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가의 소소한 미국 도시이야기
미주중앙일보 칼럼 선집 Vol.1
에릭신 지음
프롤로그
작은 도시들이 내게 건넨 말
한국을 떠나온 지 스무 해가 지났다.
처음 미국 땅을 밟던 날, 나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짐 속에 함께 구겨 넣고 왔다. 그 가방은 시간이 흘러도 쉬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내게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하게 만들었지만, 마음 한켠에 자리한 적적함은 없애지 못했다. 떠나온 곳의 냄새와 소리, 익숙했던 것들이 유난히 그리운 날이면, 나는 그냥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그저 달리다 보면 어딘가에 닿겠지 싶었다. 그렇게 찾아든 곳들이 모두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는 아니었다.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 미시시피의 강가 마을, 노스다코타의 끝없는 평원에 홀로 박혀 있는 소도시들. 그 이름도 낯선 도시들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적적함을 달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미국은 그 작은 도시들 속에 살고 있었다. 화려한 마천루 뒤편에, 잘 닦인 고속도로 옆길에, 관광 안내서 한 귀퉁이에도 이름이 오르지 않는 그 마을들 속에, 미국의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한 마을의 낡은 교회 하나가 남북전쟁의 상흔을 품고 있었고, 쇠락한 탄광촌 하나가 이민자들의 꿈과 좌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이 거대한 나라, 미국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두꺼운 역사책이 아닌, 편한 친구가 가볍게 꺼내는 이야기처럼. 읽는 분들이 부담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미국이라는 나라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하셨으면 했다. 이민 20년, 50개 주를 떠돌며 내가 마주친 작은 도시들의 이야기를 이제 당신께 건넨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에릭신 씀
목 차
프롤로그 · 작은 도시들이 내게 건넨 말
01 전화 한 통이 만든 UFO 도시, 로즈웰의 진실
02 금광의 유혹과 피의 대가, 커스터 시티의 슬픈 전설
03 모히토 가서 헤밍웨이나 한 잔 하자고
04 콘치 공화국에서 해질녘에 먹는 키 라임 파이의 맛은?
05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곳들–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며
06 감자가 많아 웃는다 – 아이다호 주 소도시 이야기
07 약속의 땅, 탤러해시
08 빵 하나로 몇 명을 오게 하나 – 비숍(Bishop)
09 일상의 여행이 아닌 평범한 공간, 오하이(Ojai)
10 굴러온 도토리가 박히는 도시, 랄리(Raleigh)
에필로그 · 책을 덮으며, 그래도 길은 계속된다.
제 01 화
전화 한 통이 만든 UFO 도시, 로즈웰의 진실
1947년 7월 3일, 윌리엄 브래즐(농부)은 전날 폭풍우에 자신의 목장이 걱정되어 목장을 살펴보던 중 미확인 비행 물체의 잔해를 발견, 동네 보안관인 조지 윌콕스와 지역 신문사에 연락을 한다. 윌콕스는 미국 육군 항공대(아직 미국 공군이 아니었을 때라)에 연락, 육군 항공대 제스 마셀 소령은 7월 7일 잔해를 수거하고 조사한 후, “비행 접시(flying saucer)를 포획했다(capture)”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발표 내용은 24시간 만에 정정된다. 7월 8일 육군 항공대는 잔해가 기상 관측용 기구라고 발표하였고, 지역 신문사는 윌리엄 브래즐이 발견한 것이 은박지와 종이, 테이프 그리고 막대였다고 발표하면서 항공대의 발표를 뒷받침해줬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사람들에게 잊혔다.
1987년 영국의 UFO 연구가 티모시 굿이 그 때의 잔해들이 기상 관측용 기구가 아닌 UFO라고 주장하면서 잊힌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하였고, 윌리엄 브래즐은 자신이 그 날 주운 물질이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주장하고 다녀, 티모시 굿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1989년 잔해 수거를 책임졌던 마셀 소령은 그 날의 그 잔해는 지구의 물건이 아니라고 주장, 또 그의 아들은 그날 밤 아버지가 자신에게 신비한 물건을 보여줬다고 회고하여 이 사건에 관심을 증폭시켰다. 1995년 영국의 레이 산틸리는 자신이 외계인 해부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고, 저명한 인사들을 초대해 시사회를 열게 된다. 그 필름이 그 유명한 《Alien Autopsy: Fact or Fiction?》이다. 전문가들은 이 필름의 제작시기가 1947년 혹은 1967년이라는 감정을 하고, 결국 다큐로 만들어져 전 세계로 방영되게 된다. 그리고 이 필름은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외계인의 전형적인 형태를 심어주게 된다.
