레이비 소스

내슈빌→멤피스 코스

내슈빌 2박(브로드웨이·공연) → 렌트카로 I-40 서쪽 3.5시간 → 멤피스 1~2박(비일 스트리트·그레이스랜드·민권 박물관)

그랜드 올 오프리 공연

화·금·토·일 저녁 공연. 티켓 opry.com에서 사전 구매. 좌석별 가격 다양(35~135달러). 컨트리 뮤직 입문자도 즐길 수 있음

스모키 마운틴

게이트웨이 도시는 개틀린버그(Gatlinburg). 내슈빌에서 차 3.5시간. 성수기 주차 혼잡 — 셔틀 이용 권장. 입장 무료

Chapter 15. 조지아 — 애틀랜타

마틴 루터 킹의 도시, 코카콜라의 도시, 변화하는 남부의 얼굴

애틀랜타(Atlanta)는 남부에서 가장 역설적인 도시다. 남북전쟁 때 불타고 다시 태어났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태어났으며, 코카콜라가 이 도시에서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CNN이 이 도시에서 시작했고, 1996년 올림픽이 열렸다. 보수적인 미국 남부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진보적인 흑인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남부의 과거와 미국의 미래가 같은 도시 안에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에게 애틀랜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한인 커뮤니티가 이 도시에 있다. LA, 뉴욕 다음이다. 조지아 주 전체로 보면 10만 명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인 타운이 도심 북쪽 둘루스(Duluth)와 스와니(Suwanee), 그리고 귀넷 카운티(Gwinnett County) 일대에 형성되어 있다. 이 규모의 한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이 애틀랜타를 한국인에게 특별한 도시로 만든다.

나는 애틀랜타를 방문할 때마다 이 도시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를 실감한다. 남부 도시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들의 남동부 거점이 되어가고 있다. 델타 항공, 코카콜라, CNN, UPS, 홈디포. 이 기업들의 본사가 모두 애틀랜타에 있다. 그 기업들이 가져온 부와 다양성이 애틀랜타를 새로운 남부의 모델로 만들고 있다.

1. 애틀랜타라는 도시 —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난 도시

애틀랜타는 1837년 철도 교차점에 세워진 도시다. 도시 역사가 200년도 안 되는 신생 도시지만, 그 짧은 역사 안에 미국의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압축되어 있다. 1864년 남북전쟁 중 윌리엄 셔먼(William Sherman) 장군이 이끄는 북부 연방군이 애틀랜타를 점령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그 불길 속에서 마가렛 미첼 (Margaret Mitchell)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불탄 자리에서 애틀랜타는 다시 일어섰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남부 재건 시기에 애틀랜타는 조지아 주도가 되었고, 20세기 들어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했다. 시 문장(紋章)에 불사조(Phoenix)가 그려져 있다. 불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 애틀랜타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지금 애틀랜타의 인구는 약 50만 명이지만, 광역 애틀랜타 메트로 지역은 약 600만 명이다.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큰 대도시권이다. 델타 항공의 허브 공항인 하츠필드-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Hartsfield-Jackson Atlanta Airport)은 연간 승객 수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중 하나다. 애틀랜타는 미국 남동부의 관문이다.

애틀랜타의 교통 — 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도시

애틀랜타는 LA만큼이나 자동차 의존도가 높은 도시다. 도시가 사방으로 퍼져 있고, 대중교통 인프라가 부족하다. MARTA(Metropolitan Atlanta Rapid Transit Authority)라는 지하철과 버스 시스템이 있지만, 도시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노선이 적다. 주요 관광 명소들은 비교적 다운타운과 미드타운에 몰려 있어 도보와 우버로 다닐 수 있지만, 한인 타운이 있는 귀넷 카운티는 차가 없으면 접근이 어렵다.

애틀랜타의 교통 체증은 미국에서 악명 높다. 도시가 지형상 평탄하고, 철도 대신 고속도로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I-285라는 외곽 순환고속도로(퍼리미터, Perimeter)와 여러 방사형 고속도로들이 도시를 연결하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이 모든 도로가 주차장이 된다. 애틀랜타 교민들이 가장 많이 하는 불만 중 하나가 교통 체증이다.

2. 마틴 루터 킹 — 이 땅에서 태어난 꿈

애틀랜타를 방문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킹 목사는 1929년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 세례를 받고 목사로 섰던 에벤에셀 침례교회(Ebenezer Baptist Church), 그리고 1968년 멤피스에서 암살당한 후 묻힌 무덤. 이 모든 것이 도심 북동쪽의 오번 애비뉴(Auburn Avenue) 주변에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국립 역사 공원(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된 이 지역을 걷는 것은, 미국 민권 운동의 역사를 발로 밟는 것이다. 그가 태어난 작은 빅토리아 양식의 집. 그 평범한 집에서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자라났다. 위대함은 언제나 평범한 곳에서 시작된다.

에벤에셀 침례교회 — 꿈이 선포된 곳

킹 목사의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이어받고, 킹 목사 자신도 공동 목사를 지낸 에벤에셀 침례교회(Ebenezer Baptist Church). 이 작은 교회는 미국 민권 운동의 정신적 본부였다. 킹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고, 전략을 세우고, 지지자들을 규합한 곳이다.

교회 내부는 소박하다. 긴 나무 의자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낮은 천장. 이 소박한 공간에서 나온 목소리가 미국을 바꿨다. 킹 목사의 목소리 녹음이 교회 안에서 흘러나올 때, 그 울림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교회 앞에서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린다. ‘이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킹 목사의 무덤과 영원의 불꽃

오번 애비뉴를 따라 걷다 보면 킹 센터(The King Center)가 나온다. 킹 목사와 부인 코레타 스콧 킹(Coretta Scott King)이 잠들어 있는 묘가 있다. 흰 대리석 석관이 반영 풀 위에 놓여 있고, 그 앞에서 영원의 불꽃(Eternal Flame)이 타오른다. 그 불꽃은 1968년 그가 암살당한 이후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고 한다.

묘 앞에 서면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이 새겨진 비석을 볼 수 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마침내 자유다, 마침내 자유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는 마침내 자유입니다).’ 이것은 그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1968년 멤피스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후 그가 실제로 얻은 자유이기도 하다. 죽음으로 얻은 자유. 그 역설이 이 무덤 위에 새겨져 있다.

킹 목사의 무덤 앞에서 한국전쟁 참전 세대의 손님 한 분이 오랫동안 서 계셨다. 한참 후에 말씀하셨다. ‘우리도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인데, 이 분도 자유를 위해 싸우셨구나. 다른 싸움이었지만 같은 싸움이기도 하네.’ 자유를 향한 싸움은 시대와 나라를 넘어 연결된다.

3. 코카콜라 — 세계를 정복한 단맛

1886년 애틀랜타의 약사 존 펨버턴(John Pemberton)이 두통약으로 코카콜라 시럽을 만들었다. 소다수에 섞어 팔기 시작했더니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금 코카콜라는 세계 200개 이상의 나라에서 팔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료 중 하나다. 매일 약 20억 잔이 소비된다. 그 모든 것이 애틀랜타의 작은 약국에서 시작되었다.

코카콜라 박물관(World of Coca-Cola)은 애틀랜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다. 코카콜라의 역사, 전 세계에서 팔리는 다양한 코카콜라 제품들, 그리고 가장 인기 있는 섹션인 ‘맛 보기 코너’에서 100가지가 넘는 나라별 코카콜라 음료를 시음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취향에 맞게 다르게 만들어진 콜라들을 비교하면서 마시는 것이 체험의 하이라이트다.

코카콜라의 두 얼굴

코카콜라는 미국의 가장 강력한 소프트 파워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젠하워 장군이 코카콜라 병을 들고 사진을 찍고, 냉전 시기 코카콜라가 공산주의 국가들에 미국의 자유를 상징하는 음료로 퍼져나갔다.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은 미국적인 것’이라는 이미지가 전 세계에 퍼졌다. 지금도 코카콜라가 진출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과 쿠바뿐이다.

그런데 코카콜라의 역사에도 불편한 면이 있다. 초기 코카콜라에는 실제로 코카인 성분이 들어 있었다. 1903년에 제거되었지만, 한때 ‘기분을 좋게 하는 두통약’으로 팔렸던 이 음료가 코카인을 함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코카콜라의 당분이 전 세계 비만과 당뇨병 증가에 기여했다는 비판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료가 동시에 건강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이것도 미국의 한 면이다.

4. CNN과 미디어 제국 — 애틀랜타가 세상을 보는 방법

1980년 테드 터너(Ted Turner)가 애틀랜타에서 CNN(Cable News Network)을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24시간 뉴스 채널이었다. 처음에 업계 사람들은 비웃었다. 24시간 내내 뉴스를 틀 일이 무엇이 있냐고. 그런데 1991년 걸프전을 CNN이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그 순간, 전 세계가 같은 화면을 보게 된 것이다.

CNN 본사가 있는 센터 시티(CNN Center)는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랜드마크다. CNN 스튜디오 투어를 통해 실제 뉴스 제작 현장을 볼 수 있다. 뉴스 앵커들이 방송을 준비하는 장면, 생방송 스튜디오, 날씨 예보 크린 스크린 앞에 서보는 체험. 미디어가 어떻게 세상을 보여주는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CNN이 애틀랜타에 있다는 사실이 이 도시에 준 것은 단순히 일자리만이 아니다. 세계를 향한 창구가 이 도시에 있다는 자부심이다. 세계 각지에서 기자들이 이 도시로 모이고, 세계 각지의 뉴스가 이 도시에서 편집되어 나간다. 조용한 남부 도시가 세계 미디어의 중심이 된 것이다.

5.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 남부가 세계에 인사한 날

1996년 여름, 애틀랜타는 올림픽을 개최했다. 미국 건국 22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미국 남부 도시에서 처음으로 열린 올림픽이었다. 196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의 선수가 참가했다. 한국에서도 금메달 7개를 포함해 총 27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런데 이 올림픽은 비극으로도 기억된다. 7월 27일 올림픽 공원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명이 사망하고 111명이 부상했다. 당시 경비원이었던 리처드 주얼(Richard Jewell)이 폭탄을 발견해 많은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더 큰 피해를 막았다. 하지만 FBI의 잘못된 수사로 그는 오히려 용의자로 몰렸다. 그의 이야기는 2019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올림픽 이후 애틀랜타는 변했다. 세계의 이목을 받은 이 도시는 국제화의 속도를 높였다. 센테니얼 올림픽 파크(Centennial Olympic Park)는 지금도 시민들의 휴식처로 남아 있다. 올림픽 성화대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분수에서 노는 아이들. 올림픽의 유산이 도시 한복판에 살아있다.

6. 애틀랜타의 흑인 문화 — 미국 흑인의 수도

애틀랜타는 비공식적으로 ‘미국 흑인의 수도(Black Mecca)’라 불린다. 이 도시의 흑인 인구 비율은 약 50퍼센트. 흑인 중산층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미국의 어느 도시보다 많이 모여 있다. 흑인 소유 기업들이 번성하고, 흑인 정치인들이 도시를 이끌며, 흑인 문화가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현상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에서 인종 차별을 피해 북부로 떠나는 ‘대이동(Great Migration)’이 있었지만, 일부 흑인들은 남부에 남아 뿌리를 내리기를 선택했다. 특히 교육 기회를 찾아 애틀랜타의 흑인 대학들 주변에 흑인 지식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클락 애틀랜타 대학교, 모어하우스 칼리지, 스펠만 칼리지, 모리스 브라운 칼리지. 이 흑인 대학들이 ‘애틀랜타 대학 센터 (Atlanta University Center)’를 이루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이 모어하우스 칼리지를 나왔다.

버클헤드와 미드타운 — 두 개의 애틀랜타

애틀랜타는 사실 여러 개의 도시가 합쳐진 것처럼 다양한 동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버클헤드(Buckhead)는 애틀랜타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명품 쇼핑몰, 고급 레스토랑, 럭셔리 아파트들이 모여 있다. 이 동네를 걸으면 남부의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세련된 미국 대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미드타운(Midtown)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다. 하이 뮤지엄(High Museum of Art), 조지아 아쿠아리움, 세계 최대 규모의 담수 아쿠아리움 중 하나인 조지아 수족관이 이 지역에 있다. 또한 LGBTQ+ 커뮤니티가 강하게 형성된 피드몬트 파크(Piedmont Park) 주변 지역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남부 주에 있으면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커뮤니티 중 하나가 이 도시 안에 있다.

힙합과 애틀랜타 — 트랩 뮤직의 탄생

뉴올리언스가 재즈를 낳고, 멤피스가 블루스를 낳았다면, 애틀랜타는 2000년대 이후 미국 힙합의 새로운 흐름인 ‘트랩 뮤직(Trap Music)’을 낳았다. 애틀랜타 남부의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이 음악은 808 베이스 드럼의 두드러진 비트와 오토튠 보컬이 특징이다. T.I., 영 젊지, 릴 웨인, 퓨처. 이 이름들이 애틀랜타 트랩 씬을 만들었다.

트랩 뮤직은 지금 전 세계 팝음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K-팝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아이돌 그룹들의 음악에서 트랩 비트를 듣는 것은 이제 낯설지 않다. 뉴올리언스의 재즈가 그랬듯, 애틀랜타의 트랩 뮤직도 가장 가난한 곳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세계로 퍼져나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고통이 만든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이 도시가 또 한 번 증명하고 있다.

7. 조지아의 자연과 피치 — 복숭아의 주

조지아(Georgia) 주는 ‘복숭아 주(Peach State)’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조지아 복숭아는 달고 향기롭기로 미국에서 유명하다. 따뜻한 기후와 붉은 점토 토양이 복숭아 재배에 최적이다. 여름에 조지아를 방문하면 도로변에 복숭아 가판대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신선한 조지아 복숭아 한 입은 슈퍼에서 사는 복숭아와 차원이 다르다.

애틀랜타 북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블루 리지 마운틴스(Blue Ridge Mountains)가 시작된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남쪽 끝자락인 이 산들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블루 리지(Blue Ridge)라는 도시 주변의 사과 농장들과 와이너리들이 가을 시즌에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가을 주말에 애틀랜타 교민들이 즐겨 찾는 당일치기 코스다.

사바나 — 조지아의 숨겨진 보석

애틀랜타에서 동쪽으로 약 4시간, 대서양 연안에 사바나(Savannah)가 있다.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미국 남부에서 가장 잘 보존된 역사 지구를 가진 도시다. 남북전쟁 때 셔먼 장군이 불태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덕분에, 18~19세기 건물들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사바나의 매력은 22개의 작은 공원 광장들이다. 도시 곳곳에 그늘진 오크나무들이 스페인 이끼를 늘어뜨린 채 서 있고, 그 아래 벤치에 앉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이 도시 분위기 자체가 예술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에서 주인공이 벤치에 앉아 초콜릿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사바나에서 촬영되었다. 그 벤치는 지금 사바나 역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8. 애틀랜타 한인 커뮤니티 — 미국 동남부의 한인 중심

애틀랜타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의사, 간호사, 엔지니어 등 전문직 이민자들이 주로 왔다. 1980년대 들어 상업 이민자들이 늘면서 한인 비즈니스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금 귀넷 카운티 일대에는 한국 마트, 한국 식당, 한국어 교회, 한국 학원들이 밀집해 있다. 한국어 신문도 발행되고, 한국어 라디오 방송도 있다.

애틀랜타 한인 커뮤니티의 특징 중 하나는 교회 중심성이다. 한인 교회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커뮤니티의 사회적 허브 역할을 한다.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이 정착 정보를 얻고, 일자리를 소개받고, 아이들 학교 정보를 나누는 곳이 교회다. 미국의 다른 한인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지만, 애틀랜타에서는 그 경향이 특히 강하다.

귀넷 카운티의 변화

귀넷 카운티(Gwinnett County)는 한때 백인 중산층의 전형적인 교외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난 20~30년 사이 급격하게 다양화되었다.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 라틴 아메리카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다양한 카운티 중 하나가 되었다. 학교에서 3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된다.

이 변화가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 살아온 백인 주민들 중 일부는 변화에 불안감을 느낀다. 그 불안감이 정치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귀넷 카운티가 한때 공화당 텃밭이었다가 민주당 경합 지역으로 변한 것은 이 인구 구성 변화와 직접 관련이 있다. 이민자들이 미국 정치 지형을 바꾸는 과정이 귀넷 카운티에서 가장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애틀랜타

남부에서 살아간다는 것

애틀랜타에 오래 사신 교민 분들에게 ‘남부에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부분 비슷한 답을 하신다.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여기가 더 좋아요.’ 낮은 집값, 좋은 날씨,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큰 한인 커뮤니티가 그 이유다. 뉴욕이나 LA의 경쟁적이고 빠른 분위기와는 다른, 좀 더 여유로운 삶의 속도가 있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다. 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여름의 뜨겁고 습한 날씨. 남부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와 가끔 마주치는 인종적 시선. 하지만 많은 교민들이 이 불편함보다 애틀랜타의 장점이 더 크다고 말한다. 미국 어느 도시에 살든 완벽한 곳은 없다. 어떤 불편함을 감수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 이민 생활이다.

마틴 루터 킹의 도시에서 생각하는 것

애틀랜타에서 마틴 루터 킹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이 싸운 것이 무엇인가.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싸움은 흑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을 위한 싸움이었다.

아시아계 이민자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인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1년 애틀랜타에서 스파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여덟 명이 사망했고, 그중 여섯 명이 아시아계 여성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애틀랜타였다. 킹 목사가 평등을 꿈꿨던 이 도시에서. 평등을 향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자의 한 마디   애틀랜타를 여행할 때 꼭 반나절은 오번 애비뉴의 마틴 루터 킹 역사 공원에 쓰라. 그의 탄생지, 교회, 무덤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느껴라. 코카콜라 박물관도 재미있지만, 킹 목사의 무덤 앞에서의 30분이 코카콜라 박물관 두 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 그리고 저녁에는 귀넷 카운티의 한인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드시라. 이 도시에 수십 년을 살아온 교민들이 만들어낸 한인 커뮤니티의 맛을 경험하는 것도 애틀랜타 여행의 일부다.

애틀랜타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3월~5월 (벚꽃·온화한 날씨), 9월~11월 (가을·선선). 여름(6~8월)은 덥고 습하며 뇌우가 잦다

주요 관광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국립 역사 공원(오번 애비뉴), 코카콜라 박물관, CNN 센터 스튜디오 투어, 조지아 아쿠아리움, 센테니얼 올림픽 파크

근교 명소

사바나(동쪽 4시간·포레스트 검프 촬영지), 블루 리지(북쪽 1시간·사과 농장·단풍), 스톤 마운틴 공원(동쪽 30분)

꼭 먹어야 할 것

조지아 복숭아 (여름 한정), 남부식 치킨 앤 와플, 피치 코블러, 귀넷 카운티 한국 식당가

추천 2일 코스

1일차: 오번 애비뉴(킹 역사 공원) 오전→코카콜라 박물관 오후→센테니얼 파크 저녁

2일차: 조지아 아쿠아리움→미드타운 하이 뮤지엄→귀넷 카운티 한국 저녁 식사

한인 커뮤니티

귀넷 카운티 둘루스(Duluth)·스와니(Suwanee) 일대. H마트·한아름마트 등 한국 마트, 한식당 밀집. 다운타운에서 차 30~40분

주의사항

2021년 스파 총기 사건 이후 아시아계 혐오 범죄 경각심 높아짐. 혼자 다닐 때 특히 야간 주의. 다운타운 일부 지역 밤 치안 취약

Chapter 16. 텍사스 — 샌안토니오 & 오스틴

텍사스는 미국이 아니다, 텍사스다 — 멕시코 문화와 미국의 경계에서

텍사스(Texas)는 미국이지만 미국과 다르다. 다른 어떤 주보다 이 말이 어울리는 곳이 텍사스다. 텍사스 사람들은 스스로를 ‘텍산(Texan)’이라 부르며, 미국 시민이기 이전에 텍사스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텍사스에는 독자적인 국기가 있고, 한때 독립 공화국이었던 역사가 있으며, 지금도 ‘텍사스는 언제든 연방을 탈퇴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물론 법적으로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 믿음 자체가 텍사스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주다. 면적이 한반도의 약 3.4배. 이 광대한 땅 안에 사막이 있고, 숲이 있고, 해안이 있고, 도시가 있고, 대평원이 있다. 달라스 (Dallas), 휴스턴(Houston), 샌안토니오(San Antonio), 오스틴(Austin), 엘패소(El Paso). 이 도시들 각각이 규모와 문화에서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텍사스 하나가 곧 하나의 대륙이다.