나중에 외계인 모형을 제작해준 특수 효과 제작자가 필름에 사용된 외계인의 실체를 실토를 해, 한편의 코미디를 만들긴 했지만, 이 필름은 미스터리한 이 사건을 더 크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건을 알리게 했다. 2005년 12월에는 1947년 “비행 접시(flying saucer)를 포획했다(capture)”라고 발표했던 육군 정훈 장교 윌터 하우스가 자신이 비행 접시 파편과 외계인의 사체를 봤다는 유언을 남겨, 죽는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편견에 기대, UFO와 외계인의 존재를 사실로 만들었다. FBI의 조사관이 윌터 하우스 증언과 관련한 만든 메모(단순 보고용)는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 믿음을 주었고, 이와 관련한 수많은 음모론들과 영화, 드라마, 책들은 신드롬을 만들고, 1997년 6월 24일 미 공군이 발표한 231쪽짜리, UFO는 없으며 외계인의 시체는 낙하산용 인형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는 UFO 이야기를 잠재우려는 의도와 달리 아이러니하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여, 관개 농업, 석유와 천연 가스 산업으로 먹고 살던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로즈웰”을 외계인의 도시, UFO의 도시로 만들었다.
현재 인구 약 48000명의 로즈웰은, 외계인과 UFO이야기로 한 해 25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찾는 테마 관광 도시가 되었다. 매년 7월에는 외계인 분장을 하고, 외계인 음식을 먹고, 이색 체험을 즐기는 UFO 축제가 열려, 최대 4만명의 관광객들을 오게 한다니, 이제는 외계인과 UFO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던 잔해가 발견되었던 곳은 로즈웰이 아닌 100마일 정도 떨어진 “코로나(CORONA)”라는 작은 동네였다. 로즈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신고 전화를 받고 로즈웰에서 온 육군 항공대가 가장 먼저 수사했기 때문이다. 그 차이로 코로나는 인구 129명(2020년 기준)의 마을이 되었고, 로즈웰은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 도시가 되었다. 도시의 흥망을 결정한 것이 전화 한 통이었으니 그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즈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사람들을 반기는 것은, 녹색의 몸체에 검은색 큰 눈을 가진 외계인 인형들이다. 맥도널드, 버거킹, 주유소 등 어느 곳이든 로즈웰을 상징하는 외계인들을 볼 수 있다. 곳곳에는 외계인 기념품 가게들이 있고, 벽에도 외계인들이 그려져 있어, 도시의 개성을 쉽게 볼 수 있다. 뉴멕시코주 평원에 덩그러니 위치해 별 볼일 없던 이 도시가 한 사건으로 이야기가 만들어 지고, 세상의 관심으로 그 이야기는 살이 붙어 미스터리로, 신비함으로 포장되어 새로운 도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이 꼭 가는 곳은, “국제 UFO 박물관(International UFO Museum)”. 거창한 이름과는 많은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로즈웰 사건을 잘 기록, 정리해 두었고, 외계인과 UFO, 또 외계인 해부 필름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여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UFO에 관한 언론사 보도와 개인들의 증언, 고대의 기록, 다양한 창작물까지 전시돼 있어, 작은 도시니까 도시를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방문이 될 것이다. 한쪽에 위치한 기념품 가게에는, 외계인 테마 상품들이 즐비해 있으니, 넉넉한 마음으로 지갑을 열어 로즈웰을 기념하길 바란다. 참고로 이 박물관을 만든 사람은, UFO와 외계인의 사체를 봤다는 유언을 남긴, 윌터 하우스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지만, <사랑과 영혼>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위상을 끌어 올린 중성적 매력의 배우 데미 무어. 1991년 임신한 자신의 나체를 화보로 찍어 임산부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할리우드식 연애의 대표격이며, 최근에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서브스턴스>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 데미 무어. 그녀의 고향이 이곳 로즈웰이다.
포크, 컨트리 가수이자 사회 사업가, 환경 운동가였던 존 덴버. 미국의 자연을 순박한 외모와 미국의 목소리로 노래했던 존 덴버. 1997년 세상을 떠났지만 존 덴버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있다. 시대를 노래했던 존 덴버 고향도 이곳 로즈웰이다.
“Country Roads, take me Roswell, To the place I belong,
New Mexico ~”
제 02 화
금광의 유혹과 피의 대가, 커스터 시티의 슬픈 전설
1876년 6월 25일, 몬태나주 리틀 빅혼 강 근처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가 이끄는 제 7 기병 연대와 시팅 불(Sitting Bull),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가 이끄는 수우족(Sioux), 북샤이엔족(Northern Cheyenne), 아라파호족(Arapaho)의 연합 부대가 부딪쳤다.
남북 전쟁 직후 서부 개척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개척민들의 다툼은 잦아졌다. 이에 미국 정부는 철도 건설을 보호하기 위해 1873년 커스터의 제 7 기병 대대를 다코타 준주에 보내게 된다. 1874년, 커스터는 라코타족의 성지이자 터전이었던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커스터의 발표는 블랙힐스 골드러시의 촉발제가 되었고, 그 때 생겨난 마을 중에는 무법천지로 악명 높았던 데드우드가 있다. 수천 명의 광부들이 금을 찾아 여기에 오면서 자연스레 아메리카 원주민 땅을 침범하게 되었고, 원주민들과 광부들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기존에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맺었던 조약을 수호해야 할 미국 정부는 오히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경고, 이에 분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저항은 1876년 블랙힐스 전쟁으로 이어진다. 제 7 기병 연대의 지휘자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북 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하여, 남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인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이었다. 커스터는 전쟁 후 정규군 중령으로 임관, 서부에 파견되어 아메리카 원주민 전쟁에 참전하여 주로 수우족과 상대했던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2천여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군대보다 수적 열세였던 커스터의 병력. 게다가 커스터는 개틀링 기관총, 야포와 같은 최신 병기들을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가져가지 않았다. 또한 전력 차가 있다는 정찰병들의 조언들도, 지난 승리에 취해 듣지 않았던 커스터. 결국 약 210명의 커스터 부대는 적의 위치도 모른 채 막무가내로 공격하다 리틀 빅혼 강 근처에서 모조리 전멸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침략자인 미 육군을 상대로한 위대한 승리이며, 크레이지 호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웅이 되어 조각상으로 남게 된다. 후에 분노한 미 육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몰고 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쫓아내어 항복을 받고, 제 7 기병 연대는 너무나 끔찍한 운디드니 학살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커스터와 리틀 빅혼 전투의 실상은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서부 영화 <작은 거인(Little Big Man)>에서 잘 나오며, 존 포드 감독의 <아파치 요새> 에도 다루고 있는데, 의외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63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던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춤을> 은 미 육군 기병대와 수우족의 전쟁이 배경이다. 또 미국 2부작 드라마 <Son of the Morning Star>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만들기도 했다. 영화 한 편 보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영상으로 리틀 빅혼 전투를 만나 보시기를 바란다.