나는 텍사스를 처음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텍사스에 오면 미국이 다시 보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미국다운 곳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넘어서는 곳이에요.’ 그 말의 의미를 샌안토니오와 오스틴을 걸으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알라모의 전설, 미시시피 이서에서 가장 큰 강인 리버 워크, 이민과 문화 혼혈의 역사, 그리고 텍사스 특유의 자부심. 이것들이 텍사스를 텍사스로 만든다.

1. 텍사스라는 땅 — 거대함 그 자체

텍사스는 1845년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되기 전까지 9년간 독립 공화국이었다.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텍사스 공화국(Republic of Texas). 그 짧지만 강렬한 독립 국가의 기억이 텍사스 정체성의 근간이다. ‘홀로 서 있는 별(Lone Star)’이 텍사스의 상징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텍사스 국기는 지금도 성조기와 나란히, 혹은 같은 높이에 게양된다. 다른 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텍사스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다. 서부 엘패소는 사막이고, 동부 휴스턴은 아열대성 기후다. 중부 내륙은 여름에 40도를 넘고 겨울에도 가끔 눈이 온다. 2021년 2월 텍사스에 이례적인 한파가 몰아쳐 전력망이 마비되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 한겨울 추위에 대비하지 못한 전력 인프라가 드러난 것이다. ‘텍사스는 어떤 날씨도 자체 해결한다’는 자부심이 그날 무너졌다.

텍사스 경제는 거대하다. 만약 텍사스가 독립 국가라면 GDP 기준으로 세계 8~9위권 경제 대국이 될 것이다. 석유, 천연가스, 농업, 기술, 항공우주. 다양한 산업이 이 광대한 땅에서 번성한다. 최근에는 캘리포니아의 높은 세금과 규제를 피해 테슬라, 오라클, 휴렛팩커드 같은 대기업들이 텍사스로 본사를 이전했다. 텍사스가 새로운 실리콘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2. 샌안토니오 — 알라모와 텍사스의 탄생

샌안토니오(San Antonio)는 텍사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며, 텍사스 정체성의 핵심이 담긴 곳이다. 인구 약 140만 명으로 텍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인구의 약 65퍼센트가 히스패닉계다. 멕시코 문화와 미국 남부 문화가 뒤섞인 이 도시는 ‘미국 속의 멕시코’라는 느낌을 준다.

샌안토니오의 거리를 걸으면 스페인어가 영어만큼 많이 들린다. 멕시코 국경과 불과 240킬로미터 거리. 식당 메뉴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쓰여 있고, 라디오에서는 노르테뇨(Norteño)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도시는 텍스-멕스(Tex-Mex) 문화의 심장이다. 텍사스와 멕시코가 만나 만들어낸 음식, 음악, 건축, 삶의 방식.

알라모 — 텍사스의 신화

샌안토니오의 중심에 알라모(The Alamo)가 있다. 1836년 2월 23일부터 3월 6일까지 13일간 벌어진 전투. 약 200명의 텍사스 독립군이 5,000명에 달하는 멕시코 산타 아나 장군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탈출할 수 있었지만 떠나지 않고 싸웠다. 13일 후 알라모는 함락되었고, 수비군은 전멸했다.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 짐 보위(Jim Bowie). 이 이름들이 텍사스 독립의 영웅이 되었다.

‘알라모를 기억하라(Remember the Alamo)!’ 이 전쟁 구호는 텍사스 독립 전쟁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도 텍사스인들의 정신적 기반이다. 물러서지 않는 것, 끝까지 싸우는 것. 알라모가 상징하는 가치다. 그런데 이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복잡한 역사가 있다. 텍사스 독립군의 상당수는 멕시코가 금지한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영웅적인 서사 뒤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

알라모 앞에 서면 그 규모에 놀라는 분들이 많다. 영화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다. 그 작은 건물을 200명이 지켰다. 그리고 그 건물 주변으로 지금은 현대 도시가 들어서 있다. 역사의 현장이 도심 한복판에 섬처럼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미국이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다.

리버 워크 — 물이 만든 도시의 심장

알라모에서 걸어서 5분. 산 안토니오 강(San Antonio River)을 따라 이어지는 리버 워크(River Walk, 또는 Paseo del Rio)가 있다. 강변 양쪽으로 식당, 카페, 호텔, 갤러리들이 줄지어 있고, 강 위로 작은 보트가 오간다. 낮에는 관광객들이, 밤에는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샌안토니오의 심장이다.

리버 워크는 강보다 낮은 지하 수준에 만들어져 있어, 도로에서 계단을 내려가야 나온다. 지상의 시끄러운 도시와 달리, 리버 워크는 조용하고 서늘하다. 저녁에 조명이 켜지면 물 위에 반사되는 빛이 아름답다. 마리아치(Mariachi, 멕시코 전통 악단)가 강변 식당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연주하고, 그 음악이 물 위로 울려 퍼진다.

한국 분들이 리버 워크에서 저녁을 보내면 거의 예외 없이 만족하신다. 텍스-멕스 음식, 차가운 텍사스 맥주, 마리아치 음악, 강변의 불빛. 이 조합이 낯설면서도 편안하다. 낯설지 않은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의 청계천이나 한강 변과 비슷한 ‘물가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3. 텍스-멕스 음식 — 두 문화가 만든 맛

텍사스를 이야기하면서 음식을 빠뜨릴 수 없다. 텍스-멕스(Tex-Mex)는 텍사스와 멕시코 음식 문화가 수백 년 동안 뒤섞여 만들어진 독자적인 음식 문화다. 정통 멕시코 음식과도 다르고, 미국 음식과도 다른, 텍사스만의 것이다.

파히타와 나초 — 텍사스가 세상에 준 음식들

파히타(Fajita)는 텍스-멕스의 대표 음식이다. 그릴에 구운 소고기나 닭고기를 밀가루 또르띠야에 싸서 먹는 이 음식은 텍사스 목장 노동자들이 먹던 소의 횡격막 부위(skirt steak)를 요리한 것에서 시작됐다. 지금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 되었지만, 그 뿌리가 텍사스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초(Nacho)도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역에서 탄생했다. 1943년 텍사스 국경 도시 이글 패스(Eagle Pass) 맞은편 멕시코 피에드라스 네그라스(Piedras Negras)에서, 한 호텔 요리사가 식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급하게 만든 음식이다. 남은 토르티야 칩에 치즈를 올려 오븐에 구운 것. 그 즉흥적인 요리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히는 스낵 중 하나가 되었다.

텍사스 BBQ도 빠뜨릴 수 없다. 멤피스 BBQ가 돼지고기 갈비 중심이라면, 텍사스 BBQ는 소고기 브리스킷(Brisket) 중심이다. 소의 앞가슴 부위를 12~18시간 저온 훈연하는 이 방식은 텍사스 목장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고기가 너무 부드러워 포크가 필요 없을 정도다. 텍사스 BBQ의 성지로 꼽히는 오스틴의 프랭클린 바비큐(Franklin Barbecue)는 매일 아침부터 줄이 시작되고, 고기가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4. 오스틴 — 텍사스의 이상한 수도

오스틴(Austin)은 텍사스 주도(州都)다. 그런데 다른 텍사스 도시들과 전혀 다르다. ‘오스틴을 이상하게 유지하라(Keep Austin Weird)’는 슬로건이 있다. 포틀랜드에서 빌려온 그 슬로건이 오스틴에서도 살아있다. 보수적인 텍사스 주 한복판에, 진보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도시가 있다.

오스틴은 최근 10년 사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 중 하나다. 매일 약 150명의 새 주민이 이 도시로 이사 온다는 통계가 있었다. 텍사스의 낮은 세금, 규제 없는 비즈니스 환경, 그리고 오스틴 특유의 활기차고 창의적인 문화. 여기에 유명한 음악 축제인 SXSW(South by Southwest)로 쌓아온 ‘음악과 기술의 도시’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테슬라가 오스틴에 주요 거점을 두고 있다.

6번가 — 오스틴의 음악 심장

오스틴 다운타운의 6번가(6th Street)는 내슈빌의 브로드웨이 스트리트, 뉴올리언스의 버번 스트리트와 함께 미국 3대 음악 거리로 꼽힌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이면 6번가는 차 없는 거리가 되고, 수십 개의 바에서 라이브 음악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컨트리, 블루스, 록, 재즈, 인디. 모든 장르가 이 한 거리 안에 있다.

오스틴을 ‘라이브 음악의 수도(Live Music Capital of the World)’라고 부른다. 자칭 타이틀이지만 허풍이 아니다. 인구 대비 라이브 음악 공연장 수로는 미국에서 가장 많다. 세계 최고의 음악 축제인 SXSW(South by Southwest)가 매년 3월 이 도시에서 열린다. 전 세계에서 음악가, 영화인, 기술 기업인들이 모여든다. 1주일 동안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가 된다.

텍사스 대학교와 오스틴의 지적 에너지

오스틴이 텍사스의 다른 도시들과 다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텍사스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UT Austin)다. 약 5만 명의 학생이 다니는 이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큰 공립대학 중 하나다. 오스틴 인구의 상당 부분이 학생, 교수, 연구자, 그리고 그 주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젊고 교육받은 인구가 도시에 자유롭고 지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UT 오스틴 캠퍼스를 걷다 보면 미국 대학 캠퍼스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넓은 잔디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캠퍼스 카페에서 논쟁하는 젊은이들, 갤러리와 공연장이 있는 예술 건물들. 그 에너지가 오스틴 전체를 흐른다.

5. 텍사스의 멕시코 문화 유산 — 경계는 어디인가

텍사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땅이 1836년까지 멕시코 영토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텍사스 독립 이전에 이 땅에는 스페인계, 멕시코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텍사스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그들은 갑자기 자신의 땅에서 외국인이 되었다. 그 역사가 지금 텍사스의 히스패닉 문화로 남아 있다.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역을 ‘보더랜드(Borderland)’라고 부른다. 미국도 아니고 멕시코도 아닌, 두 나라의 문화가 뒤섞인 독자적인 세계. 엘패소와 그 맞은편 멕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스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실상 하나의 도시처럼 기능한다. 사람들이 매일 강을 건너 출퇴근하고, 쇼핑하고, 가족을 만난다.

이민과 국경 — 텍사스의 가장 뜨거운 현실

텍사스는 미국 이민 문제의 최전선이다. 리오그란데강(Rio Grande)을 따라 약 2,000킬로미터의 국경이 멕시코와 텍사스를 가른다. 이 국경을 건너 미국으로 들어오려는 이민자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국경수비대의 긴장이 매일 이 강가에서 펼쳐진다.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복잡하다. 폭력과 가난을 피해 중미에서 온 사람들, 일자리를 찾아온 멕시코인들, 마약 카르텔을 피해 도망온 가족들. 그들 모두가 다른 사연을 갖고 같은 강을 건넌다. 그 강을 건너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매년 수백 명이다.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에 새겨진 ‘지치고 가난한 자들을 내게 보내라’는 시와, 리오그란데강에서 매년 일어나는 비극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텍사스에서 실감한다.

이 문제를 두고 텍사스 안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국경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민자들에게 더 인도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사람들. 텍사스 히스패닉 커뮤니티 안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3세대 멕시코계 텍사스인과 방금 강을 건너온 이민자의 이해관계가 같지 않다. 이 복잡함이 텍사스 이민 문제의 현실이다.

6. 텍사스의 석유와 카우보이 문화

석유 — 텍사스를 바꾼 검은 황금

1901년 1월 10일, 텍사스 스핀들탑(Spindletop) 유전에서 거대한 원유 분출이 일어났다. 그전까지 미국 석유 산업의 중심은 펜실베이니아였다. 스핀들탑의 발견이 그것을 바꿨다. 텍사스는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석유 생산지가 되었다. 그 석유가 텍사스를 가난한 농업 주에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주 중 하나로 만들었다.

석유 부자를 뜻하는 ‘텍사스 오일맨(Texas Oilman)’이라는 이미지가 여기서 나왔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카딜락을 모는 부자. 텍사스의 문화적 편견이다. 현실에서 카딜락을 모는 카우보이 모자 부자는 많지 않지만, 그 이미지가 텍사스를 상징하는 것이 된 것은 석유 붐이 가져온 부의 문화 때문이다.

카우보이와 로데오 — 살아있는 서부 문화

텍사스는 미국 카우보이 문화의 본향이다. 19세기 남북전쟁 후, 텍사스의 소 떼를 북쪽 시장으로 몰고 가는 ‘캐틀 드라이브(Cattle Drive)’에서 카우보이 문화가 만들어졌다.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 긴 뿔의 텍사스 소), 와이드 브림 카우보이 모자, 카우보이 부츠, 라쏘(Lasso, 올가미). 이것들이 텍사스 카우보이의 상징이다.

지금도 텍사스 곳곳에서 로데오(Rodeo) 경기가 열린다. 황소 타기, 올가미 던지기, 배럴 레이싱(말을 타고 통 주변을 도는 경기). 이 경기들은 원래 목장 일에서 필요한 기술들이었다. 로데오는 텍사스의 살아있는 문화 유산이다. 매년 1~2월 휴스턴에서 열리는 휴스턴 로데오(Houston Livestock Show and Rodeo)는 세계 최대 규모의 로데오 행사로, 동시에 대규모 음악 콘서트이기도 하다.

7. 텍사스의 한인 커뮤니티

텍사스의 한인 커뮤니티는 주로 달라스-포트워스(Dallas-Fort Worth) 광역권과 휴스턴, 그리고 오스틴에 분포해 있다. 텍사스 전체 한인 인구는 약 8만~10만 명으로 추산된다. LA, 뉴욕, 애틀랜타에 이어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한인 커뮤니티 권역이다.

달라스의 한인 커뮤니티는 도심 북쪽 플래노(Plano)와 앨런(Allen)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삼성, LG, 현대차 같은 한국 대기업들의 미국 법인이 달라스 지역에 있어 주재원과 관련 업종 종사자들이 많다. 플래노에는 한국 마트, 식당, 노래방들이 밀집해 있어 한국 분들이 어렵지 않게 한국의 맛을 즐길 수 있다.

휴스턴과 한인 의료 커뮤니티

휴스턴(Houston)은 세계 최고의 의료 연구 기관 중 하나인 텍사스 메디컬 센터(Texas Medical Center)가 있는 도시다. 세계 각지에서 의사, 연구자, 환자들이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한국계 의료인들도 이 의료 허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레지던시를 마친 의사들 중 상당수가 휴스턴에 정착했다.

휴스턴은 텍사스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다. 전 세계 145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인구의 약 45퍼센트가 외국 태생이거나 외국 태생 부모의 자녀다. 한인 커뮤니티도 이 다양성의 일부다. 한국 타운은 도심 서쪽 스위트워터(Sweetwater) 인근에 형성되어 있다.

오스틴의 젊은 한인들

오스틴은 다른 텍사스 도시들과 달리, 한인 커뮤니티의 성격이 좀 다르다. 테크 기업들이 오스틴으로 이전하면서 젊은 한인 IT 종사자들이 늘었다. 삼성 반도체 공장이 오스틴 북쪽 테일러(Taylor)에 있어 한국인 기술자들이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한다. LA나 애틀랜타의 한인 커뮤니티와 달리, 오스틴의 한인들은 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젊고 역동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8. 텍사스의 자연 — 광대함의 다른 이름

빅 벤드 국립공원 — 텍사스의 비밀

많은 분들이 모르는 텍사스의 숨겨진 보석이 빅 벤드 국립공원(Big Bend National Park)이다. 텍사스 서부 사막 지대, 멕시코 국경의 리오그란데강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 있어 ‘빅 벤드(큰 굴곡)’라는 이름이 붙었다. 면적이 제주도의 20배에 달하는 이 광대한 공원에 사막, 협곡, 산악 지형이 공존한다.

빅 벤드는 미국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국립공원 중 하나다. 주변에 큰 도시가 없고, 공원 내부도 넓어서 자동차로 돌아다니기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접근의 어려움이 역설적으로 이 공원의 매력이다. 미국에서 빛 공해가 가장 적은 지역 중 하나여서 밤하늘이 압도적이다. 은하수를 맨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샌안토니오 미션들 — 스페인의 흔적

샌안토니오 주변에는 5개의 스페인 식민지 시대 미션(Mission)이 있다. 18세기 스페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고 스페인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이 건물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샌안토니오 미션 국립 역사 공원(San Antonio Missions National Historical Park)’이다.

알라모도 원래 이 미션 중 하나였다. 미션 산 안토니오 데 발레로(Misión San Antonio de Valero). 스페인 선교사들이 세운 종교 건물이 텍사스 독립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 전환의 역사 속에서, 이 땅에 먼저 살던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종종 잊혀진다. 알라모가 ‘텍사스의 영웅들’의 이야기라면, 미션들은 그 이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텍사스

텍사스의 자부심과 한국인의 자부심

텍사스 사람들의 자부심은 유명하다. ‘텍사스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충분한 자격이다(Being born in Texas is sufficient grounds for pride).’ 텍사스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다른 주 사람들이 때로 거만하게 느끼는 이 자부심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라모의 전설, 석유의 역사, 광대한 땅, 독자적인 문화. 텍사스에는 자랑할 것이 많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여기서는 우리 방식대로 한다’는 독립성으로 이어진다. 연방 정부의 간섭을 싫어하고, 자기 땅에서 자기 규칙으로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텍사스의 정신.

한국인들에게도 비슷한 자부심이 있다. ‘빨리빨리’ 문화, 위기를 극복하는 저력, 세계에 진출한 K-문화. 나는 텍사스 사람들의 자부심을 보면서 한국인의 자부심을 생각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자신의 땅과 문화에 대한 강한 정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경계에서 살아가는 것

텍사스는 경계의 땅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 남부와 서부의 경계, 보수와 진보의 경계, 과거와 미래의 경계. 이 여러 경계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텍사스의 복잡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이민자로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경계에서 산다. 한국과 미국, 한국어와 영어,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두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텍사스의 히스패닉 커뮤니티가 수백 년간 해온 것을, 한인 이민자들이 지금 하고 있다. 경계는 분리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다. 텍스-멕스 음식이 그것을 가장 맛있게 보여준다.

샌안토니오 리버 워크에서 저녁을 먹던 손님 한 분이 마리아치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음악 들으니까 우리나라 트로트가 생각나요. 뭔가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텍스-멕스 음식을 먹으면서 검보를 떠올렸던 것처럼, 음악도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의 보편성이 문화를 넘어 연결된다.