서부 개척민들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군인으로 평가받았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잔인하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커스터 시티는 골드 러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정착지였던 곳으로 처음에는 남부 연합 장군 스톤월 잭슨의 이름을 따서 “스톤월”로 명명했지만, 나중에 “커스터(Custer)”로 개명한 도시이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 1,919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앞에서 얘기한 미군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쟁에 무대였던 곳이고, 골드러시의 목적지인 블랙힐스에 백인들이 세운 가장 오래된 곳이기도 하다. 커스터 시티 주변에는 유명한 관광지들이 많이 있어 지금은 관광이 이 지역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미국 대통령 4명의 얼굴이 새겨진 러시모어 마운틴, 리틀 빅혼 전투의 위대한 영웅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이 각각 20분 정도 거리에 있고, 세계에서 동굴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윈드 케이브 국립 공원도 20 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약 1,500 마리의 바이슨이 있고, 엘크, 코요테, 프레리도그 등이 서식하는 야생 동물 보호 구역인 커스터 주립 공원도 가까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커스터 시티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2016년 미국 국가 포유동물(National Mammal)로 지정된 “바이슨(Bison)”. 버팔로(buffalo)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버팔로는 큰 범위의 들소를, 바이슨은 아메리카 들소에 한정해서 부르는 것이니, 바이슨으로 지칭해주는 것이 더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먼저 이 땅에 주인이었던 바이슨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수 천만 마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철도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큰 동물을 사냥하는 재미로, 또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자원을 없애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학살되어 멸종 위기까지 가게 되었으니 아메리카 원주민의 처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보호 노력 끝에 미국 전역에 3만여 마리가 살고 있으며, 미국의 힘과 개척자 정신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어, 흰머리 독수리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동물이다. 바이슨은 옐로스톤 국립 공원에서도, 이곳 커스터 시티 인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13년 후, 그들의 집은 파괴되고, 그들의 버팔로는 사라졌으며, 마지막 남은 수우족은 네브래스카 주 로빈슨 요새에서 백인에게 항복했다. 평원의 위대한 기마민족 문화는 사라지고, 서부 개척지 또한 그렇게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제 03 화
모히토 가서 헤밍웨이나 한 잔 하자고
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and he had gone eighty-four days now without taking a fish.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노인은 지난 84일 동안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꼽는다. 짧고 강렬한 문체인 하드보일드라는 스타일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작품들은 그의 치열한 삶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899년 시카고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대학을 가지 않고 군대를 지원, 하지만 시력이 나빠 입대가 좌절되어 미주리 주에 있는 신문사에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신문사는 기자들에게 짧은 문장을 요구하고, 또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만의 독자성을 찾으라고 강조했다. 기자로서 글쓰기 경험은, 밖으로 들어난 글은 조금이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에 밑바탕이 된다. 적극적 성격이었던 헤밍웨이는 직접 1차 대전을 경험하고 싶어, 9개월만에 신문사를 그만 두고 적십자사에 들어가, 이탈리아에서 구급차 운전수로 일을 했다. 그러나 폭파 현장에서 200개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중상을 입게 되고, 1차 세계 대전의 체험을 바탕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 를 1929년 집필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기자로 돌아가 유럽 특파원이 되어 파리에 가게 됐다. 파리에서 당대의 이름 있는 많은 예술가들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피카소 등- 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자전적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로 25살 나이에 유명한 작가가 됐고, 1928년 키웨스트에 정착하여 여러 작품들을 썼다. 헤밍웨이가 닮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자살에 큰 충격을 먹고, 작품에도 슬픔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스페인,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작품에 배경을 넓혀 나갔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종군 기자로 일을 했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쓰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에도 종군 기자로 또 유럽에 가게 됐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현장도 직접 취재한다. 전쟁이 끝난 후 <노인과 바다>를 쓰고, 이 작품으로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1차 대전 때 입었던 부상과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에 대한 혐오를 키워 나갔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1961년 자신의 엽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삶과 죽음, 운명에 맞선 인간의 승리와 패배라는 주제에 몰두하며 자신의 삶도 그러한 상황에 역동적으로 참여한 인간,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침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바에서 술을 마시며 행복했었던 헤밍웨이의 삶이 있는 곳, 키웨스트.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남서쪽으로 약 130마일 떨어져 있는 미국의 최남단 지역. 오히려 쿠바 하바나가 더 가까운(106마일) 곳. 스페인어 ‘카요우에소(Cayo Hueso; 사람 뼈의 섬)’가 영어화 되면서 키웨스트로 변화되었다고 추정하는데, 미국 최고의 휴양지인 키웨스트가 인골(人骨)이라니 뭔가 으시시하면서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곳. 마이애미에서 1번 도로 남쪽으로 42개의 다리를 건너 대서양과 멕시코만(아메리카만???)이 만나는 마지막 섬, 매년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아름다운 섬 키웨스트.
헤밍웨이의 2번째 아내인 폴린의 부유한 삼촌이 그들 결혼 선물로 장만해 준 어니스트 헤밍웨이 하우스(907 Whitehead Street). 여기에서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을 썼고, 이혼 후에는 하바나에서 돌아올 때만 이 집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매우 좋아했다. 누군가가 다지증(polydactyl)을 갖고 있는 메인쿤 품종의 고양이를 선물했고, 헤밍웨이는 이 집에서 이 고양이를 키웠다. 지금은 이 고양이의 후손 60여마리와 헤밍웨이가 집필할 때 사용했던 타자기만이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언제든 관광객의 접근이 금지된 헤밍웨이의 침대와 작업실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다지증 고양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원에 있는 수영장 북쪽 끝에는 헤밍웨이 부부 싸움의 흔적인 1센트 동전도 만날 수 있으니, 문학의 흥미를 떠나서라도 이 곳을 찾는 재미가 충분하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키웨스트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하우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 곳은 헤밍웨이의 웅장한 저택과는 다르게 매우 소박한 곳이다. 헤밍웨이와 윌리엄스는 같은 시기에 키웨스트에 살았지만, 그들이 만난 것은 쿠바에서 단 한 번뿐이라고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골 바였던 “슬로피 조스 바(Sloppy Joe’s Bar)”에 찾아가서 모히토 한 잔을 마셔 보는 것은 어떨까. 럼 베이스에 민트와 라임의 색과 향이 시원함을 주는 모히토. 헤밍웨이가 즐겨 마시던 칵테일이라고 한다.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에 있을 때 자주 찾던 이 곳에서 헤밍웨이가 좋아했던 모히토 한 잔은 헤밍웨이를 추억하기에도 라이브 음악에 흥을 내기에도 정말 좋을 것이다. 매년 7월에는 헤밍웨이의 삶을 기념하는 행사도, 헤밍웨이 닮은 꼴 콘테스트도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다.”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순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제 04 화
콘치 공화국에서 해질녘에 먹는 키 라임 파이의 맛은?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 매우 작은 지역 내에서 국가의 요소를 갖추지 못하고 독립 국가임을 주장하는 주체. 일부 공동체에서는 실제 독립을 선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통화나 국기, 여권, 메달, 우표, 이외에도 상징물이나 법률, 정부 등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1982년 미국 국경경비대(United States Border Patrol)가 마약과 불법체류자의 유입을 막으려고 1번 국도를 막고 차량 검문을 실시했다. 그 결과로 키웨스트에 트래픽이 심해지고, 관광객의 숫자도 줄어들게 됐다. 이에 키웨스트 시 의회는 미 연방 정부의 봉쇄 정책이 도시의 관광 산업을 위축시킨다고 항의하고 정책이 무효라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항의의 의미로 키웨스트 시장 데니스 워들로(Dennis Wardlow)와 키웨스트 시 의회는 1982년 4월 23일 콘치 공화국(Conch Republic) 독립을 선포했다. 콘치(Conch, 소라)는 키웨스트 사람들이 주로 먹기도 하고, 또 키웨스트 사람들을 지칭하는 속어이기도 해, 키웨스트의 정체성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국명이었다. 워들로 시장은 콘치 공화국의 총리를 자처하고, 미국에 선전 포고(상징적으로 미국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의 머리 위로 빵 한 덩어리를 깨뜨렸다)를 했지만, 1분 만에 항복(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에게), 10억 달러 규모의 대외 원조를 요청했다. 결국 미 연방 정부의 봉쇄 정책은 폐지되었다.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콘치 공화국(Conch Republic)은 매년 4월 23일 독립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곳곳에 콘치 공화국의 깃발이 나부끼며, 키웨스트 사람들에게는 그들 만의 자부심을, 또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하여, 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도시 만의 이야기가 도시의 가치를 올려주었다.
워싱턴D.C.에만 백악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워싱턴D.C.에 가면 꼭 가는 곳 중에 하나가 백악관이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을 워싱턴D.C.까지 가서 어떻게 안 보고 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키웨스트에 또다른 백악관이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에 성공한지 한 달여 만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미국 33대 대통령이 되었던 트루먼 대통령. 2차 세계 대전 말부터 냉전기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후 세계 질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트루먼 대통령(Harry S. Truman). 한국 전쟁에 미군을 파병해서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트루먼 대통령이 휴식이 필요해 키웨스트를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곳으로, 11번 방문을 해 175일 동안 머무르며 휴식도 취하고 업무도 보았던 겨울 백악관, 리틀 화이트 하우스(Little White House). 트루먼 대통령이 방문하기 전에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대통령도 방문했었고, 1차 세계 대전 때는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머무르며 41개의 무기들을 발명했었다. 트루먼 대통령 이후에도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대통령이 요양 차 머물렀고, 존F케네디 대통령(John Fitzgerald Kennedy)은 이곳에서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었다. 지금은 사적지 겸 박물관으로, 키웨스트의 명소가 되었다.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합의 해군 장관이었던 스티븐 러셀맬러리(Stephen Russell Mallory)의 이름을 딴 맬러리 스퀘어(Mallory Square). 부두와 낚시터였던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웨스트 일몰(Sunset Celebration)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키웨스트 일몰 축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가 지평선 아래로 지는 해에 박수를 보내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매일 일몰 2시간 전부터 거리 공연, 푸드 카트, 예술품 전시 등이 열리고, “See you at Sunset!”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맬러리 스퀘어에서 함께 키웨스트 일몰을 만나고 있다. 미국의 남쪽 끝에서 만나는 석양은 분홍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키웨스트의 추억을 만들어준다.