저자의 한 마디   텍사스는 크다. 한 번에 다 보려 하지 마라. 샌안토니오와 오스틴만 보더라도 텍사스의 핵심을 경험할 수 있다. 샌안토니오에서는 알라모와 리버 워크를 반드시 보고, 텍스-멕스 음식을 제대로 한 끼 먹어라. 오스틴에서는 6번가 라이브 음악 바와 텍사스 바비큐를 경험하라. 그리고 두 도시 사이 어딘가에서 텍사스의 광활한 대평원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라.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서는 마음이 열린다. 텍사스가 텍산들에게 주는 선물 중 하나가 그것이다. 어디를 봐도 땅이 이어지는 광활함. 그 안에 서면 사람이 왜 이 땅을 사랑하는지 이해가 된다.

텍사스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3월~5월, 10월~11월 (온화). 여름(6~9월)은 40도 이상 극더위. 샌안토니오 피에스타(Fiesta) 축제는 4월 말~5월 초

샌안토니오 주요 명소

알라모, 리버 워크(River Walk), 산 안토니오 미션 역사 공원, 마켓 스퀘어(히스패닉 시장)

오스틴 주요 명소

6번가 라이브 음악 거리, 텍사스 주 의사당(Capitol), UT 오스틴 캠퍼스, 바튼 스프링스 풀(자연 수영장), 텍사스 주립 역사 박물관

꼭 먹어야 할 것

텍스-멕스(파히타·엔칠라다·케사디야), 텍사스 소고기 브리스킷 BBQ, 쿼소 딥(녹인 치즈 딥), 피칸 파이, 텍사스 스타일 칠리(콩 없는 것이 정통)

추천 코스

오스틴 1~2박(음악·바비큐) + 샌안토니오 1~2박(알라모·리버 워크·텍스-멕스)

텍사스 BBQ 명소

오스틴: 프랭클린 바비큐(Franklin BBQ·줄 필수·소고기 브리스킷), 라 바베큐(La BBQ). 샌안토니오: 루디스(Rudy’s). 점심 전 일찍 가야 고기 남음

달라스·휴스턴 한인 커뮤니티

달라스: 플래노(Plano)·앨런(Allen) 일대 한국 마트·식당 밀집.

휴스턴: 스위트워터 인근. 오스틴: 테일러(Taylor, 삼성 반도체 공장 인근) 한인 증가 중

Chapter 17. 사우스캐롤라이나 — 찰스턴

아름다운 도시, 무거운 역사 — 노예제의 흔적과 남부의 자존심

찰스턴(Charleston)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파스텔 색깔의 저택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 17세기부터 이어온 교회 첨탑들, 대서양 바람이 불어오는 넓은 항구. 미국 내 여행 잡지들이 해마다 ‘가장 가고 싶은 도시’ 순위에 올리는 곳이다. 처음 이 도시에 발을 들이는 순간, 미국의 다른 어느 도시와도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도시는 동시에 미국 역사에서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미국으로 들어온 아프리카 노예의 약 40퍼센트가 이 항구를 통해 처음 발을 디뎠다. 미국 남북전쟁의 첫 번째 총성이 이 도시 앞바다에서 울렸다. 남부 연합이 가장 먼저 연방을 탈퇴한 주의 중심 도시가 찰스턴이다. 미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동시에 미국의 가장 어두운 역사를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나는 찰스턴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드린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세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어떤 위에 세워졌는지도 함께 보세요.’ 그 두 가지를 함께 볼 때 찰스턴이 완전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것이 미국 남부를 제대로 여행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1. 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주 — 남부의 시작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는 미국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1860년 12월 20일, 남북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미합중국에서 가장 먼저 탈퇴했다. 그 결정이 도미노처럼 다른 남부 주들의 탈퇴를 불러왔고, 결국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을 분열시킨 그 결정이 바로 이 주에서 나왔다.

왜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가장 먼저였을까. 이 주는 미국 남부에서 노예제에 가장 의존적인 주 중 하나였다. 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였고, 쌀과 면화 플랜테이션 경제 전체가 노예 노동 위에 서 있었다. 노예제가 폐지된다면 이 주의 경제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 공포가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탈퇴를 이끌었다.

지금의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인구 약 530만 명의 중간 크기 주다. 농업과 관광이 중요한 산업이고, 보잉, BMW, 볼보 같은 제조업체들이 주요 고용주다.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텃밭이지만, 찰스턴과 같은 도시 지역은 점점 경합 지역이 되어가고 있다. 남부의 다른 도시들처럼, 사우스캐롤라이나도 변화하는 미국의 인구 구성을 반영하며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

2. 찰스턴 역사 지구 — 시간이 멈춘 아름다움

찰스턴 역사 지구(Historic District)는 미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식민지 시대 도시 경관 중 하나다. 1670년에 세워진 이 도시의 원래 구역이 지금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18~19세기에 지어진 저택들, 교회들, 공공 건물들이 350년의 시간을 견뎌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예배를 드리고, 관광객을 맞이한다.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차 대신 걸어서 다닐 때 이 도시가 가장 아름답다. 레인보우 로(Rainbow Row)는 찰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다. 조지안 양식의 연립 주택들이 노랑, 분홍, 파랑, 초록의 파스텔 색으로 칠해져 13채가 늘어서 있다.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그 사진의 거리가 바로 이곳이다.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훨씬 아름답다.

교회 첨탑 —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신앙

찰스턴을 ‘교회의 도시(Holy City)’라고 부른다. 도시 면적 대비 교회 수가 미국에서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그리고 그 교회들의 첨탑들이 찰스턴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고층 빌딩 대신 첨탑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도시. 200년, 300년 된 교회 건물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세인트 마이클 교회(St. Michael’s Church)는 1761년에 지어진 찰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조지 워싱턴도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하얀 첨탑이 높이 솟아 있어 찰스턴의 많은 사진에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오래된 교회들을 보면서 한국 분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다. ‘ 이 교회가 우리나라 역사 어느 시점에 지어진 건지 생각해보면 신기해요.’ 역사를 자신의 기준점으로 연결할 때 더 실감이 난다. 1761년은 조선시대 영조와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이 있던 시기이다.

사우스 오브 브로드 — 부의 저택들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 남쪽 지역을 ‘SOB(South of Broad)’라고 부른다. 찰스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부유한 주거 지역이다. 18~19세기 플랜테이션 부자들이 지은 저택들이 늘어선 이 지역은 미국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중 하나다. 정원 딸린 빅토리아 양식 저택, 목련나무가 드리운 진입로, 철재 울타리.

이 저택들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항상 같은 질문을 품는다. 이 저택들을 짓고 유지한 것이 누구의 노동이었는가. 플랜테이션에서 일한 수천 명의 노예들이 만들어낸 부가 이 저택들을 세웠다. 아름다운 건물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착취의 역사가 같은 장소에 공존한다. 찰스턴에서는 그 공존을 피할 수 없다.

3. 노예 거래의 역사 — 이 항구가 기억하는 것

찰스턴 항구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두운 의미를 가진 항구다. 1670년부터 1808년 노예 수입이 금지될 때까지, 약 4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이 항구를 통해 미국에 들어왔다. 미국으로 강제 이송된 전체 노예의 약 40퍼센트가 이 항구를 거쳤다.

그들이 처음 닿은 땅이 설리번스 아일랜드(Sullivan’s Island)다. 찰스턴 항구 입구의 이 작은 섬에서 노예들은 격리 검역을 받았다. 최소 2주에서 몇 달씩 이 섬에 갇혀 있다가 경매에 팔려 플랜테이션으로 보내졌다. 노예제 연구자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설리번스 아일랜드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엘리스 아일랜드’라고 불렀다. 유럽 이민자들이 희망을 품고 들어온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와 달리, 이 섬은 절망과 강제의 문이었다.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박물관

2023년 찰스턴 항구 근처에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박물관 (IAAM)이 문을 열었다. 노예들이 처음 발을 디딘 바로 그 항구 옆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이어진 강제 이주의 역사와 그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다룬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기둥들 위에 건물이 떠 있는 구조인데, 기둥들이 있는 지면은 실제로 노예들이 처음 발을 디딘 땅이다. 그 위에 박물관을 올려서 그 땅의 역사를 짓밟지 않겠다는 의도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아프리카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어떻게 잡혀서 이 항구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상세하게 펼쳐진다.

나는 이 박물관이 미국에서 본 어떤 박물관보다 강렬하게 역사를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숫자와 사건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얼굴로 역사를 전달한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아모아비이고, 가나의 아산테 왕국 출신이다. 그는 18세에 붙잡혀 이 배를 탔다.’ 그 개인의 이야기가 역사를 숫자에서 꺼내어 인간으로 만든다.

이 박물관을 방문한 손님 한 분이 전시를 보다 나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국이 이런 걸 만들었다는 게 놀라워요. 자기들 잘못을 이렇게 정면으로 보여주는 나라가 많지 않잖아요.’ 그 말이 맞다. 가장 부끄러운 역사를 가장 아픈 현장에 박물관으로 만든 것. 그것이 찰스턴이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다.

4. 포트 섬터 — 남북전쟁의 첫 총성

찰스턴 항구 한가운데 작은 요새가 있다. 포트 섬터(Fort Sumter). 1861년 4월 12일 새벽, 남부연합군이 이 요새를 포격했다. 그것이 남북전쟁의 첫 번째 총성이었다. 미국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그 순간이 바로 이 항구에서였다.

포트 섬터까지는 찰스턴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약 30분이 걸린다. 섬에 내려 요새 터를 걷다 보면 당시의 포격으로 무너진 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요새에서 시작된 전쟁이 4년간 지속되면서 약 62만 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전투로 사망한 전쟁이 이 작은 요새의 포격에서 시작되었다.

포트 섬터에 서서 찰스턴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저 아름다운 도시에서 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전쟁의 원인이 된 노예제가 저 도시의 부를 만들었다는 것. 찰스턴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무게가 이 항구 위에서 동시에 느껴진다.

5. 2015년 이매뉴얼 교회 총기 사건 — 상처는 현재다

찰스턴의 역사는 과거에만 있지 않다. 2015년 6월 17일, 찰스턴 다운타운의 엠마뉴엘 아프리카 감리교회(Emanuel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21세의 백인 청년 딜런 루프(Dylann Roof)가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한 뒤 총을 꺼내 9명을 사살했다. 희생자는 모두 흑인이었다.

이 교회는 단순한 교회가 아니었다. 1816년에 세워진 엠마뉴엘 AME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교회 중 하나다. 덴마크 베지(Denmark Vesey)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노예 봉기를 조직하려다 처형된 역사가 있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방문해 설교한 역사도 있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에서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용서와 분노 사이

사건 이틀 후 법원 청문회에서 희생자 가족들이 루프 앞에 섰다. 많은 이들이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살인자 앞에서 용서를 선언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이 교회가 수백 년간 지켜온 신앙의 힘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용서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용서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다른 문제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 총격이 한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적 증오의 산물이라는 것. 용서가 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 복잡한 논쟁이 지금도 이 교회 앞에서 계속된다.

사건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의사당에서 남부연합 깃발이 내려졌다. 150년간 그곳에 걸려 있던 깃발이 처음으로 철거된 것이다. 총격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 깃발은 아직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비극이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이다.

6. 찰스턴의 음식 — 로우컨트리 쿠킨

찰스턴은 미국에서 음식 문화가 가장 독특한 도시 중 하나다. ‘로우컨트리 (Lowcountry)’라는 지역 이름에서 유래한 로우컨트리 쿠킨(Lowcountry Cookin’)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저지대의 독특한 음식 문화다. 크리올 음식처럼 아프리카, 유럽, 원주민 음식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융합된 것이다.

쉬림프 앤 그릿츠 — 가난한 음식이 고급 음식이 되다

찰스턴 음식의 대명사는 쉬림프 앤 그릿츠(Shrimp and Grits)다. 그릿츠(Grits)는 옥수수를 갈아 죽처럼 끓인 것으로, 미국 남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새우(Shrimp)는 찰스턴 앞바다에서 잡히는 신선한 것을 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먹는 것이 원래 찰스턴 어부들의 소박한 아침 식사였다.

그런데 지금 쉬림프 앤 그릿츠는 찰스턴 최고급 레스토랑의 메뉴가 되었다. 버터에 볶은 새우, 크리미한 체더치즈 그릿츠, 베이컨 조각과 그린 어니언으로 마무리. 가난한 어부의 음식이 고급 레스토랑 음식이 된 것이다. 이것이 음식 문화의 역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 시간이 지나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

한국 분들에게 쉬림프 앤 그릿츠를 드려보면 반응이 재미있다. 그릿츠의 죽 같은 질감이 처음에는 낯설다가, 버터와 치즈 맛이 더해진 것이 순두부나 죽과 비슷한 편안함을 준다는 분들이 있다. 새우가 익숙한 재료이기도 하고. 남부 음식이 한국 입맛과 의외로 잘 맞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 마켓 — 아프리카 문화가 살아있는 시장

찰스턴 다운타운에 시티 마켓(City Market)이 있다. 1804년부터 운영되어온 이 시장에서 지금도 구알라(Gullah) 문화권 여성들이 바구니를 짜서 판다. 달콤풀(sweetgrass)로 짜는 이 바구니는 서아프리카 전통 공예 기술에서 온 것이다. 수백 년 전 노예들이 고향의 기술을 간직해 이어온 것이다.

구알라(Gullah)는 찰스턴과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지역에서 형성된 독특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다. 아프리카어와 영어가 혼합된 구알라 언어, 아프리카 요리법, 민간 신앙, 공예가 지금도 이 지역 공동체 안에서 살아있다. 찰스턴 시장의 달콤풀 바구니는 그 문화의 살아있는 증거다.

7. 플랜테이션 투어 — 불편하지만 필요한 경험

찰스턴 주변에는 수십 개의 플랜테이션(대농장)이 있다. 18~19세기 쌀과 면화 농장이었던 이 곳들 중 일부가 지금은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다. 드레이튼 홀 (Drayton Hall), 맥클라우즈 플랜테이션(McLeod Plantation), 마그놀리아 플랜테이션 (Magnolia Plantation). 이름만 들어도 남부 낭만주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 장소들이 실제로는 무엇이었는지를 이제 미국은 더 정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20~30년 전까지 플랜테이션 투어는 주로 저택의 아름다운 건축과 정원, 우아한 생활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노예들의 이야기는 부차적이거나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많은 플랜테이션이 노예들의 삶을 전시의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 노예들이 살던 오두막,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 그들의 이름과 이야기.

맥클라우즈 플랜테이션 — 가장 정직한 플랜테이션 투어

맥클라우즈 플랜테이션은 찰스턴 주변 플랜테이션 중 가장 정직한 투어를 제공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농장은 남북전쟁 직후 실제로 해방 노예들이 자유를 맞이한 곳이다. 지금 이 농장의 해설자들 상당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고, 그들이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투어는 아름다운 저택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노예들이 살던 좁고 낡은 오두막 앞에서 시작한다. 한 방에 열 명, 열다섯 명이 살았던 공간. 바닥은 흙이고, 창문도 없는 곳. 그 공간 앞에 서서 해설자가 이름을 하나씩 읽는다. 이 농장에 살았던 노예들의 이름. 찰스, 사라, 모세, 힌다. 이름이 있는 사람들. 역사에서 잊혀진 개인들을 이름으로 불러내는 그 행위가, 어떤 긴 설명보다 강력하다.

이 투어를 경험한 손님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냥 역사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어요.’ 그것이 좋은 역사 투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

8. 찰스턴의 자연과 주변 명소

보퍼트와 힐튼 헤드 — 찰스턴을 넘어

찰스턴 남쪽으로 내려가면 미국 남부 해안의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진다. 보퍼트(Beaufort)는 인구 약 1만 3천 명의 작은 도시지만, 찰스턴 못지않은 아름다운 역사 지구를 가지고 있다. 구알라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빅 칠(The Big Chill)’, ‘프린스 오브 타이즈(The Prince of Tides)’가 이 도시에서 촬영되었다.

힐튼 헤드 아일랜드(Hilton Head Island)는 미국 동부 최고의 리조트 섬 중 하나다. 24개의 골프 코스, 아름다운 해변, 자전거 도로가 섬 전체에 펼쳐져 있다. 미국 은퇴자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다.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붐비지만, 봄이나 가을에 오면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안 리조트를 경험할 수 있다.

찰스턴의 사계절

찰스턴은 봄이 가장 아름답다. 3월부터 5월까지, 매그놀리아(목련) 나무와 아잘레아(철쭉)가 도시 전체를 꽃으로 뒤덮는다. 역사 지구의 오래된 저택들과 그 앞에 피어난 봄꽃들의 조합은 미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찰스턴 봄꽃 축제(Spoleto Festival USA)’도 5~6월에 열려 음악, 오페라, 연극이 도시를 채운다.

여름은 덥고 습하다. 허리케인 시즌이기도 하다. 2019년 허리케인 도리안이 찰스턴을 위협했고, 도시 일부가 침수되었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찰스턴은 미국에서 홍수 위험이 가장 빠르게 높아지는 도시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그 아름다운 역사 지구가 기후변화의 위협 앞에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무거운 현실이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찰스턴

아름다움과 역사 — 함께 보기

찰스턴을 여행하면서 나는 한국 분들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드린다. ‘이 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요?’ 대부분 레인보우 로의 아름다움이나 쉬림프 앤 그릿츠의 맛, 또는 엠마뉴엘 교회 앞에서의 감동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가장 많이 남는 것은 그 아름다움과 역사의 무게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가 동시에 가장 어두운 역사를 품고 있다. 그 공존을 불편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 도시를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이다.

남부의 환대와 남부의 복잡함

찰스턴 사람들은 친절하다. ‘남부의 환대(Southern Hospitality)’가 가장 잘 구현된 곳 중 하나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문을 잡아주고, 식당에서 서버가 손님을 ‘허니(Honey)’, ‘스윗하트(Sweetheart)’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면 따뜻하다.

동시에 찰스턴은 미국에서 인종 갈등의 역사가 가장 깊은 도시 중 하나다. 그 친절한 사람들의 조상 중에 노예를 소유한 이들이 있었고, 2015년에도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개인의 친절함과 사회 구조의 문제는 다른 층위에 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찰스턴이, 그리고 미국 남부가 온전히 보인다.

찰스턴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 아침, 손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도시를 봤는데, 찰스턴이 가장 오래 생각나는 도시가 될 것 같아요. 아름다운데 슬프고, 슬픈데 아름다워요.’ 그 말이 찰스턴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의 한 마디   찰스턴은 최소 2박을 권한다. 첫날은 역사 지구를 천천히 걸으며 레인보우 로, 교회들, 포트 섬터 페리 투어를 경험하라. 저녁은 리버 스트리트 레스토랑에서 쉬림프 앤 그릿츠를 꼭 먹어라. 둘째 날은 엠마뉴엘 교회와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박물관에 충분한 시간을 써라.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그리고 오후에 맥클라우즈 플랜테이션 투어를 예약해두라. 무겁고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찰스턴 여행을 완성한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돌아가면, 찰스턴의 절반을 잃고 오는 것이다.