비타민 C가 많아서 영국의 선원들이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해 먹었다는 라임(lime). 독특한 향과 레몬 보다 단맛이 더 있어 미국 가정에서 향료로 자주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플로리다 주에서 최초로 재배했는데, 1906년 허리케인 이후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파인애플 재배를 금지하게 되고 라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플로리다 주에서 유명한 라임은 흔한 종류인 페르시안 라임보다 크기가 작고 껍질이 얇은 키 라임(key lime)이다.
키 라임은 노란 빛 바탕에 연두색을 띄고 있는데, 살균 효과도 뛰어나고, 간의 해독을 도와주며, 소화 촉진, 두통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키웨스트 사람들은 1912년 철도가 놓이기 전에는 신선한 우유를 마시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단맛이 추가된 농축 우유(연유)를 주로 마셨는데, 연유는 파이의 커스터드를 만들기에 적합하다. 키 라임이 갖고 있는 산 성분은 계란 노른자와 우유가 섞일 때 파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처음에는 파이를 굽지 않았다. 지금은 식품 안전성 때문에 단시간에 굽는 과정이 있다. 키 라임과 연유를 주재료로 만드는 키 라임 파이(Key lime pie)는 키웨스트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짙은 노란색의 키 라임 파이는 향긋하고 시큼하게 맛으로 키웨스트를 기억하게 만든다.
“Key West’s spirit, every hour is happy hour”
제 05 화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곳들–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며
“Zzyzx”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 ‘찌즉스’, ‘지이즈윽’ … … 영어 발음 기호는 [/ˈzaɪzɪks/ZY -ziks], 다들 한 번 발음해보기를 바란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곳은 15번 북쪽을 타고 라스베이거스로 달려가다 보면 “Zzyzx Rd” 라고 써 있는 초록색 표지에서 먼저 만날 수 있다. 그 표지판을 따라 조금만 달리면 이름도 특이하고, 역사도 특이한 조그만 도시가 나온다. 대체 이 곳은 어떤 사연이 있어 이리 부르기도 힘든 이름을 달고 있을까?
커티스 하우 스프링거(Curtis Howe Springer)는 1944년 “Zzyzx” 라는 전화번호부의 마지막에 실린다는 이름을 이 지역에 붙이고, 이곳에 60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 교회, 스튜디오 등을 갖춘 스파(Zzyzx Mineral Springs and Health Spa)를 만들고 운영했다. 그는 목사이자 의사였으며, 수십 년 동안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이기도 했다. 그의 유명세에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만든다는 여기 스파를 방문하였고, 스프링거는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강 식품도 판매하였다. 심지어 너무나 많은 고객들에게 소포를 발송하려고 인근 도시인 베이커에 우체국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스프링거가 판매한 건강 식품에 불만을 가진 고객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내부 고발자가 나와 건강 식품의 재료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폭로하였고, 스프링거도 알고 보니 목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닌 그냥 사기꾼이었다. 또한 그가 운영했던 스파의 미네랄 온천도 보일러로 덥혔던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다. 스파 부지도 연방 정부 소유지를 불법으로 점유한 것이 적발되어 1974년 유죄 판결을, 건강 식품 허위 광고도 유죄 판결을 받고 스프링거는 감옥에 가게 되었다. 1976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CSU)이 인수하여 이 리조트를 사막 연구 센터로 전환하여 현재는 일반인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주변에 물들이 많아 다양한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Zzyzx”는 이름만큼 기묘한 사연을 갖고 있는 곳이라 지나가며 잠깐 들릴만한 가치가 있는 소도시이다.
“Zzyzx”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사막에 우뚝 서 있는 큰 온도계를 볼 수 있다.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온도계가 있는 이 도시는 베이커. 인구 442명(2020년 조사)밖에 안 되는 이 곳은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또는 데스밸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을 가는 관광객들이 주유를 하거나 음식을 먹으려고 들리는 소도시이다. 1913년 데스밸리에서 기록된 가장 높은 온도인 134°F(56.7°C)를 기념하기 위해 134피트(약 43.6미터) 높이로 1991년에 만든 거대한 온도계는, 당시 70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고, 강풍에 그만 반으로 부러져 다시 만들기도 하였다. 온도계의 주인이 바뀌면서 월 8천 달러 정도의 전기세가 부담이 되어 2012년에 운영을 중단하였다. 온도계가 사라질 것이 걱정되어 처음 만들었던 사업가의 미망인이 다시 사들여 2014년 7월 다시 운영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연 많은 온도계는 라스베이거스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베이커라는 도시를 기억하게 해주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충분히 제 몫 다하는 베이커 홍보 도우미라 할 수 있겠다.
1967년에 나온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원제는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인데, 당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 제목을 바꾸어 한국에서 상영되어, 영화 “졸업”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에 연쇄 강도·살인을 벌인, 보니 엘리자베스 파커(Bonnie Elizabeth Parker)와 클라이드 체스넛 배로(Clyde Chestnut Barrow)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실제 이 커플은 털기 쉬운 서민들의 상점들을 강도 대상으로 했고, 강도를 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던 범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젊은(19세, 21세) 커플들의 잔인한 범죄는 미화된 소문과 과장된 언론 보도로 희망 없는 암울했던 대공황 시대에, 미국 서민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서민들을 힘들게 했던 은행들을 강도질하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고, 그들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 커플의 마지막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만큼 잔혹했다. 1934년 5월 23일 루이지애나 주에서 그들의 동선을 알고 있던 6명의 경찰들에게 사살당했는데, 보니와 클라이드가 탄 자동차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오자 6명의 경찰들은 약 150여 발을 쐈고, 보니와 클라이드는 자동차 안에서 즉사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네바다주로 바뀌는 경계선에 프림(PRIMM)이라는 도시가 있다. 원래 스테이트 라인(State Line)이었던 곳이 네바다 북부에 같은 이름 도시와 혼동을 피하고, 또 도시의 설립자를 기리기 위해 1996년 프림으로 개명했다. 이 도시는 네바다를 떠나기 전 마지막 기회(?)를 주는 카지노를 기반으로 하는데, 고객 유치를 위해 예전에는 위스키 피트스 호텔 앤드 카지노(Whiskey Pete’s Hotel & Casino)에 보니와 클라이드가 마지막에 탔던 150발의 총알을 맞은 자동차를 전시하였다. 이 자동차는 2022년에 프림 밸리 카지노(Primm Valley Casino Resorts)로 옮겼고, 자동차와 함께 그들이 마지막에 입었던 총 맞은 옷까지 전시되어 있으니 이 영화를 추억하거나, 굳이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프림에 멈출 이유가 있다.