찰스턴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3월~5월 (봄꽃·스폴레토 축제), 9월~11월 (가을). 여름(6~8월)은 덥고 습하며 허리케인 시즌

주요 명소

레인보우 로, 역사 지구 도보 투어, 포트 섬터(페리 투어), 엠마뉴엘 AME 교회,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박물관(IAAM), 시티 마켓

플랜테이션 투어

맥클라우즈 플랜테이션(역사 중심), 드레이튼 홀(건축 보존), 마그놀리아 플랜테이션(정원 유명). 사전 예약 권장

꼭 먹어야 할 것

쉬림프 앤 그릿츠, 로우컨트리 보일(새우·소시지·옥수수 삶기), 허쉬 퍼피(옥수수 반죽 튀김), 피칸 프랄린(사탕 과자)

추천 2일 코스

1일차: 역사 지구 도보(레인보우 로·교회들)→시티 마켓→포트 섬터 페리→저녁 쉬림프 앤 그릿츠

2일차: 엠마뉴엘 교회→IAAM 박물관(반나절)→맥클라우즈 플랜테이션

숙박 추천

역사 지구 내 부티크 호텔 권장. 비싸지만 걸어서 모든 곳 접근 가능. 예산 절감 시 도심 외곽 숙박 후 우버 이용

주의사항

여름 홍수 주의 (저지대 역사 지구 침수 가능). 플랜테이션 투어 예약 시 어느 측면에 초점을 두는지 확인 (노예 역사 vs 건축). 5~6월 스폴레토 페스티벌 기간 숙박 미리 예약

섹션 4 — 미국 북부 지역

침묵하는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Chapter 18. 일리노이 — 시카고

바람의 도시, 미국의 척추 — 뉴욕도 LA도 아닌 진짜 미국

시카고(Chicago)를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뉴욕이랑 다르네요.’ 맞다. 시카고는 뉴욕이 아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뉴욕과 비슷하게 크고 화려하고 다양한데, 분위기가 다르다. 느낌이 다르다. 어딘가 더 솔직하고, 더 실용적이며, 더 ‘미국 중부적’이다.

시카고는 미국의 척추다. 동부 해안의 화려함도, 서부 해안의 자유로움도 아닌, 미국의 실제 몸통이다. 미시간 호수를 옆에 두고 중서부 대평원을 등진 이 도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산업화의 심장이었다. 철도, 육류 가공, 철강, 시카고 상품 거래소. 미국이 세계 최강의 산업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시카고가 그 엔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카고는 재즈와 블루스가 남부에서 올라와 전 세계로 퍼져나간 도시이기도 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고, 오프라 윈프리가 자랐으며, 마이클 조던이 왕국을 세운 곳이다. 건축의 도시, 음악의 도시, 음식의 도시. 시카고는 너무 많은 것이 한곳에 있어서 한 번의 방문으로는 다 볼 수 없는 도시다.

1. 시카고라는 도시 — 왜 ‘바람의 도시’인가

시카고의 별명은 ‘바람의 도시(Windy City)’다.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강한 바람이 도시 전체를 휩쓸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실제로 시카고의 바람은 무시하기 어렵다. 겨울에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뉴욕보다도 더 춥게 느껴진다. 같은 기온이라도 체감이 다르다. 처음 오시는 한국 분들이 겨울 시카고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이 얇은 코트다.

그런데 ‘바람의 도시’라는 별명에 다른 기원이 있다는 설도 있다. 19세기 말 시카고의 정치인들이 너무 허풍이 심하다는 것을 비꼰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말만 많고 실속 없는 정치인들의 ‘빈말(hot air)’을 바람에 비유했다는 것. 두 가지 설 모두 시카고의 어떤 진실을 담고 있다. 실제로 거센 바람이 부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미국 정치에서 가장 두꺼운 파벌 정치의 도시이기도 하다.

시카고 인구는 약 270만 명으로 뉴욕, LA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미시간 호수 서쪽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시로, 해안선을 따라 미시간 애비뉴의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도시 전체 길이가 약 45킬로미터에 달한다. 한국 분들이 처음 보는 미시간 호수의 규모에 놀라시는 경우가 많다. 바다가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이 담수호가 사실 강수량 보충 없이는 시카고 수도 공급이 불가능할 것이다.

시카고의 역사 — 불 이후의 도시

1871년 10월 8일, 시카고 대화재(Great Chicago Fire)가 일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집 헛간의 소가 등불을 걷어차서 시작된 불이 이틀 동안 도시를 태웠다. 약 1만 7,000채의 건물이 불탔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었다.

그러나 시카고는 다시 일어섰다. 단순히 재건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도시로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Skyscraper)가 1885년 시카고에서 세워졌다. 화재로 빈 땅이 생기자 새로운 건축 기술과 철골 구조를 실험할 기회가 생겼고, 시카고 건축가들이 그 기회를 붙잡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층 빌딩 문화가 시카고 대화재 이후 재건 과정에서 탄생했다.

2. 시카고 건축 — 하늘을 찌르는 야망

시카고는 현대 건축의 발상지다. 1885년 홈 인슈어런스 빌딩(Home Insurance Building)이 세워지면서 ‘마천루 시대’가 시작되었다. 철골 구조와 엘리베이터의 결합이 건물을 하늘 높이 올릴 수 있게 했다. 그 기술이 시카고에서 처음 완성되었고, 뉴욕으로, 전 세계로 퍼졌다.

지금도 시카고는 건축의 도시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들이 도시 곳곳에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헬무트 얀(Helmut Jahn), 렘 쿨하스(Rem Koolhaas). 이 이름들의 작품들을 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시카고다. 시카고 건축 재단(Chicago Architecture Foundation)의 보트 투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투어 중 하나다. 시카고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강 양옆의 건물들을 보면서 건축 역사를 듣는 이 투어는, 건축에 관심 없는 분들도 빠져들게 만든다.

밀레니엄 파크와 클라우드 게이트

2004년에 완공된 밀레니엄 파크(Millennium Park)는 시카고의 새로운 심장이다. 미시간 애비뉴 옆, 미시간 호수 앞에 자리 잡은 이 공원의 중심에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있다.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만든 이 거대한 강철 콩 모양의 조각은 높이 10미터, 무게 110톤. 반짝이는 표면이 주변 도시와 하늘을 왜곡해서 반사한다.

‘더 빈(The Bean)’, 즉 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조각 앞에 서면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는데, 그 왜곡된 반사 속에 시카고 스카이라인이 함께 담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냥 큰 조각이겠지 하다가, 가까이 다가가 그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도시를 보는 순간 탄성을 지른다. 왜 이 조각이 시카고의 명소가 되었는지를 그 순간 이해한다.

밀레니엄 파크는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야외 음악 공연장 프리츠커 파빌리온 (Pritzker Pavilion)에서는 여름 내내 무료 콘서트가 열린다. 시민들이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음악을 듣는 그 장면이 시카고의 가장 시카고다운 모습 중 하나다.

3. 미시간 애비뉴와 매그니피센트 마일

시카고의 상징적인 쇼핑 거리, 미시간 애비뉴(Michigan Avenue)의 시카고강 북쪽 구간을 ‘매그니피센트 마일(Magnificent Mile)’이라고 부른다. 약 2킬로미터에 걸쳐 세계적인 백화점, 명품 매장, 호텔,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뉴욕의 5번가, LA의 로데오 드라이브와 함께 미국 3대 쇼핑 거리로 꼽힌다.

그런데 이 거리의 진짜 매력은 쇼핑이 아니다. 거리 자체가 아름답다. 시카고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양쪽으로 바라보이는 빌딩들의 모습,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리버워크,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미시간 호수. 시카고가 건축의 도시임을 이 거리에서 실감한다.

시카고 리버워크

시카고강(Chicago River)을 따라 조성된 리버워크(Riverwalk)는 시카고에서 가장 활기찬 야외 공간이다. 샌안토니오의 리버 워크처럼 강변에 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카약을 빌릴 수 있으며, 여름에는 강변 콘서트가 열린다. 시카고강은 세계에서 독특한 강이다. 원래 미시간 호수로 흘러들던 이 강의 흐름을 1900년 공학 기술로 역전시켜 반대 방향으로 흐르게 했다. 도시 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강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그 대담한 공학적 결정이 가능했던 것이 시카고다.

매년 성 패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 3월 17일)에 시카고는 강을 초록색으로 물들인다. 특수 염료를 강에 투입해 초록색으로 만드는 이 전통은 1962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초록색 시카고강과 양쪽의 빌딩들. 이 날 시카고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도시가 된다.

4. 시카고 블루스와 재즈 — 남부에서 올라온 음악

시카고는 미국 음악 역사에서 뉴올리언스, 멤피스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도시다. 20세기 초반, 미시시피 델타 지방의 흑인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북부로 대이동(Great Migration)했을 때, 그 목적지 중 하나가 시카고였다. 그들이 남부에서 가져온 블루스가 시카고의 전기 기타와 만나 ‘시카고 블루스(Chicago Blues)’가 되었다.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g Wolf), 리틀 월터(Little Walter). 이 이름들이 시카고 블루스를 만들었다. 음향 증폭 기술의 발전과 함께 블루스는 더 크고 더 전기적으로 변했다. 그 시카고 블루스가 이후 록큰롤과 영국 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롤링 스톤스, 에릭 클랩튼, 레드 제플린이 시카고 블루스에서 배웠다. 시카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록 음악이 없었을 것이다.

블루스 바 투어

시카고에서 블루스를 경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쪽 링컨 파크(Lincoln Park) 지역이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의 블루스 바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버디스 가이 레던즈(Buddy Guy’s Legends), 킹스턴 마인스(Kingston Mines), 앤디스 재즈 클럽(Andy’s Jazz Club). 이 바들에서 매일 밤 라이브 블루스와 재즈가 연주된다.

한국 분들이 블루스 바에 처음 오시면 처음에는 어색해하신다. 생소한 음악이고, 영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고, 왜 이 음악이 중요한지 잘 모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맥주 한 잔 들고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달라진다. 블루스의 리듬이 몸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 들으면 또 달라진다. 고통을 음악으로 만든 것이 블루스다. 그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5. 시카고 정치 — 미국 정치의 실험실

시카고는 미국에서 정치가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도시 중 하나다. ‘시카고 머신(Chicago Machine)’이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동안 시카고 민주당이 운영한 강력한 파벌 정치 조직이다. 시의원부터 판사까지, 공직 후보들이 모두 이 ‘머신’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정치 조직처럼 움직였다. 그 조직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죽은 사람도 민주당에 투표한다(Even dead people vote Democrat in Chicago)’는 농담이 생길 정도였다.

그 정치 문화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를 키웠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오바마는 시카고 남쪽 사우스 사이드에서 커뮤니티 조직가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2008년 대통령이 되었다. 시카고의 거친 정치 환경에서 단련된 그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것이다.

오바마의 시카고

시카고 남쪽 하이드 파크(Hyde Park) 지역은 오바마의 동네다.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 근처 이 지역에서 오바마가 살았고, 커뮤니티 조직가로 일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도 집을 유지했다. 지금 하이드 파크에는 오바마 대통령 센터(Obama Presidential Center)가 건설 중이다. 이 센터가 완공되면 하이드 파크는 미국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전날인 2009년 1월 19일, 시카고 그랜트 파크(Grant Park)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 오바마의 당선 연설을 들었다. 그 장소도 시카고에 있다. ‘에스, 위 캔(Yes, We Can)’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던 그 공원. 지금도 그랜트 파크를 걷다 보면 그날의 역사적인 순간이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6. 시카고 음식 — 딥 디쉬 피자에서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까지

시카고는 미국에서 음식 문화가 가장 독창적인 도시 중 하나다. 뉴욕 피자와 경쟁하는 딥 디쉬 피자(Deep Dish Pizza), 세계 유일의 독특한 조합인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 이탈리아 비프 샌드위치(Italian Beef Sandwich). 이것들이 시카고를 대표하는 음식들이다.

딥 디쉬 피자 — 뉴욕과의 영원한 논쟁

시카고 딥 디쉬 피자는 뉴욕 피자와는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두꺼운 케이크 틀 같은 그릇에 도우를 깔고, 치즈를 먼저 넣고, 그 위에 토마토 소스를 올린다. 두께가 5~7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피자’는 포크와 나이프로 먹어야 한다. 첫 번째 접시를 다 먹으면 보통 배가 부르다. 두 번째 조각을 먹는 사람은 드물다.

뉴욕 사람들은 이것이 피자가 아니라 파이라고 한다. 시카고 사람들은 뉴욕 피자는 너무 얇아서 제대로 된 피자가 아니라고 한다. 이 논쟁은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둘 다 맛있습니다. 다만 기대치를 맞추고 드세요. 시카고 딥 디쉬는 피자라기보다 치즈와 토마토가 가득 찬 파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맛있게 드실 수 있어요.’

유명한 딥 디쉬 피자 집으로는 루 말나티스(Lou Malnati’s), 지노스 이스트(Gino’s East), 피제리아 우노(Pizzeria Uno)가 있다. 피자 하나를 주문하고 25~35분을 기다려야 한다. 주문 받으면 그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 분들이 처음 이 피자를 드시면 반응이 두 가지다. ‘이렇게 두꺼운 피자가 있어요?’ 그리고 ‘치즈가 너무 많지 않아요?’ 둘 다 맞는 말이다. 시카고 딥 디쉬는 그런 음식이다.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 — 절대 케첩을 넣지 마라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는 미국에서 가장 의견이 분분한 핫도그다. 양귀비씨 뿌린 번(Poppy seed bun)에 소고기 핫도그를 얹고 황색 머스터드, 잘게 썬 양파, 토마토, 피클, 매운 피망, 셀러리 소금을 올린다. 이 모든 재료가 핫도그 위에 ‘정원(Garden)’처럼 쌓인다.

그리고 절대로 케첩을 넣지 않는다. 케첩을 요청하면 시카고 핫도그 전문점에서는 거절하거나 핀잔을 준다. ‘케첩은 어린이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것이 시카고 스타일의 철학이다. 처음 드시는 분들은 이 많은 재료의 조합이 낯설지만, 한 입 먹으면 각 재료가 제 역할을 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을 느낀다. 뉴욕 피자 한 조각처럼, 시카고 핫도그 하나가 이 도시의 자부심이다.

7. 네이버후드 시카고 — 진짜 도시는 동네에 있다

시카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운타운 루프(Loop) 지역을 넘어 동네들을 봐야 한다. 시카고는 77개의 공식 동네(Neighborhood)로 이루어져 있다. 각 동네가 독특한 개성과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다양한 동네들의 모음이 시카고다.

폴란드인의 동네, 멕시코인의 동네, 그리고 차이나타운

시카고는 20세기 초 유럽 이민자들의 중요한 목적지였다.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아일랜드, 체코에서 온 이민자들이 각자의 동네를 만들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동네 이름과 음식 문화, 교회에 남아 있다. 폴란드계 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가 바르샤바 다음이 시카고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필슨(Pilsen)은 시카고에서 가장 활기찬 멕시코계 동네다. 거리 곳곳에 벽화가 가득하고, 타코와 멕시코 빵집이 즐비하다. 시카고 미술관의 분점인 내셔널 멕시칸 아트 뮤지엄(National Museum of Mexican Art)도 이 동네에 있다. 필슨도 최근 젠트리피케이션의 물결에 직면해 있다. 예술가들이 들어오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원래 멕시코계 주민들이 밀려나는 과정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차이나타운은 다운타운 남쪽에 있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만큼 크지는 않지만, 정통 중국 음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활기찬 커뮤니티다. 딤섬 식당들이 특히 유명하다. 주말 아침 차이나타운의 딤섬은 시카고에서 가장 긴 줄 중 하나를 만들어낸다.

사우스 사이드 — 시카고의 다른 얼굴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는 미국에서 가장 오해받는 지역 중 하나다. 높은 범죄율, 빈곤, 총기 폭력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미국 미디어에서 종종 도시의 실패를 상징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우스 사이드는 오바마의 고향이고, 시카고 블루스의 심장이었으며, 강력한 흑인 문화 커뮤니티의 본거지다. 남부에서 올라온 흑인 대이동의 목적지였고,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미국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사우스 사이드의 높은 범죄율과 빈곤은 수십 년간의 구조적 차별과 투자 외면의 결과다. 그것을 그 지역 사람들의 문제로 보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것이다.

8. 시카고의 한인 커뮤니티

시카고의 한인 커뮤니티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70~80년대 미국 이민 붐 시절에 한인들이 시카고 북쪽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지금 한인들은 주로 시카고 교외 지역인 글렌뷰(Glenview), 놀스브룩(Northbrook), 나일스(Niles) 그리고 시카고 북쪽 올바니 파크(Albany Park) 지역에 분포해 있다.

올바니 파크는 한때 시카고에서 가장 활기찬 코리아타운이었다. 하지만 2세대 한인들이 교외로 이주하고 다른 이민자 커뮤니티들이 들어오면서 지금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함께 사는 동네가 되었다. 한국 식당과 마트는 여전히 있지만, 예전만큼 한인 집중도는 높지 않다.

시카고 한인 커뮤니티의 특징 중 하나는 한인 개신교 교회들의 강한 영향력이다. 애틀랜타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커뮤니티의 사회적 중심 역할을 한다. 특히 1.5세대와 2세대 한인들을 위한 영어 예배 한인 교회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시카고에서 만난 교민들의 이야기

시카고에서 오래 사신 교민 분들에게 이 도시의 매력을 물으면 공통적인 답이 나온다. ‘뉴욕처럼 압도적이지 않으면서도 대도시의 것을 다 갖춘 곳’이라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과 공연 예술, 다양한 음식 문화, 미시간 호수의 자연. 그것들이 뉴욕보다 덜 비싼 가격에 가능하다. 물론 겨울 추위가 단점이지만, 그것을 감수할 만하다는 것이 시카고를 선택한 교민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뉴욕 사람들은 시카고를 작은 뉴욕이라고 해요. 저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시카고는 뉴욕의 축소판이 아니에요. 시카고는 그냥 시카고예요. 더 솔직하고, 덜 거만하고, 더 미국적이에요.’ 그 말이 정확하다. 시카고는 뉴욕을 흉내 내지 않는다. 시카고는 그냥 시카고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시카고

시카고가 보여주는 미국의 중심

나는 시카고를 ‘미국의 허리’라고 부른다. 동부의 역사와 서부의 자유 사이에서 미국의 실제 몸통이 되는 곳. 뉴욕이 미국의 얼굴이라면, LA가 미국의 꿈이라면, 시카고는 미국의 현실이다. 산업, 노동, 이민, 정치, 음악, 음식. 미국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도시가 시카고다.

동부 여행에서 보스턴과 뉴욕을 보고, 남부에서 뉴올리언스와 애틀랜타를 보고, 서부에서 LA와 샌프란시스코를 본 다음 시카고에 오면, 그 모든 도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뉴올리언스의 블루스가 시카고로 올라왔고, 시카고의 이민자들이 미국 산업을 만들었으며, 그 산업이 미국의 중서부를 먹여 살렸다. 시카고는 미국이라는 퍼즐의 중심 조각이다.

겨울 시카고와 여름 시카고

시카고를 언제 방문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도시를 경험한다. 여름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활기차고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미시간 호수 해변에는 수영객들이 가득하고, 밀레니엄 파크에서 무료 콘서트가 열리고, 시카고강에서 카약을 즐기고, 야외 레스토랑들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이 도시가 추운 겨울 내내 품어왔던 에너지가 여름에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 같다.

반면 겨울 시카고는 혹독하다.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뼈까지 파고든다. 그런데 그 겨울 시카고에도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눈 쌓인 미시간 애비뉴의 클리스마스 불빛들, 얼어붙은 미시간 호수 표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를 들고 걷는 사람들. 시카고는 겨울을 이기는 법을 알고 있다. 실내 문화가 그렇게 발달한 것도 긴 겨울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굿맨 극장, 세컨드 시티 코미디 클럽. 이것들이 겨울 시카고가 준 선물이다.

저자의 한 마디   시카고는 최소 3박을 권한다. 하루는 건축 투어 보트를 타고 루프 지역을 걸으며 밀레니엄 파크와 클라우드 게이트를 보라. 하루는 시카고 미술관, 딥 디쉬 피자, 매그니피센트 마일 쇼핑. 마지막 날은 동네 탐험이다. 필슨이나 라이언빌(Lakeview) 같은 동네를 걸으며 진짜 시카고를 만나라. 그리고 어느 날이든 저녁에는 블루스 바를 찾아가라. 시카고의 밤은 블루스로 마무리해야 한다. 겨울에 온다면 레이어드 옷차림 필수. 바람이 옷을 뚫고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시카고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6월~9월 (미시간 호수 해변·야외 콘서트). 겨울(12~3월)은 혹독하게 춥고 바람이 강함. 봄(4~5월)과 가을(10월)은 선선하고 쾌적

주요 명소

밀레니엄 파크(클라우드 게이트), 시카고 건축 보트 투어, 시카고 미술관, 매그니피센트 마일, 네이비 피어(Navy Pier), 그랜트 파크

꼭 먹어야 할 것

딥 디쉬 피자(루 말나티스·지노스 이스트),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케첩 절대 금지),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Al’s Beef), 가렛 팝콘(치즈+캐러멜 믹스)

블루스·재즈

버디 가이즈 레전드 (Buddy Guy’s Legends), 킹스턴 마인스(Kingston Mines), 앤디스 재즈 클럽(Andy’s Jazz Club)

추천 3일 코스

1일차: 건축 보트 투어→밀레니엄 파크→매그니피센트 마일→딥 디쉬 피자

2일차: 시카고 미술관(반나절)→리버워크→네이비 피어→블루스 바 저녁

3일차: 필슨 벽화 투어→차이나타운→올바니 파크 한국 식당

한인 커뮤니티

올바니 파크(Albany Park, 북쪽·코리아타운 흔적), 스코키(Skokie), 나일스 (Niles). H마트 시카고 지점 있음

겨울 주의

체감 온도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감. 귀마개·목도리·방수 장갑 필수. 롱패딩 권장. 미시간 호수 바람은 방풍 기능 있는 겉옷이어야 효과 있음

Chapter 19. 미시간 — 디트로이트

자동차 왕국의 흥망, 폐허 위에서 다시 쓰는 이야기

디트로이트(Detroit)는 미국에서 가장 솔직한 실패를 보여주는 도시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용감하게 다시 일어서려는 도시이기도 하다. 한때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고, 세계 자동차 산업의 심장이었으며, 모타운(Motown) 음악의 발상지였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쇠락했다. 공장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떠났으며, 한때 번성하던 거리가 폐허로 변했다. 2013년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도시 파산을 선언했다.

처음 디트로이트를 방문하는 분들이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거리 곳곳에 버려진 건물들이 있고, 한때 화려했던 극장이 잡초로 덮여 있으며, 넓은 땅이 빈 채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황폐함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폐허가 된 공장 터에 도시 농장이 생겼고, 빈 건물에 예술가들이 들어왔으며, 젊은이들이 오히려 이 도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

나는 디트로이트를 방문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도시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미국의 교훈을 보여주는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산업화의 절정에서 쇠락으로, 쇠락에서 다시 재건으로. 디트로이트의 이야기는 성장과 쇠퇴,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것이 미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 디트로이트라는 도시 — 자동차가 만들고 자동차가 무너뜨린

디트로이트는 미시간(Michigan) 주 남동쪽 끝, 캐나다 온타리오 주와 디트로이트강(Detroit River)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도시다. 인구는 현재 약 63만 명이지만, 1950년대 최전성기에는 185만 명이 넘었다. 인구가 3분의 1로 줄었다. 이것이 디트로이트가 겪은 쇠락의 규모다.

디트로이트의 역사는 자동차와 불가분이다. 1903년 헨리 포드(Henry Ford)가 포드 자동차를 설립한 곳이 디트로이트다. 제너럴 모터스(GM), 크라이슬러도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모터 시티(Motor City)’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초중반, 전 세계에서 팔리는 자동차의 절반 이상이 디트로이트에서 만들어졌다. 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남부의 흑인 노동자들, 남유럽 이민자들, 아팔래치아 산맥의 백인 농촌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자동차가 디트로이트를 만들었듯이, 자동차가 디트로이트를 무너뜨렸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일본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도요타, 혼다, 닛산. 연비가 좋고 품질이 높은 일본 차들 앞에 디트로이트의 대형 차들이 경쟁력을 잃었다. 공장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사라졌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떠났다. 사람들이 떠나자 도시 세수가 줄었다. 세수가 줄자 공공 서비스가 악화되었다. 그 악순환이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러스트 벨트 — 녹슨 공장들의 지대

디트로이트를 포함한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의 쇠락한 산업 지역을 ‘러스트 벨트(Rust Belt)’라고 부른다. 녹슨 공장들의 지대. 한때 미국 산업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의 철강, 자동차, 석탄 산업이 탈공업화와 세계화의 물결에 쓸려 가면서 남긴 풍경이다.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버펄로, 밀워키. 이 도시들이 모두 러스트 벨트의 일부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 정치 지형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때 민주당의 노동자 기반이었던 이 지역이 2016년 선거에서 대거 공화당으로 돌아섰다. 탈산업화로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가 정치 지형을 바꾼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이야기는 도시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국 정치 변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 헨리 포드와 포드 자동차 — 세상을 바꾼 조립 라인

헨리 포드(Henry Ford)는 단순히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아니다. 현대 산업 사회의 형태 자체를 바꾼 사람이다. 1913년 포드가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 공장에 도입한 이동식 조립 라인(Moving Assembly Line)은 제조업의 혁명이었다. 분업화된 공정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해 한 명의 노동자가 한 가지 작업만 반복하도록 한 것이다.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그 결과 자동차 가격이 급격히 떨어졌다. 포드 모델 T의 가격이 1908년 825달러에서 1924년 260달러로 내려갔다. 부자들의 장난감이었던 자동차가 일반 노동자도 살 수 있는 물건이 된 것이다. 포드는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당시 업계 평균의 두 배인 하루 5달러를 지불했다. 이유가 있었다. ‘내 노동자들이 내 차를 살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이기도 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야 시장이 커진다는 통찰이었다.

헨리 포드의 빛과 그늘

헨리 포드는 천재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깊은 결함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악명 높다. 그가 소유한 신문 디어본 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에 수년간 반유대주의 기사들을 실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헨리 포드의 초상화를 집무실에 걸어두고 그를 ‘영감(inspiration)’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포드는 히틀러로부터 독일 최고 민간인 훈장을 받았다. 그 역사적 사실이 포드 자동차 박물관 어딘가에 적혀 있다.

나는 손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드릴 때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것과 끔찍한 것이 같은 사람 안에 있을 수 있다.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은 세상을 바꿨다. 그리고 그 사람의 반유대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학살의 영감이 되었다. 두 가지 모두 포드다. 우리는 그 양면을 함께 알아야 한다.

3. 헨리 포드 박물관 — 미국 혁신의 아카이브

디어본(Dearborn)에 있는 헨리 포드 박물관(The Henry Ford Museum of American Innovation)은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박물관 중 하나다. 자동차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혁신의 역사 전체를 담고 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토머스 에디슨의 실험실, 로자 파크스가 앉아 있었던 버스,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극장 의자,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저격당한 리무진. 이것들이 모두 한 박물관 안에 있다.

‘로자 파크스의 버스’는 특히 강렬하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는 버스 뒷자리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거부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졌고, 마틴 루터 킹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미국 민권 운동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 역사적인 버스가 지금 이 박물관 안에 있다. 관람객들이 버스 안에 올라타 로자 파크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볼 수 있다.

그린필드 빌리지 — 역사를 걸어 다니다

헨리 포드 박물관 옆에 그린필드 빌리지(Greenfield Village)가 있다. 미국 각지에서 역사적인 건물들을 실제로 옮겨와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다. 토머스 에디슨의 멘로 파크(Menlo Park) 실험실이 뉴저지에서 통째로 옮겨져 있고,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 가게가 오하이오에서 옮겨져 있으며, 링컨이 어린 시절 살던 통나무집도 있다.

이 건물들 사이로 걷다 보면 미국 역사가 하나의 마을처럼 펼쳐진다. 1800년대 농촌 마을, 19세기 말 산업 시대의 공장, 20세기 초 발명가들의 실험실이 시간 순서 없이 뒤섞여 있다. 현대 미국을 만든 발명과 혁신의 현장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것이다. 한국 분들이 이 빌리지를 걸으면서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미국이 이렇게 기록을 잘 보존하는 나라인지 몰랐어요.’ 맞다. 미국은 자신의 물질적 역사를 보존하는 데 진심인 나라다.

4. 모타운 — 흑인 음악이 세계를 정복한 방식

1959년, 베리 고디(Berry Gordy)가 디트로이트의 작은 집에서 모타운 레코드(Motown Records)를 설립했다. 800달러를 빌려서 시작한 이 레이블이 이후 세계 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슈프림스(The Supremes), 마빈 게이(Marvin Gaye),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잭슨 파이브(Jackson 5),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 이 이름들이 모두 모타운 출신이다.

모타운이 혁명적이었던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베리 고디는 흑인 음악을 백인 주류 시장에 판매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1960년대 인종 분리가 여전했던 시절, 모타운의 음악은 흑인과 백인 모두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모두를 위한 음악 (Music for Everyone)’이 모타운의 슬로건이었다. 음악이 인종의 벽을 허무는 다리가 된 것이다.

히츠빌 USA — 음악이 탄생한 집

모타운의 시작이 된 그 작은 집이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다. 히츠빌 USA(Hitsville USA)라는 이름의 이 건물이 모타운 박물관(Motown Museum) 이 되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2층 목조 주택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레코딩이 이루어졌던 스튜디오 A가 보존되어 있다. 슈프림스가 ‘Where Did Our Love Go’를 녹음한 마이크, 마빈 게이가 섰던 스튜디오 바닥. 그 공간에 서면 60년 전 그 음악들이 만들어진 순간이 떠오른다.

가이드 투어가 매우 열정적이다. 대부분 모타운의 역사를 몸으로 아는 분들이 안내한다. 음악을 틀어주고, 무대 위에 세워주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분들이 스티비 원더나 마이클 잭슨을 알고 계신 분들은 ‘그 음악이 여기서 시작됐구나’라고 감탄하신다. 음악을 모르시는 분들도 그 작은 집에서 세계 음악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집중하신다.

모타운과 민권 운동

모타운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마빈 게이의 1971년 앨범 ‘What’s Going On’은 베트남 전쟁, 빈곤, 환경 파괴,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노래했다. 당시 베리 고디는 정치적 주제를 피하길 원했지만, 마빈 게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발매된 이 앨범은 미국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스티비 원더도 마찬가지였다. 맹인이었지만 그의 음악은 사회를 향한 눈을 뜨고 있었다. ‘Living for the City’, ‘Happy Birthday(마틴 루터 킹 기념일을 법정 공휴일로 만들기 위한 캠페인 노래)’. 모타운의 음악가들은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디트로이트의 공장 노동자 가정에서 자란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목소리를 냈다.

5. 디트로이트의 쇠락 — 폐허가 된 도시

1967년 7월 23일, 디트로이트에서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이 허가 없이 영업하는 흑인 사교 클럽을 단속하던 중 충돌이 시작되었고, 5일간 43명이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2,000채가 넘는 건물이 불탔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연방군을 파견했다. 이 폭동 이후 디트로이트에서 백인들의 대규모 교외 이주(White Flight)가 시작되었다.

교외로 떠난 백인 중산층의 세금이 줄어들자 도시 재정이 악화되었다. 학교, 도로, 공원, 경찰. 모든 공공 서비스가 나빠졌다. 공공 서비스가 나빠지자 남아있던 중산층도 떠났다. 그 악순환이 디트로이트를 40년에 걸쳐 무너뜨렸다. 2013년 디트로이트는 연방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부채가 약 180억 달러. 미국 도시 파산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데트로이트의 폐허 — 루인포른

디트로이트의 쇠락을 상징하는 것이 ‘루인포른(Ruin Porn)’이라 불리는 폐허 사진들이다. 버려진 미시간 중앙역(Michigan Central Station), 무너져가는 고딕 양식의 교회들, 잡초에 덮인 공장 터들. 이 사진들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디트로이트는 ‘미국 도시 쇠락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 폐허들을 단순히 실패의 증거로만 보는 것은 불완전한 시각이다. 그 폐허들은 한때 수만 명이 일하고 살았던 공간들이다. 무너져가는 미시간 중앙역은 1913년에 지어진 웅장한 보자르(Beaux-Arts) 양식 건물로, 전성기에는 매일 수천 명의 승객이 드나들었다. 그 건물의 폐허 앞에 서면 그 영광과 몰락이 동시에 느껴진다. 루인포른이 관광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폐허가 말하는 역사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6. 디트로이트의 부활 — 폐허 위에서

2013년 파산 선언 이후 많은 사람들이 디트로이트의 종말을 예언했다. 그런데 그 이후 10년간 예상과 다른 일들이 일어났다. 파산 절차가 비교적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도시는 부채를 정리하고 새 출발을 했다. 자동차 회사들이 다운타운으로 돌아왔다. 젊은 기업가와 예술가들이 싼 임대료를 찾아 디트로이트로 왔다.

마이크 일리치(Mike Ilitch)와 댄 길버트(Dan Gilbert) 같은 지역 사업가들이 수십억 달러를 다운타운 재개발에 투자했다. 퀴큰 론스 아레나(Quicken Loans Arena, 지금은 리틀 시저스 아레나)가 다운타운에 세워졌고, 그 주변으로 레스토랑과 바들이 들어섰다. 버려진 공장 터에 도시 농장이 생겼다.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도시 농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콰메 킬패트릭에서 마이크 더건까지 — 정치의 변화

디트로이트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정치를 빠뜨릴 수 없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시장이었던 콰메 킬패트릭(Kwame Kilpatrick)은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결국 연방 교도소에 갔다. 그의 재임 기간이 디트로이트 쇠락의 가장 어두운 시기와 겹쳤다.

2014년 마이크 더건(Mike Duggan)이 시장이 되었다. 디트로이트 역사상 50년 만에 처음으로 당선된 백인 시장이었다. 흑인 인구가 80퍼센트인 도시에서 백인 시장이 선출된 것이다. 그것은 인종보다 능력을 선택한 것이었고, 디트로이트가 정치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더건 시장 재임 기간 동안 가로등이 켜지고, 도로가 정비되고, 인구 감소가 멈췄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방향이 바뀐 것이다.

미시간 중앙역의 부활

디트로이트 쇠락의 가장 강렬한 상징이었던 미시간 중앙역(Michigan Central Station)이 2023년 복원을 완료하고 포드 자동차의 새 기술 캠퍼스로 문을 열었다. 1988년부터 30년 넘게 방치된 채 디트로이트 폐허의 아이콘이었던 이 건물이,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는 혁신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변화가 주는 상징성이 크다. 헨리 포드가 내연기관 자동차로 디트로이트를 만들었고, 내연기관 자동차의 쇠락이 디트로이트를 무너뜨렸으며, 이제 전기차라는 새로운 자동차가 디트로이트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미시간 중앙역의 복원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방향이 보인다.

7. 디트로이트 테크노 — 폐허에서 태어난 미래 음악

모타운이 1960~70년대 디트로이트 음악이라면, 1980년대 후반 디트로이트에서 또 하나의 음악 혁명이 일어났다. 테크노(Techno) 음악이다. 도시가 무너지고 공장이 문을 닫던 시절, 디트로이트의 흑인 청년들이 버려진 창고에서 전자 음악을 만들었다.

후안 앳킨스(Juan Atkins), 데릭 메이(Derrick May), 케빈 선더슨(Kevin Saunderson). ‘신성한 삼위일체(Belleville Three)’라 불리는 이 세 명이 디트로이트 테크노의 창시자들이다. 기계적인 반복 비트, 미래적인 사운드, 공장 기계 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리듬. 쇠락하는 공업 도시에서, 그 쇠락의 소리를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베를린, 런던, 암스테르담의 클럽 문화를 만들었다. 지금 전 세계 클럽에서 울리는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의 뿌리가 디트로이트의 버려진 창고에 있다. 재즈가 뉴올리언스에서, 블루스가 멤피스에서, 힙합이 브롱스에서 태어난 것처럼, 테크노는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미래적인 음악이 나온 것이다.

8. 디트로이트의 음식과 문화

코니 아일랜드 핫도그 — 디트로이트의 소울 푸드

디트로이트의 대표 음식은 코니 아일랜드 핫도그(Coney Island Hot Dog)다.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와는 다르다. 소고기 핫도그 위에 미트 소스(고기 칠리), 머스터드, 잘게 썬 양파를 올린다. 디트로이트의 그리스 이민자들이 20세기 초 뉴욕의 코니 아일랜드 스타일 핫도그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변형해 만든 것이다.

다운타운에 라파예트 코니 아일랜드(Lafayette Coney Island)와 아메리칸 코니 아일랜드(American Coney Island)가 나란히 붙어 있다. 두 가게는 형제가 1917년 함께 시작했다가 갈라선 것인데, 100년이 넘도록 같은 건물 벽을 공유하며 경쟁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맛있냐는 논쟁이 디트로이트에서 아직도 계속된다.

디트로이트 예술 지구 — 폐허가 갤러리가 되다

디트로이트의 쇠락 속에서 역설적으로 번성한 것이 예술 커뮤니티다. 싼 임대료를 찾아온 예술가들이 폐허가 된 창고와 공장에 스튜디오와 갤러리를 만들었다. 미드타운(Midtown) 지역에 디트로이트 예술 지구가 형성되었다. 디트로이트 현대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Detroit), 스탠다드 갤러리, 인터내셔널 갤러리.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Detroit Institute of Arts, DIA)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 중 하나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1932~33년에 그린 대형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Detroit Industry Murals)’가 특히 유명하다.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을 그린 이 벽화는 산업 시대 디트로이트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가 파산 직전이었을 때 이 미술관의 소장품을 팔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논란이 이 미술관이 디트로이트에서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9. 한국인의 눈으로 본 디트로이트

한국 자동차와 디트로이트의 관계

디트로이트를 방문하는 한국 분들에게 이 도시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이 이름들이 디트로이트의 쇠락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1980~90년대 미국 시장에서 일본 차에 이어 한국 차가 경쟁력을 높여가면서, 디트로이트의 미국 자동차들이 시장 점유율을 잃었다. 디트로이트가 무너지는 데 한국 자동차도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경쟁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자유 시장에서 경쟁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쟁의 결과로 수십만 명의 디트로이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사실도 외면할 수 없다.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을 때, 그 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를 디트로이트가 보여준다.

지금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생산 시설을 늘리고 있다. 조지아 주에 전기차 공장을 세웠다. 한국 자동차가 미국 일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양쪽에 더 나은 방향이다. 디트로이트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이 그 방향을 만들었을 것이다.

쇠락과 재건 — 보편적인 이야기

디트로이트의 이야기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산업화, 쇠락, 재건. 이 순환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왔다. 한국도 산업화의 기적 뒤에 IMF 경제 위기라는 충격을 경험했다. 철강, 조선, 전자 산업이 부흥했다가 경쟁에 직면했다. 도시들이 성장했다가 인구 감소로 씨름한다. 그 경험이 디트로이트와 다르지 않다.

디트로이트가 보여주는 것은 쇠락 자체가 아니라 쇠락 이후 어떻게 하느냐다. 포기하는 것과 다시 시작하는 것. 미시간 중앙역이 30년의 폐허 끝에 다시 문을 열었듯, 답은 거기 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시간이 걸리더라도 방향을 잃지 않는 것. 디트로이트가 지금 그 답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한 마디   디트로이트는 기대를 조정하고 방문하라. 화려한 관광 도시가 아니다. 그러나 그 기대를 조정하고 오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는다. 헨리 포드 박물관은 반나절은 써야 한다. 모타운 박물관은 1시간이면 되지만 그 한 시간이 강렬하다. 미드타운을 걸으면서 폐허와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풍경을 눈에 담아라. 저녁에는 코니 아일랜드 핫도그와 현지 맥주 한 잔. 사람들이 떠난 도시가 어떻게 다시 채워지는지를 이 도시에서 배운다. 디트로이트는 관광지가 아니라 교과서다.

디트로이트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5월~10월. 겨울은 오대호에서 불어오는 눈보라(‘호수 효과 눈’)로 매우 험함. 여름은 쾌적하고 야외 이벤트 풍부

주요 명소

헨리 포드 박물관·그린필드 빌리지(디어본), 모타운 박물관(히트스빌 USA),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DIA), 미시간 중앙역(포드 캠퍼스), 밸렛 파크(시내 전망)

꼭 먹어야 할 것

코니 아일랜드 핫도그(라파예트 or 아메리칸·다운타운), 그리스식 음식(디어본), 디트로이트 스타일 피자(네모난 팬 피자)

음악

세인트 앤드류스 홀(St. Andrews Hall·다운타운·라이브 음악), 무버 음악 축제(Movement Festival·5월 메모리얼 데이 주말·전 세계 테크노 성지순례)

추천 2일 코스

1일차: 헨리 포드 박물관·그린필드 빌리지(반나절 이상)→코니 아일랜드 핫도그→모타운 박물관

2일차: 미시간 중앙역 외관→DIA 미술관→미드타운 예술 지구 산책

캐나다 윈저 방문

디트로이트강 건너 캐나다 온타리오 주 윈저(Windsor)는 터널 또는 앰배서더 다리로 20분. 여권 필수

치안 주의

다운타운·미드타운·디어본은 비교적 안전. 사우스 사이드 일부 구역은 방문 주의. 야간 혼자 다니는 것은 피할 것

Chapter 20. 와이오밍·몬태나 — 옐로스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아지는가 — 지구가 살아있다는 증거

옐로스톤(Yellowstone)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말을 잃었다. 그랜드캐년 앞에서 말을 잃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랜드캐년이 시간의 거대함 앞에서 인간을 작게 만든다면, 옐로스톤은 지구 자체가 살아있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을 놀라게 한다. 땅에서 뜨거운 물이 솟구치고, 진흙이 부글부글 끓으며, 무지개색 온천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이것이 자연인가, 아니면 다른 행성인가.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이 옐로스톤이다.

옐로스톤은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1872년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서명한 법으로 지정되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하지 않고 보존하겠다’는 선언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정이 이후 전 세계 국립공원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한국의 국립공원도, 그 정신적 뿌리를 따라가면 이 옐로스톤까지 닿는다.

나는 옐로스톤을 한국 분들과 함께 방문할 때마다 같은 것을 느낀다. 이 자연 앞에서는 언어가 필요 없다. 영어가 서툴어도 상관없고, 미국 역사를 몰라도 상관없다. 그냥 서 있으면 된다. 지구가 살아있다는 것이, 인간보다 훨씬 오래된 힘이 이 땅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그 느낌이 옐로스톤이 주는 선물이다.

1. 옐로스톤이라는 곳 — 슈퍼볼케이노 위에 세워진 공원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와이오밍(Wyoming), 몬태나(Montana), 아이다호 (Idaho) 세 주에 걸쳐 있다. 면적은 약 8,983평방킬로미터로, 서울의 약 15배에 해당한다. 이 광대한 공원 안에 세계 간헐천(Geyser)의 절반 이상이 있고, 수천 개의 온천과 진흙 웅덩이, 폭포, 협곡, 야생동물이 있다.

옐로스톤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땅 아래에 있다. 옐로스톤 아래에는 ‘슈퍼볼케이노(Supervolcano)’라 불리는 거대한 마그마 열점(Hotspot)이 있다. 지각 아래의 뜨거운 마그마가 지표 가까이 있어 땅을 데운다. 그 열이 지하수를 끓게 만들고, 그 끓는 물이 땅 위로 솟구치는 것이 간헐천이다.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옐로스톤 지역은 아직 ‘살아있는’ 화산 지대다.

슈퍼볼케이노가 마지막으로 크게 폭발한 것은 약 64만 년 전이었다. 그 폭발은 지금 기준으로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폭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옐로스톤이 언젠가 다시 크게 폭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언젠가’가 수천 년 후일 수도 있고, 수십만 년 후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옐로스톤을 즐길 수 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이 공원을 더 경이롭게 만든다.

2. 올드 페이스풀 — 땅이 숨 쉬는 소리

옐로스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 간헐천이다. ‘오래되고 믿음직한’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이 간헐천이 예측 가능하게 규칙적으로 분출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약 44분에서 125분마다 한 번씩, 높이 30~55미터로 뜨거운 물을 약 2분간 내뿜는다. 공원 직원들이 다음 분출 시간을 예측해서 알려준다. 오차는 보통 10분 이내다.

올드 페이스풀이 분출하는 순간은 항상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분출 예정 시간 30분 전부터 주변 벤치들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분출이 시작되면 — 처음에는 작은 물줄기로, 그다음은 굵은 증기와 함께 힘차게 — 수백 명이 동시에 탄성을 지른다. 국적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같은 순간에 같은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고, 같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을 하나로 만든다.

올드 페이스풀의 역사

올드 페이스풀은 1870년 워시번-랭포드-도언 원정대가 처음 기록했다. 당시 탐험가들이 이 간헐천을 처음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면서 개인이 소유하거나 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 느낌이 2년 후 국립공원 지정으로 이어졌다.

올드 페이스풀의 분출 패턴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다. 1959년 이 지역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 분출 간격이 길어졌다. 2002년에 또 지진이 났을 때도 영향을 받았다. 지구의 움직임이 이 간헐천의 리듬을 바꾼다. 올드 페이스풀이 ‘믿음직하게’ 예측 가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예측 가능성도 지구라는 더 큰 변수 안에 있다. 인간이 예측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들이 사실은 훨씬 큰 힘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 간헐천이 보여준다.

3.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 — 지구에서 가장 화려한 색

옐로스톤에서 올드 페이스풀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Grand Prismatic Spring)이다. 직경 약 90미터, 깊이 약 50미터의 이 온천은 미국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온천이다. 그런데 크기보다 색깔이 더 유명하다. 가운데는 깊고 짙은 파란색, 그 주위로 파랑, 초록, 노랑, 주황, 빨강으로 이어지는 무지개 같은 띠들. 이 색깔들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 색깔의 비밀은 미생물이다. 온천의 각 부분은 온도가 다르다. 가운데는 섭씨 90도 가까이 되어 거의 아무것도 살 수 없지만, 가장자리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면서 다른 종류의 미생물들이 살 수 있게 된다. 각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색소가 온도 띠에 따라 다른 색깔로 나타난다. 생명이 색깔을 만들고, 그 색깔이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현상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을 제대로 보려면 위에서 내려다봐야 한다. 지상에서는 수증기 때문에 전체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드웨이 간헐천 분지(Midway Geyser Basin)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페어리 폴스(Fairy Falls) 트레일에서 오르막을 올라가면 전망 포인트가 나온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의 전체 모습이 비로소 보인다. 그 장면 앞에서 말이 없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4. 그랜드 캐니언 오브 더 옐로스톤 — 두 개의 폭포와 황금빛 협곡

옐로스톤이라는 이름 자체가 황금빛 돌(Yellow Stone)에서 왔다. 옐로스톤강 (Yellowstone River)이 깎아 만든 이 협곡의 절벽이 황금빛, 붉은빛, 흰빛의 다양한 색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열수(熱水) 활동이 암석을 변질시키면서 만들어진 색깔이다. 그 협곡 안으로 두 개의 폭포가 쏟아진다.

어퍼 폭포(Upper Falls)는 높이 33미터, 로어 폭포(Lower Falls)는 높이 94미터다.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이 폭포 앞에 서면 그 소리와 물보라가 몸 전체로 밀려온다. 아티스트 포인트(Artist Point)에서 바라보는 로어 폭포와 황금빛 협곡의 전경은, 19세기 화가들이 옐로스톤을 처음 그렸을 때의 장면 그대로다. 그 그림들이 미국 의회를 설득해 국립공원 지정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옐로스톤 레이크 — 대륙의 고요

옐로스톤 국립공원 남동쪽에 옐로스톤 호수(Yellowstone Lake)가 있다. 해발 2,357미터에 위치한 이 호수는 북미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있는 대형 호수 중 하나다. 면적이 약 352평방킬로미터로, 제주도 면적보다 약간 작다. 이 넓은 호수 위로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너머로 테톤 산맥이 보일 때, 그 풍경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고요하다.

옐로스톤 레이크 아래에도 열수 활동이 있다. 호수 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것이 다이버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표면은 차갑고 맑은 고산 호수인데, 바닥에서는 지구의 열기가 올라오고 있다. 그 역설이 옐로스톤이라는 공원 전체를 상징한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고요한데, 그 아래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다.

5. 야생동물 — 공원이 살아있는 이유

옐로스톤을 도시의 공원이나 테마파크와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야생동물이다. 이곳에는 인간이 관리하지 않는, 진짜 야생의 동물들이 산다. 바이슨(Bison, 들소), 엘크(Elk, 큰 사슴), 회색곰(Grizzly Bear), 늑대(Wolf), 검은곰(Black Bear), 퓨마(Mountain Lion). 이들이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옐로스톤에서 동물을 보는 것은 운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바이슨은 거의 항상 볼 수 있다. 헤이든 밸리(Hayden Valley)에서는 바이슨 떼가 도로를 건너면서 차들이 멈춰서는 ‘바이슨 잼(Bison Jam)’이 자주 일어난다. 수백 마리의 바이슨이 천천히 도로를 건너는 동안 관광객들은 차 안에서 혹은 밖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 순간 누가 이 땅의 주인인지가 명확해진다.

회색곰 — 존경과 거리

옐로스톤의 회색곰(Grizzly Bear)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보호받는 야생동물 중 하나다. 한때 멸종 위기에 처했다가 보호 정책으로 개체수가 회복되었다. 공원 안에 약 150마리의 회색곰이 서식한다. 사람이 그 회색곰과 마주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공원 측이 상세히 안내한다.

회색곰을 맞닥뜨렸을 때는 절대로 달아나서는 안 된다. 달아나면 쫓아온다.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서 곰을 직접 보지 않아야 한다. 팔을 크게 벌려 몸을 크게 보이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베어 스프레이(Bear Spray, 곰 퇴치용 캡사이신 스프레이)를 항상 지참하는 것이다. 나는 옐로스톤 하이킹을 안내할 때 반드시 이 준비를 먼저 말씀드린다. 곰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진짜 야생 여행이다.

늑대의 귀환 — 생태계가 바뀌다

옐로스톤에서 가장 극적인 생태 이야기 중 하나는 늑대의 귀환이다. 1926년 옐로스톤에서 늑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축을 해친다는 이유로 사냥되었다. 늑대가 사라지자 엘크(Elk)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엘크들이 강변 나무들을 마구 뜯어먹으면서 강 생태계가 망가졌다. 강변 나무가 사라지자 비버도 사라졌다. 비버가 만들던 댐이 사라지자 물의 흐름이 바뀌었다.

1995년, 캐나다에서 14마리의 회색늑대를 가져와 옐로스톤에 방사했다. 그 결과가 놀라웠다. 늑대가 엘크를 사냥하기 시작하자 엘크들이 강변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되었다. 강변 나무들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나무가 자라자 비버가 돌아왔다. 비버가 댐을 만들자 물의 흐름이 안정되었다. 강이 바뀌었다. 늑대 14마리가 강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것을 ‘영양 폭포(Trophic Cascade)’라고 부른다. 생태계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사라지면 전체가 무너지고, 하나가 돌아오면 전체가 살아난다.

6.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 옐로스톤의 이웃

옐로스톤 국립공원 남쪽 바로 아래에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Grand Tet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공원은 사실상 하나의 연결된 생태계를 이루고 있어, 옐로스톤을 방문한다면 그랜드 티턴도 함께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두 공원 합쳐서 미국에서 가장 완결된 야생 생태계가 보존된 지역이 된다.

그랜드 티턴의 가장 큰 매력은 산이다. 해발 4,197미터의 그랜드 티턴 봉우리를 포함한 티턴 산맥이 스네이크 리버(Snake River) 평원 위로 수직에 가깝게 솟아 있다. 완만한 애팔래치아 산맥과는 전혀 다른, 암벽이 드러난 험준한 로키 산맥의 모습이다. 그 산 아래 잭슨 호수(Jackson Lake)가 거울처럼 산을 반사한다. 그 풍경이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악 풍경 중 하나로 꼽힌다.

잭슨홀 — 와이오밍의 고급 리조트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남쪽 입구 도시 잭슨(Jackson), 흔히 잭슨홀(Jackson Hole)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와이오밍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련된 곳이다. 카우보이 문화와 야생의 서부 분위기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스키 리조트와 고급 레스토랑이 있다. 겨울에는 스키어들로, 여름에는 하이커와 야생동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잭슨 타운 스퀘어(Jackson Town Square)에는 엘크 뿔로 만든 아치가 네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매년 가을 국립 엘크 보호구역(National Elk Refuge) 에서 떨어진 뿔들을 모아 만든 이 아치는 잭슨의 상징이다. 여기서 사진을 찍는 것이 잭슨홀 방문의 필수 코스다. 주변에 서부 스타일 부티크들과 갤러리들이 있어 걷는 것 자체가 즐겁다.

7. 몬태나와 빙하 국립공원 — 녹아가는 시간

옐로스톤에서 북쪽으로 약 5시간 달리면 몬태나(Montana) 주 북쪽 캐나다 국경 근처에 빙하 국립공원(Glacier National Park)이 있다. ‘아메리카의 왕관 (Crown of the Continent)’이라 불리는 이 공원은 미국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국립공원 중 하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떤 국립공원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공원 이름처럼 빙하가 있다. 아니 있었다. 1850년대 이 공원에는 약 150개의 빙하가 있었다. 지금은 25개 남짓이 남아 있다.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고 있다. 과학자들은 현재 추세대로라면 2030년 또는 그 이전에 공원 안에서 빙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예측한다. 지금 이 공원을 방문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고잉 투 더 선 로드 —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빙하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고잉 투 더 선 로드(Going-to-the-Sun Road)는 미국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길이 약 80킬로미터의 이 도로는 공원을 동서로 가로질러 대륙 분수령(Continental Divide)을 넘는다. 도로 양옆으로 수직 절벽이 솟고, 아래로 깊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며, 높은 곳에서는 빙하가 보인다.

이 도로는 눈 때문에 보통 6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만 개방된다. 도로가 너무 좁아 특정 크기 이상의 차량은 진입이 제한된다. 이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것이 인간이 만든 것인지 자연이 만든 것인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도로 자체가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8. 국립공원 시스템 — 미국이 자랑하는 가장 좋은 아이디어

작가 월리스 스테그너(Wallace Stegner)는 국립공원 시스템을 ‘미국이 가진 가장 좋은 아이디어(The Best Idea America Ever Had)’라고 불렀다. 그 말이 맞다. 개인의 재산권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미국에서, ‘이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원칙으로 광대한 자연을 보존한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1872년 옐로스톤이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지금 미국에는 63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에버글레이즈, 아카디아, 자이언. 이 공원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개발되어 사라졌을 풍경들이다. 국립공원 시스템이 그 풍경들을 미래 세대를 위해 지켜냈다.

그런데 국립공원 지정의 역사에도 불편한 이면이 있다. 많은 국립공원이 원래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옐로스톤도 수천 년간 쇼쇼니(Shoshone), 반노크 (Bannock) 등 원주민 부족들이 살던 땅이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났다.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추방이었다. 그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국립공원을 정직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9. 와이오밍과 몬태나 —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주들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품고 있는 와이오밍(Wyoming)은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주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1.2배인데 인구는 고작 58만 명 남짓이다. 서울 인구의 18분의 1이 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산다. 그래서 와이오밍을 운전하다 보면 어디를 봐도 사람이 없다. 지평선까지 땅이 이어지고, 그 위로 하늘이 펼쳐지며, 가끔 들소 한 무리가 지나간다. 이것이 와이오밍이다.

몬태나(Montana)도 마찬가지다. ‘빅 스카이 컨트리(Big Sky Country)’라는 별명이 있다. 하늘이 크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건물들 사이로 하늘 조각만 보인다. 그런데 와이오밍과 몬태나의 대평원에서는 하늘이 360도로 열려 있다.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하늘이 펼쳐지는 그 광경은, 도시인들에게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세상이 이렇게 넓다는 것.

카우보이 문화의 원형

와이오밍과 몬태나는 미국 카우보이 문화가 가장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지역이다. 텍사스의 카우보이 문화가 관광 상품화된 것과 달리, 이 지역의 카우보이들은 여전히 실제로 목장에서 소를 치고 있다. 광활한 대평원에서 말을 타고 소 떼를 모으는 그 일이 15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와이오밍의 체이엔(Cheyenne)에서 매년 7월 열리는 ‘체이엔 프런티어 데이즈 (Cheyenne Frontier Days)’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 로데오 행사다. ‘세계 로데오의 할아버지(Daddy of ’em All)’라는 별명이 있다. 황소 타기, 올가미 던지기, 배럴 레이싱. 이 경기들이 관광 쇼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로 펼쳐지는 이 축제에서 와이오밍의 진짜 얼굴을 본다.

기후변화의 최전선

옐로스톤과 그 주변 지역은 기후변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가장 극적으로 받는 곳 중 하나다. 빙하 국립공원의 빙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이미 이야기했지만, 옐로스톤도 예외가 아니다. 겨울 눈이 줄어들면서 봄에 강으로 흘러드는 물이 감소하고 있다. 여름이 더 길어지고 더 뜨거워지면서 산불 위험이 높아졌다.

1988년 옐로스톤 대산불은 공원 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태웠다. 당시에는 재앙처럼 보였지만,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새로운 숲이 자라났다. 불이 생태계 재생의 일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산불이 더 자주, 더 크게 일어난다면 그 재생 주기가 깨질 수 있다. 옐로스톤은 지구 온난화의 실험실이기도 하다.

10. 한국인의 눈으로 본 옐로스톤 — 대자연 앞에서

한국에서 온 분들이 옐로스톤에서 감동받는 이유

한국은 빠른 나라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먹고, 빠르게 일한다. 그 빠름 속에서 이렇게 느리고 광대하고 변하지 않는 자연 앞에 서면, 삶의 속도가 갑자기 다른 눈으로 보인다. 내가 그토록 서두르며 살아온 것들이 이 간헐천이 분출하는 것 앞에서 얼마나 작은가. 그 대비가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더 크게 감동을 받는다.

대자연과 인간의 겸손

나는 옐로스톤을 방문할 때마다 겸손해진다. 1만 년 전에도, 1백만 년 전에도 이 간헐천은 솟구쳤을 것이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기 전에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내가 죽은 후에도 이 땅은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그 시간의 맥락 안에서 나의 고민과 걱정과 욕망이 얼마나 작은지를 느낀다.

그렇다고 삶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 광대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옐로스톤이 가르쳐주는 것은 겸손함과 경이로움이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올 때, 삶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실용적인 옐로스톤 여행 팁

옐로스톤은 미국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국립공원 중 하나다. 여름 성수기에는 주요 명소들이 혼잡하다. 올드 페이스풀은 분출 시간에 맞춰 수백 명이 몰린다.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 전망 포인트 트레일은 여름에 진흙이 많다. 공원 내 도로는 단선인 경우가 많아 바이슨 잼 같은 상황이 생기면 1~2시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불편함들이 사실 옐로스톤의 일부다. 빨리 보고 빨리 떠나는 여행으로는 이 공원의 진짜를 경험하기 어렵다. 최소 2박 3일, 가능하면 3박 4일을 공원 안에서 보내는 것을 권한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바이슨 떼를 보고, 저녁 노을에 물든 옐로스톤 레이크를 보고, 밤에 쏟아지는 별을 보는 것. 그것이 옐로스톤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다.

저자의 한 마디   옐로스톤을 여행할 때 한 가지만 기억하라. 서두르지 말 것. 미국 대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쌓인 바쁜 일정의 습관을 여기서만은 내려놓아라. 간헐천이 분출하기를 기다리는 30분, 바이슨 떼가 도로를 건너기를 기다리는 40분,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20분. 그 기다림들이 이 여행의 일부다. 오히려 그 기다림 속에서 주변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풍경 안에서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옐로스톤은 우리에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옐로스톤·그랜드 티턴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6월~9월 (대부분 도로 개방, 야생동물 활발). 4~5월, 10~11월은 한적하지만 일부 도로 폐쇄. 겨울은 설상 차량 투어로만 일부 접근 가능

입장료

차량 1대 35달러(7일 유효). 아메리카 더 뷰티풀 연간 패스

주요 명소

올드 페이스풀(분출 시간 확인 후 방문),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페어리 폴스 전망대 추천), 아티스트 포인트(로어 폭포 전망), 헤이든 밸리(바이슨·곰 목격 확률 높음), 옐로스톤 레이크

그랜드 티턴

스네이크 리버 전망대, 잭슨 레이크 롯지, 잭슨홀 타운 스퀘어. 옐로스톤에서 남쪽으로 차 1시간

숙박 옵션

공원 내 롯지(수개월 전 예약 필수), 공원 내 캠핑(사전 예약), 게이트웨이 도시: 웨스트 옐로스톤, 가드너, 잭슨홀

안전 주의

동물에게 최소 23미터(바이슨·엘크) 또는 91미터(곰·늑대) 이상 거리 유지. 베어 스프레이 필수 지참(공원 내 대여 가능). 온천·간헐천 지역 산책로 밖 절대 금지

추천 1박 2일 코스

1일차: 미드웨이 가이져,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 올드 페이스풀 지역(간헐천 군락)+ 헤이든 밸리(야생동물)

2일차: 그랜드 캐니언 오브 더 옐로스톤 + 웨스트 떰 옐로스톤 레이크 →그랜드 티턴 드라이브 후 잭슨홀

Chapter 21. 미네소타 — 미니애폴리스

추위를 이기는 법을 아는 도시 — 조지 플로이드의 땅, 10,000개의 호수

미네소타(Minnesota)는 미국 사람들에게도 ‘저 위에 있는 추운 곳’으로 통한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미네소타가 배경으로 나올 때는 보통 눈이 가득하고 바람이 몰아치는 장면이다. 실제로 미네소타의 겨울은 혹독하다. 미니애폴리스 (Minneapolis)의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11도. 체감 온도는 영하 25도에서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시카고보다 춥고, 디트로이트보다 춥다.

그런데 이 추운 도시가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 자주 오른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 가장 낮은 실업률, 가장 건강한 경제, 가장 활발한 예술 문화. 추위를 극복하는 방법을 수백 년간 배워온 이 도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미니애폴리스에서 나는 ‘어떤 조건에서도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미네소타는 2020년 전 세계가 알게 된 도시이기도 하다. 2020년 5월 25일, 이 도시에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경찰에 의해 사망했다. 그 사건이 전 세계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살기 좋은 도시, 그리고 미국 인종 문제의 뜨거운 현장. 이 모든 것이 미네소타다.

1. 미네소타라는 주 — 만 개의 호수

미네소타의 공식 별명은 ‘만 개의 호수의 땅(Land of 10,000 Lakes)’이다. 실제로는 11,842개의 호수가 있다. 10,000이라는 숫자는 마케팅적 절충이었지만, 그 숫자도 믿기 어려울 만큼 많다. 미네소타 어디를 가도 호수가 보인다. 도시 안에도, 교외에도, 시골에도. 호수가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렵다.

이 호수들은 약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가 녹아 만들어졌다. 거대한 빙하 덩어리들이 땅을 깎고 녹으면서 수천 개의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것이 호수가 되었다. 지질학적으로 미네소타는 빙하가 남긴 선물 위에 서 있다. 그 선물이 지금 미네소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여름에는 호수에서 카약과 낚시를 하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아이스피싱(Ice Fishing)을 한다.

미시시피강도 미네소타에서 시작된다. 미네소타 북부의 이타스카 호수(Lake Itasca)에서 발원해 미국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해 뉴올리언스에서 멕시코만으로 흘러드는 이 강이, 3,730킬로미터의 여정을 이 작은 호수에서 시작한다. 이타스카 호수에는 관광객들이 미시시피강의 발원점에서 물을 건너볼 수 있는 돌다리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 시작점에서 강을 걸어서 건너는’ 특별한 경험이다.

2.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 — 쌍둥이 도시

미네소타의 대도시권은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와 세인트폴(Saint Paul)로 이루어진 ‘쌍둥이 도시(Twin Cities)’다. 미시시피강을 사이에 두고 강 서쪽이 미니애폴리스, 강 동쪽이 세인트폴이다. 두 도시는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만 사실상 하나의 대도시권을 이룬다. 두 도시를 합친 광역 인구는 약 370만 명.

두 도시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미니애폴리스가 더 젊고, 더 다양하며, 예술과 상업의 중심이라면, 세인트폴은 주도(州都)로서 더 고풍스럽고 정치·행정적 색채가 강하다. 미니애폴리스가 뉴욕 타임스에서 미래 지향적 도시로 자주 소개된다면, 세인트폴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건축이 잘 보존된 역사 도시다. 두 도시를 함께 보아야 쌍둥이 도시의 전체가 보인다.

스카이웨이 시스템 — 추위를 이기는 방법

미니애폴리스에서 가장 독특한 것 중 하나가 스카이웨이(Skyway) 시스템이다. 다운타운 전체 건물들이 2층 높이의 유리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80개 이상의 블록, 총 길이 13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시스템은 세계에서 가장 긴 실내 보행로 네트워크다. 영하 30도의 혹한에도, 눈보라가 쳐도, 미니애폴리스 다운타운에서는 겉옷 없이 어디든 걸어 다닐 수 있다.

스카이웨이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그 안에 식당, 카페, 상점, 미용실, 병원, 약국까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겨울 내내 밖에 나가지 않고 스카이웨이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해결하기도 한다. 추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추위를 우회하는 방법. 미니애폴리스가 혹독한 기후 속에서도 도시로서 기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한국 분들이 스카이웨이를 처음 경험하시면 신기해하신다. ‘이렇게 건물들이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리고 금방 이 시스템의 편리함에 적응하신다. 겨울에 미니애폴리스를 방문한다면 스카이웨이 지도를 먼저 챙기시라. 다운타운 주요 명소 대부분이 스카이웨이로 연결된다.

3. 조지 플로이드와 미니애폴리스 — 역사가 된 거리

2020년 5월 25일 저녁 8시 46분. 미니애폴리스 남쪽 파우더호른 공원 (Powderhorn Park) 인근 컵 푸드(Cup Foods) 편의점 앞. 46세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 데릭 쇼빈(Derek Chauvin)의 무릎에 9분 29초 동안 목이 눌려 숨졌다. 현장을 지나던 17세 소녀 다넬라 프레이저(Darnella Frazier)가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촬영했고, 영상이 소셜 미디어에 퍼졌다.

그 영상이 세상을 바꿨다.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조지 플로이드의 이름이 전 세계 모든 언어로 불렸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그 사건이 인종 평등에 대한 전 세계적 대화를 다시 점화했다.

조지 플로이드 광장

그 사건이 일어난 38번가와 시카고 애비뉴(38th & Chicago) 교차로는 지금 ‘조지 플로이드 광장(George Floyd Square)’이 되었다. 꽃과 추모물들이 쌓여 있고, 벽화들이 주변 건물들을 덮고 있다. 플로이드를 기리는 자발적인 기념물들이 만들어진 이 공간은, 어떤 공식적인 기념관보다 더 생생하게 그날의 상처와 그 이후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이 광장을 방문하는 것이 관광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을 여행하면서 이 장소를 지나친다면, 잠시 멈춰 서는 것이 의미 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이 변화를 만든다.

사건 이후 미니애폴리스는 경찰 개혁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경찰을 해산하라 (Defund the Police)’는 급진적 구호부터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그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 미니애폴리스가, 그리고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다.

4. 이민자들의 도시 — 소말리아에서 미니애폴리스로

미네소타는 미국에서 가장 다양한 이민자 커뮤니티 중 하나를 갖고 있다. 특히 소말리아(Somalia) 이민자들의 커뮤니티가 독특하다. 미니애폴리스는 미국에서 소말리아계 인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다. 약 7만~8만 명의 소말리아계가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

이들이 미니애폴리스에 정착한 것은 1990년대 소말리아 내전이 시작된 이후다. 유엔 난민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 재정착한 소말리아 난민들이 미네소타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미네소타 주 정부가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정착한 소말리아인들이 새로 오는 사람들을 도왔다. 커뮤니티가 커뮤니티를 끌어당기는 연쇄 이민이 일어났다.

히잡을 쓴 하원의원

2018년 미네소타 출신의 일한 오마르(Ilhan Omar)가 미국 최초로 히잡을 쓴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소말리아 출신 난민으로 미국에 온 그녀가 연방 의회에 진출한 것이다. 그녀의 당선은 미국 이민자 사회에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외진 나라에서 난민으로 온 사람이, 세계 최강대국의 의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녀의 정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반이슬람 정서, 반이민 정서, 그리고 그녀 자신의 때로는 논란을 빚은 발언들. 미국 정치에서 그녀의 존재는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그 논쟁 자체가 미국이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 나라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스웨덴계, 노르웨이계 — 북유럽의 흔적

소말리아 이민자들이 오기 훨씬 전, 미네소타에는 스칸디나비아 이민자들이 먼저 왔다. 19세기 중후반,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척박한 환경을 피해 온 수십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네소타에 정착했다. 미네소타의 추운 기후와 호수가 많은 지형이 그들의 고향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이 지금도 남아 있다. 미네소타 사람들의 성씨 중 -son으로 끝나는 성씨들 (Anderson, Johnson, Peterson)이 유독 많다. ‘미네소타 나이스(Minnesota Nice)’라는 표현이 있다. 미네소타 사람들이 겉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절제된 문화가 미네소타에 이식된 것이다.

5. 미니애폴리스의 예술과 문화

워커 아트 센터와 조각 공원

미니애폴리스는 미국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공연장과 미술관을 가진 도시 중 하나다. 워커 아트 센터(Walker Art Center)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미술관 중 하나다. 그 옆에 있는 미니애폴리스 조각 공원(Minneapolis Sculpture Garden)에는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대표작 ‘스픈브리지와 체리(Spoonbridge and Cherry)’가 있다. 거대한 스픈과 그 위에 얹힌 빨간 체리. 미니애폴리스의 가장 유명한 아이콘 중 하나다.

미니애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Minneapolis Institute of Art, Mia)는 무료 입장이다. 5,000년의 미술사를 담은 9만 점 이상의 소장품이 있다. 아시아 미술 컬렉션이 특히 풍부하다. 한국 도자기와 회화 작품들도 있어 한국 분들이 반가워하시는 경우가 있다.

프린스의 도시

미니애폴리스는 팝 음악의 전설 프린스(Prince)의 고향이다. 1958년 이 도시에서 태어나 2016년 이 도시 교외의 페이즐리 파크(Paisley Park) 스튜디오에서 세상을 떠난 프린스는 미니애폴리스와 불가분이다. 그가 남긴 음악과 그의 도시에 대한 사랑이 지금도 미니애폴리스 곳곳에 살아있다.

프린스는 미니애폴리스를 배경으로 한 반자전적 영화 ‘퍼플 레인(Purple Rain, 1984)’에서 도시의 젊은이들의 꿈과 갈등을 그렸다. 영화에 나오는 퍼스트 애비뉴(First Avenue) 클럽은 지금도 미니애폴리스의 라이브 음악 중심지로 운영되고 있다. 건물 외벽에 프린스를 포함한 많은 음악가들의 별이 붙어 있다. 페이즐리 파크는 지금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팬들이 순례처럼 찾아온다.

6. 미네소타의 자연 — 호수와 경계의 카누 지역

미네소타는 자연의 주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인구가 줄고 호수가 많아지며, 미국 원주민 보호 구역이 이어진다. 미네소타 북부는 미국에서 가장 야생에 가까운 지역 중 하나다.

경계 수역 카누 구역

미네소타 북쪽 끝, 캐나다 국경에 접한 ‘경계 수역 카누 구역(Boundary Waters Canoe Area Wilderness, BWCAW)’은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야생 지역이다. 100만 에이커가 넘는 이 지역에는 약 1,200개의 호수와 수천 킬로미터의 카누 루트가 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다. 모터보트도 대부분 금지된다. 카누나 카약을 타고 호수에서 호수로, 포티지(portage, 배를 들고 육지를 건너는 것)를 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지역에서의 하룻밤은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경험이다. 스마트폰 신호가 없다. 인공 불빛이 없다. 그 어둠 속에서 보이는 밤하늘이 압도적이다. 카누를 타고 고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다 보면, 이 땅이 수천 년간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상상된다. 미국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야생의 마지막 조각이 여기 있다.

수페리어 호수 — 세계 최대의 담수호

미네소타 동북쪽 경계를 따라 수페리어 호수(Lake Superior)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호다. 면적이 약 8만 2천 평방킬로미터로, 한국 전체 면적의 80퍼센트에 달한다. 호수라기보다 내해(內海)에 가깝다. 폭풍이 치면 파도가 10미터를 넘기도 한다.

미네소타 북동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노스 쇼어(North Shore) 드라이브는 미국 중서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수페리어 호수의 광대한 수평선, 바위 해안, 폭포들. 미니애폴리스에서 차로 3시간이면 이 경이로운 풍경이 시작된다.

7. 한국인의 눈으로 본 미네소타

추위와 따뜻함

미네소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날씨는 정말 추웠는데, 사람들은 따뜻했어요.’ 맞다. 미네소타의 기후는 혹독하지만, 그 기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문화가 발달했다. 눈이 많이 오면 이웃집 진입로도 함께 치워주고, 차가 눈에 빠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밀어준다. 생존을 위한 상호 협력이 문화가 된 것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두레, 품앗이. 함께 농사짓고 함께 도우며 살아가던 전통.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많이 희미해졌지만, 그 정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네소타의 ‘미네소타 나이스’와 한국의 두레 정신이 어딘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혹독한 환경이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가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다.

조지 플로이드 이후 미네소타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니애폴리스는 변했다. 경찰 개혁 논쟁, 인종 평등 운동,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시를 떠났고,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변화를 만들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답은 아직 없다. 하지만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니애폴리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에게 나는 이 이야기를 드린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도시에서 인종 차별로 사람이 죽었다. 살기 좋은 것과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다른 문제다. 아름다운 호수와 좋은 공연장과 높은 교육 수준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불평등을 보는 것이, 미네소타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저자의 한 마디   미네소타는 여름에 오는 것을 강력히 권한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 도시 중 하나다. 호수에서 카약을 타고, 야외 콘서트를 즐기고, 파머스 마켓에서 신선한 제철 먹거리를 먹는다. 스카이웨이는 겨울에 진가를 발휘하지만, 여름에도 흥미로운 도시 내부 여행이 된다. 조각 공원의 스픈브리지와 체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워커 아트 센터에서 현대 미술을 보고, 저녁에는 퍼스트 애비뉴 클럽에서 라이브 음악을 들어라. 그것이 미니애폴리스를 가장 미니애폴리스답게 경험하는 방법이다.

미네소타·미니애폴리스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6월~9월 (여름·호수 활동). 겨울(12~3월)은 혹독한 추위지만 스카이웨이·실내 문화 풍부. 10월 단풍도 아름다움

주요 명소

조각 공원(스픈브리지와 체리), 워커 아트 센터, 미니애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무료), 조지 플로이드 광장(38번가&시카고 애비뉴), 페이즐리 파크(프린스 박물관), 퍼스트 애비뉴 클럽

꼭 먹어야 할 것

루테피스크(Lutefisk·노르웨이계 전통 생선 요리), 미네소타 주립 박람회 스틱 음식들(매년 8월 말), 수페리어 호수 월아이(Walleye·담수어 요리), 소말리아 음식(레이크 스트리트 주변)

추천 2일 코스

1일차: 조각 공원·워커 아트 센터→스카이웨이 체험→미니애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퍼스트 애비뉴 저녁 라이브

2일차: 조지 플로이드 광장→레이크 스트리트(다양성)→미네하하 폭포 공원→ 페이즐리 파크

근교 자연

미네하하 폭포(Minnehaha Falls·도시 안 폭포·차 15분), 노스 쇼어 드라이브(수페리어 호수·북쪽 3시간), 경계 수역 카누 구역(BWCAW·북쪽 3.5시간·사전 허가 필요)

겨울 방문 시

스카이웨이 지도 필수 지참. 레이어드 방한복 필수. 체감 온도 영하 30도 가능. 실내 활동 중심 계획 권장

Chapter 22. 오하이오·인디애나 — 콜럼버스

미국의 평균, 미국의 심장 —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통과하는 곳

콜럼버스(Columbus)를 여행지로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행 잡지 표지에 오르지 않고, 미국 여행 버킷 리스트에 올라오지 않으며, 한국에서는 대부분 ‘오하이오에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있어요?’라는 반응을 들을 때가 많다. 그것이 콜럼버스가 미국에서 갖는 위치다.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도시.

그런데 콜럼버스는 미국에서 14번째로 큰 도시이고, 오하이오 주도(州都)이며,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가 있는 대학 도시이고, 미국 최대 규모의 소매 유통 테스트 시장이다. ‘미국에서 새 제품이나 새 레스토랑 컨셉을 테스트하고 싶다면 콜럼버스에서 먼저 하라’는 말이 마케팅 업계에 있다. 콜럼버스가 미국 소비자 평균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콜럼버스를 방문할 때마다 ‘미국의 평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개념인지를 생각한다. 평균이라는 것은 극단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다. 뉴욕의 극단적인 밀도도, 몬태나의 극단적인 공허함도 없다. 그 중간 어딘가에 콜럼버스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이 사실 미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콜럼버스를 이해하면 미국의 일상을 이해하게 된다.

1. 오하이오라는 주 — 대통령을 가장 많이 배출한 주

오하이오(Ohio)는 미국 정치의 요람이다. 미국 대통령 45명 중 8명이 오하이오 출신이다. 율리시스 그랜트, 러더퍼드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체스터 아서, 벤저민 해리슨, 윌리엄 매킨리,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워런 하딩. 어떤 주도 이만큼 많은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다. ‘대통령들의 어머니(Mother of Presidents)’라는 별명은 버지니아와 오하이오가 함께 갖는다.

더 중요한 것은 오하이오가 선거에서 갖는 의미다. 1960년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 선거에서 오하이오를 이긴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오하이오를 잡아야 백악관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미국 정치 지형의 축소판이 오하이오다.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들, 도시의 대학 교육 받은 전문직, 교외의 중산층, 농촌의 보수적 유권자들이 오하이오 안에 모두 있다. 그 다양성이 오하이오를 미국의 축도(縮圖)로 만든다.

오하이오는 또한 라이트 형제의 고향이다. 윌버(Wilbur)와 오빌(Orville) 라이트는 오하이오 주 데이턴(Dayton) 출신이다. 그들이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면서 비행기를 연구한 곳이 데이턴이다. 1903년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Kitty Hawk)에서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을 성공시킨 그들의 정신적 뿌리가 오하이오에 있다. 오하이오의 별명 ‘어머니 주(Buckeye State)’에 더해 ‘비행사들의 고향(Birthplace of Aviation)’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2. 콜럼버스 — 대학 도시이자 실험 도시

콜럼버스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 OSU)가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학 도시다. OSU는 미국에서 가장 큰 대학 중 하나로, 메인 캠퍼스 재학생만 약 6만 명이 넘는다. 그 학생들과 교직원, 그리고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각종 서비스 산업이 콜럼버스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콜럼버스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러스트 벨트의 다른 오하이오 도시들 — 클리블랜드, 톨레도, 데이턴 — 이 인구 감소로 씨름하는 동안, 콜럼버스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인텔이 콜럼버스 동쪽 뉴올버니(New Albany) 지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로 한 것이 최근 가장 큰 뉴스였다. 약 200억 달러 투자, 수천 개의 일자리. 미국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상징하는 투자가 오하이오에 이루어진 것이다.

쇼트 노스 — 콜럼버스의 예술 거리

콜럼버스에서 가장 활기찬 동네는 쇼트 노스(Short North)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남쪽에서 다운타운까지 이어지는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를 따라 갤러리, 독립 레스토랑, 부티크, 바들이 밀집해 있다. 한때 낙후된 동네였다가 1980년대부터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 변모한 곳이다.

쇼트 노스는 미국 어느 도시의 예술 지구와도 견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매달 첫 번째 토요일에 ‘갤러리 홉(Gallery Hop)’이 열린다. 동네의 모든 갤러리가 무료로 문을 열고,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예술을 보러 온 사람, 산책 나온 커플, 맥주 한 잔 하러 나온 학생들이 뒤섞인다. 그 자유로운 에너지가 쇼트 노스의 매력이다.

콜럼버스 음식 문화 — 다양성의 실험장

콜럼버스가 ‘미국의 테스트 시장’이라는 명성을 가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사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전국 평균에 가까운 소비 성향을 가진 곳이다. 맥도날드, 웬디스, 치폴레. 이 체인들이 모두 오하이오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콜럼버스의 진짜 음식 문화는 이 체인들이 아니다.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멕시코, 부탄, 네팔. 다양한 이민자 커뮤니티가 각자의 음식 문화를 들여온 덕분에 콜럼버스는 미국 중서부에서 가장 다양한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클린턴빌(Clintonville)과 웨스트사이드(Westside)의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식당들은 미국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수준의 정통 동아프리카 음식을 제공한다.

3. 인디애나 — 조용한 이웃

오하이오 바로 서쪽에 인디애나(Indiana) 주가 있다. 두 주는 경계선으로만 구분될 뿐 지형적으로 연속된다. 넓은 옥수수 밭, 콩밭, 완만한 구릉. 이것이 인디애나의 풍경이다. 인디애나는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주 중 하나다. 여행자들이 지나치는 곳, 동부에서 서부로, 또는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하면서 고속도로로 통과하는 주.

하지만 인디애나를 단순히 ‘지나치는 주’로만 보면 이 땅이 가진 이야기를 놓친다. 인디애나의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는 매년 5월 열리는 인디500 (Indianapolis 500)으로 전 세계에서 레이싱 팬들이 모이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 경주 중 하나인 이 대회가 100년 넘게 이 도시에서 열렸다. 그리고 인디애나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잭슨 파이브의 고향인 개리 (Gary)가 있는 주이기도 하다.

인디애나폴리스 — 경주와 역사의 도시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는 콜럼버스에서 서쪽으로 약 3시간 거리다. 인디애나 주도로 인구 약 90만 명. ‘인디(Indy)’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다운타운은 잘 계획된 그리드 구조로, 주 의사당을 중심으로 격자로 도로가 펼쳐진다. 깨끗하고 안전하며, 생각보다 볼 것이 많은 도시다.

인디애나폴리스 모터 스피드웨이(Indianapolis Motor Speedway)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관중석을 가진 스포츠 경기장이다. 수용 인원이 약 25만 명. 매년 5월 인디500이 열리면 전 세계에서 관중이 모여든다. 경주가 없는 기간에도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100년 이상의 레이싱 역사를 볼 수 있다. 레이싱에 관심 없는 분들도 이 경기장의 규모 앞에서 압도된다.

4. 오하이오의 역사 — 미국이 서부로 팽창하던 관문

오하이오는 미국 초기 역사에서 ‘서부(The West)’였다. 1787년 미국이 독립한 직후, 당시 미국의 서쪽 끝은 오하이오강(Ohio River)이었다. 오하이오강 북쪽, 지금의 오하이오 주 지역이 연방 공유지였다. 이 땅을 어떻게 정착시키고 조직화할 것인가를 결정한 북서부 조례(Northwest Ordinance, 1787)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률 중 하나다.

북서부 조례는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법은 노예제가 이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을 것을 명시했다. 미시시피강 동쪽에서 서쪽으로 퍼져나가던 노예제를 이 법이 오하이오강 북쪽에서 막은 것이다. 그 결정이 이후 북부와 남부의 지리적 경계를 만들었고, 결국 남북전쟁의 구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조용한 오하이오의 들판에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지하 철도 — 자유를 향한 탈출로

오하이오강은 남북전쟁 이전 노예와 자유 사이의 경계였다. 강 남쪽은 노예 주(켄터키), 강 북쪽은 자유 주(오하이오). 수많은 탈출 노예들이 이 강을 건너 자유를 얻었다. 그 탈출을 도운 것이 ‘지하 철도(Underground Railroad)’였다. 실제 철도가 아니라, 탈출을 돕는 사람들의 비밀 네트워크였다.

오하이오에는 지하 철도의 정류장 역할을 한 집들이 있었다. 탈출 노예들을 숨겨주고, 먹이고, 다음 목적지로 안내한 집들. 그 집들 중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고, 박물관이나 기념물로 보존되어 있다.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가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살면서 탈출 노예들의 이야기를 듣고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썼다. 그 소설이 북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남북전쟁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5. 오하이오 스테이트 대학 — 미국 대학 문화의 축소판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 OSU)는 단순한 대학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다. 캠퍼스 면적이 약 6.6평방킬로미터, 재학생 약 6만 명, 교직원 약 3만 명. 캠퍼스 안에 병원, 호텔, 공연장, 박물관, 농장이 있다. 콜럼버스의 많은 주민들이 OSU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 대학 풋볼(College Football)에서 OSU 버카이즈(Ohio State Buckeyes)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팀이다.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콜럼버스 전체가 진홍색(Scarlet)과 회색(Gray)으로 물든다. 게임 전날부터 팬들이 몰려들고, 경기장 주변 식당들은 빈자리가 없다. 미국 대학 스포츠 문화의 열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가을 토요일 OSU 홈 경기 날 콜럼버스에 있으면 된다.

NASA와 오하이오 — 우주로 간 오하이오 사람들

오하이오는 우주 역사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라이트 형제로 시작된 비행의 역사가 우주로 이어졌다. 달에 처음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오하이오 와파코네타(Wapakoneta) 출신이다. ‘작은 한 걸음’을 내딛은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 오하이오의 작은 마을에 있었다.

존 글렌(John Glenn)도 오하이오 출신이다. 미국 최초로 지구 궤도를 비행한 우주비행사이자 나중에 오하이오 상원의원이 된 그는 77세의 나이에 다시 한번 우주왕복선을 타기도 했다. 콜럼버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존 글렌 국제공항(John Glenn Columbus International Airport)이 있다.

6. 아미시 커뮤니티 — 현대를 거부하는 사람들

오하이오는 미국에서 아미시(Amish) 인구가 가장 많은 주다. 오하이오 북동부의 홈즈 카운티(Holmes County)를 중심으로 약 8만 명의 아미시가 살고 있다. 세계 최대 아미시 커뮤니티다. 전기를 쓰지 않고, 자동차 대신 말이 끄는 마차를 타며, 현대 문명의 많은 것들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21세기 미국 한복판에 있다.

콜럼버스에서 동쪽으로 약 1시간 30분 거리인 밀러스버그(Millersburg) 일대를 방문하면 다른 세기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검은 마차가 현대 자동차들 사이에서 도로를 달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과 흰 모자를 쓴 여자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산다. 광활한 농장에서 말로 밭을 간다.

아미시 문화는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들의 삶 방식은 깊은 신앙적 선택에서 나온다. 현대 기술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신앙을 약화시킨다는 믿음.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는 공동체 전체가 논의하고 결정한다. 어떤 기술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부하는 경계가 외부인에게는 임의적으로 보이지만, 그 경계 자체가 공동체가 함께 만든 것이다. 한국 분들이 아미시 마을을 방문하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 사람들, 행복해 보여요.’ 속도를 줄인 삶이 만드는 여유가 얼굴에 있다.

6-1. 오하이오의 다른 도시들 — 클리블랜드와 신시내티

오하이오는 콜럼버스만 있는 주가 아니다. 미시간 호수 연안의 클리블랜드 (Cleveland)와 켄터키 국경의 신시내티(Cincinnati)가 각각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도시들도 함께 보는 것이 오하이오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클리블랜드 — 락앤롤의 성지

클리블랜드(Cleveland)는 미국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도시 중 하나다. 한때 러스트 벨트 쇠락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의료 기관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과 함께 의료 산업의 허브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락앤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이 이 도시에 있다.

왜 락앤롤 명예의 전당이 클리블랜드에 있을까. 1950년대 클리블랜드의 라디오 DJ 앨런 프리드(Alan Freed)가 처음으로 이 새로운 음악을 ‘록앤롤(Rock ‘n’ Roll)’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여기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클리블랜드를 명예의 전당 도시로 만들었다. 미시간 호수 변에 세워진 I.M. 페이 설계의 유리 피라미드 건물이 락앤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 스톤스, 퀸, 마이클 잭슨. 이 이름들을 하나의 건물에서 만날 수 있다.

신시내티 — 맥주와 야구의 도시

신시내티(Cincinnati)는 오하이오강 변에 자리 잡은 도시다. 인구 약 30만 명이지만, 오하이오에서 가장 오래된 주요 도시다. 19세기 미국 서부 팽창의 관문이었던 이 도시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맥주 양조 문화가 발달했다. ‘리인강의 퀸(Queen of the Rhine)’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마치 독일 라인강 변의 도시 같다는 뜻이다.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는 미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전문 팀이다. 1869년에 창단된 이 팀은 야구 역사 자체를 대표한다. 신시내티를 방문한다면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 파크(Great American Ball Park)에서 게임을 보는 것이 최고의 경험 중 하나다. 미국 야구 문화의 원형을 이 도시에서 느낄 수 있다.

한인 커뮤니티와 인텔

콜럼버스의 한인 커뮤니티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의학, 공학, 과학 분야에서 OSU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과 교수들이 콜럼버스에 정착하면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지금 콜럼버스 동북쪽 더블린(Dublin)과 웨스터빌 (Westerville) 지역에 한국 마트와 식당들이 모여 있다.

최근 인텔의 반도체 공장 건설이 발표되면서 한인 사회도 주목하고 있다. 삼성,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인텔과 협력하거나 이 지역 공급망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반도체 부활의 무대로 오하이오가 선택된 것이 한국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평균 미국의 가치

콜럼버스를 방문하면서 나는 ‘평균’이라는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화려하지 않고, 극단적이지 않으며,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뉴욕의 화려함이 미국의 얼굴이라면, 콜럼버스의 평범함이 미국의 몸통이다. 그 몸통 없이는 얼굴이 있을 수 없다.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에서 미국을 보려 한다. 그것은 미국의 가장 화려한 면이다. 하지만 미국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고 싶다면, 콜럼버스에 와야 한다. 주립대학이 도시를 이끌고, 체인 레스토랑이 먼저 실험하며, 중산층 가정이 오하이오강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사는 이 도시. 이것이 미국의 중간, 미국의 심장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서울이 한국의 얼굴이지만, 서울 밖 중소 도시와 농촌이 한국의 몸통이다. 세종시, 청주, 전주, 광주. 이 도시들의 이야기가 모여 한국이 된다. 미국에서 콜럼버스를 보면서 한국의 그 중간 도시들이 생각난다. 눈에 띄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가치를 콜럼버스가 가르쳐준다.

콜럼버스를 처음 방문하신 손님 한 분이 하루를 걷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뉴욕이나 LA는 미국 같은데, 여기는 그냥 동네 같아요. 근데 이게 더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그 말이 콜럼버스를 가장 잘 표현한다. 미국스럽지 않은 것이 가장 미국다운 곳. 그것이 콜럼버스다.

저자의 한 마디   콜럼버스는 기대치 없이 가면 오히려 더 많이 발견하는 도시다. 화려한 명소를 찾지 말고, 그냥 쇼트 노스를 걸어라. 갤러리 앞에 멈추고, 독립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작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라. 그것이 콜럼버스를 콜럼버스답게 경험하는 방법이다. 아미시 마을도 꼭 가보시라. 차로 1시간 30분이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과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공존하는 그 풍경이, 미국이 얼마나 다양한 나라인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오하이오·콜럼버스 여행 실용 정보

최적 방문 시기

4월~6월, 9월~10월. 여름(7~8월)은 덥고 습하지만 OSU 행사 풍부. 가을 단풍(10월)과 풋볼 시즌이 가장 활기참

콜럼버스 주요 명소

쇼트 노스(갤러리 홉·매달 첫 토요일),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캠퍼스, 콜럼버스 미술관, 과학산업 박물관(COSI)

아미시 마을

홈즈 카운티 밀러스버그·베를린(Berlin, OH). 콜럼버스에서 동쪽 차 1시간 30분. 아미시 치즈·파이·수제 가구 쇼핑. 일요일은 아미시 가게 대부분 휴무

인디애나폴리스

콜럼버스에서 서쪽 차 3시간. 인디500 모터 스피드웨이(박물관·연중 개방), 어린이 박물관(세계 최대 규모)

꼭 먹어야 할 것

버거(Thurman Cafe·콜럼버스 명물 수제 버거), 동아프리카 음식(소말리아·에티오피아·클린턴빌), 아미시 파이와 치즈(홈즈 카운티)

추천 2일 코스

1일차: 쇼트 노스 산책·갤러리→OSU 캠퍼스→다운타운 콜럼버스→쇼트 노스 저녁

2일차: 아미시 마을 반나절(홈즈 카운티)→치즈·파이 쇼핑→콜럼버스 복귀

한인 커뮤니티

더블린(Dublin)·웨스터빌(Westerville) 지역. H마트 콜럼버스 지점. OSU 한인 학생회 활성화. 인텔 공장(뉴올버니) 관련 한국계 증가 추세

에필로그 — 미국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이십 년의 여정을 마치며

마지막 챕터를 쓰고 나서 한참 앉아 있었다. 보스턴에서 시작해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 리치몬드, 플로리다를 거쳐 서부로 넘어가고, 남부를 돌아 북부까지. 미국 50개 주 중 이 책에서 다룬 곳만 해도 스물두 개 도시와 지역이다. 그 모든 곳을 글로 쓰면서 나는 다시 한번 그 여정을 걸었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땅을 누비면서 무엇을 배웠을까. 질문이 많아지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 때 나는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국가란 이런 것이고, 역사란 저런 것이며,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 당연함들이 미국에서 하나씩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린 자리에서 새로운 질문이 자라났다.

미국이 보여준 것들

미국은 위대한 나라다. 그리고 동시에 깊이 결함이 있는 나라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미국의 위대함에 압도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독립기념관 앞에서, 그랜드캐년 앞에서. 이 나라가 이룬 것들이 경이로웠다.

그다음에는 미국의 결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예제의 유산, 원주민 학살, 인종 차별, 경제적 불평등. 그 결함들이 단순한 역사적 잘못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지 플로이드가 죽은 미니애폴리스는 미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였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빠르게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다. 그 모순들이 미국의 실제 모습이다.

그런데 또 다른 것도 보았다. 그 결함들을 직시하고, 기억하고,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찰스턴에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박물관을 세운 사람들, 몽고메리에 노예제 기념관을 만든 사람들, 리치몬드의 동상들을 끌어내린 사람들. 완벽하지 않지만 더 나아지려는 의지. 그것이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십 년 넘게 두 나라 사이에서 살면서 나는 어느 쪽도 아닌, 두 쪽 모두인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 가면 ‘미국에서 오래 사신 분’이고,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온 분’이다.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경계가 오히려 내게 특별한 시각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두 쪽 모두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미국에 살지만 미국인의 당연함을 갖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인의 눈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그 경계에서 쓰인 책이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시각으로, 미국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시도. 그 시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독자 분들이 판단할 것이다.

미국 여행중에  배운 것들

미국을 소개하며 여행을 안내하는 동안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설명하는 법’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이었다. 나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이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질문을 받았고, 그 질문들이 나를 끊임없이 공부하게 만들었다.

‘왜 미국은 총기를 규제하지 않아요?’ ‘왜 의료비가 이렇게 비싸요?’ ‘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노숙자가 이렇게 많아요?’ 이 질문들에 쉬운 답은 없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질문들을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답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적 정직함이다.

그리고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은 항상 손님들에게서 왔다. 70대 교민 부부가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20년의 이민 생활이 저 불빛 속에 다 있는 것 같다고 했을 때. 그랜드캐년에서 한국에서 오신 할머니가 ‘우리 이런 거 보러 살았구나’라고 했을 때. 그 순간들이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다.

미국의 미래

미국은 지금 변화의 격랑 속에 있다. 정치적 분열, 인종 갈등, 경제적 불평등, 이민 문제. 내가 이십 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보다 이 나라는 더 복잡해지고 더 갈등이 깊어진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쇠락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을 본다. 조지 플로이드 이후 전 세계가 인종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기후변화 대응, 반도체 부활, 인프라 투자. 느리고 시끄럽지만 미국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들을 가장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 투명성이 때로는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숨기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여전히 사람들이 오는 나라다. 꿈을 가지고, 더 나은 삶을 찾아, 자유를 향해.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는 이민자들, 태평양을 건너오는 유학생들,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오는 한, 미국은 살아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완성하고 나서 내가 안내했던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천 명의 한국 분들이 미국의 각 도시에서 보였던 표정들. 압도된 표정, 감동받은 표정, 불편해하는 표정, 눈물 흘리는 표정, 웃는 표정.

그분들 한 명 한 명이 이 책의 독자이자 이 책의 공저자다. 그분들의 질문이 이 책의 질문이 되었고, 그분들의 감동이 이 책의 감동이 되었다. 리버 워크에서 마리아치 음악을 들으며 트로트를 떠올린 손님, 뉴올리언스 재즈 바에서 민요를 생각한 분, 디트로이트에서 폐허 속의 희망을 본 분.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 책도 없었다.

미국은 크고 복잡한 나라다. 이 책 한 권으로 미국을 다 담을 수 없다. 내가 보지 못한 곳,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이 책은 하나의 시각이지, 유일한 정답이 아니다. 독자 분들이 이 책을 읽고 미국에 가서, 혹은 미국에 살면서, 이 책과 다른 미국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 발견이 이 책을 읽은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미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미국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땅에서 내가 누구인지가 더 선명해진다.

이 책을 손에 들고 미국 어딘가를 걷게 될 당신에게, 그 걸음이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조선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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