제 06 화
감자가 많아 웃는다 – 아이다호 주 소도시 이야기
감자는 벼, 밀, 옥수수와 함께 4대 작물에 해당한다. 또 고구마, 옥수수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로 인류를 기아(飢餓)의 공포에서 구제한 고마운 작물이기도 하다.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페루와 에콰도르 등 안데스 산맥 일대이며, 멕시코가 원산지인 옥수수와 더불어 신대륙 작물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대항해 시대에 항해용 비상 식량으로 사용되었고, 16세기 중후반에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처음 만나게 되는 식품은 호기심도 생기지만 두려움과 거부감을 만들기도 한다. 감자도 예외는 아닌데, 당시 유럽은 종교적 해석에 근거해 씨가 있어야 식물로 인정을 했는데, 감자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지만, 씨를 뿌려 재배하는 것이 아닌 시체를 잘라 파묻듯이 하는 재배 방법이 기괴하여 ‘악마의 작물’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감자를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부정한 작물이며 신이 허락하지 않은 작물로 생각했다. 또한 솔라닌 성분이 있는 싹이 난 감자를 먹고 복통과 부작용을 겪으며 감자에 대한 오해는 더욱 단단해졌다. 게다가 감자를 잘랐을 때 변하는 표면 색깔을 음란하다고 여겨 최음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감자를 주식으로 하면서 영양 상태가 좋아진 아일랜드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그 소문은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심지어 감자를 먹으면 한센병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돌아 감자는 혐오 식품이 되어 돼지 사료나 관상용 작물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력(地力)을 소모하지 않고, 재배도 쉽고, 영양가도 훌륭하여 흉년과 기근에 구황작물로 이용할 수 있어, 상류층이 서민들에게 감자를 보급하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혐오 식품이었던 감자를 보급하려고, 낮에는 일부러 엄중하게 감자 밭을 감시하게 하고, 저녁에는 감시병들을 철수시켜 감자를 훔쳐가도록 유도하였다. 또 감자가 왕이 먹는 음식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주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2세 별명이 ‘감자 대왕’이다. 영국은 감자를 사료로만 사용하였기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 징세와 판매 대상이 아닌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하였다. 감자 덕분에 아일랜드 인구는 4배 가까이 급증하게 된다. 그러나 1845년 감자 역병으로 대기근이 발생해 100만 명 정도가 아사(餓死)했고, 약 150만 명이 미국과 캐나다로 살기 위해서 떠나게 되었다. 참고로 지금 아일랜드계 미국인 수가 약 3860만 명(2020년 통계) 이다. 이 때 아일랜드인을 통해 미국에도 감자가 보급되면서 ‘감자튀김(French Fries)’이라는 미국인의 소울 푸드가 탄생하게 된다. 현재는 1인당 연간 62㎏정도를 소비하며, 생산량은 연간 약 2천만톤으로 세계 5위 정도이다.
아이다호(IDAHO) 주는 미국 감자 생산량의 1/3을 차지하는 주요 생산지로, ‘감자=아이다호’라는 수식을 갖고 있다. 대략 12,000 명이 사는 아이다호 주 블랙풋(Blackfoot)에는 감자의 오랜 역사와 다양한 감자들을 만날 수 있는 감자 박물관(Idaho Potato Museum )이 있다. 감자가 주산업인 이 도시는 감자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을 부각하고 감자로 관광객들을 끌어오기 위해, 철도역을 개조하여 감자 박물관을 만들었다. 매년 45,000 명 정도가 방문한다는 이곳에는 P&G의 프링글스에서 기증한 세계 최대 규모의 감자칩이 전시되어 있고, 감자의 역사관도 있으며, 1600년 정도 된 페루산 감자 저장 용기도 있다. 또한 감자 명예의 전당도 있어, 우리에게 고마운 감자를 위해 잠시 들려볼 만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 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 웃음은 나 자신도 행복하게 만들지만 내 주변도 행복하게 만드는 묘약(妙藥)이다. 그런데 웃지 않으면 불법인 도시가 있다. 인구 56,320(2020년 통계)명이 살고 있는 아이다호 주 포카텔로(Pocatello)라는 도시는 웃지 않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는 조례가 있었다. 1948년 13주 연속 눈보라, 강풍, 영하의 기온으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던 포카텔로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서 당시 시장이었던 조지 필립스는 시민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찡그린 표정이나 침울한 표정, 위협적인 표정 등을 금지하는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표정이 좋지 않으면 체포될 수 있으며, 유죄 판결을 받으면 지정된 장소(Smileage Station)에 가서 범죄(?)에 상응하는 웃음을 지어야 한다. 이 조례는 단 일주일만 시행됐지만 폐지되지 않아서 지금은 집행할 수는 없고 법률에만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1987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포카텔로는 스마일의 수도(The U.S Smile Capital)로 지정되었다. 포카텔로는 미소의 날을 연례 행사로 제정하고, ‘미소 경연 대회’, ‘웃지 않는 사람 체포 행사’ 등을 만들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있다.
웃음 하나로만은 이 도시를 방문하기가 저어된다면, 깨끗함을 강조하는 청소박물관(Museum of Clean)도 같이 가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진공 청소기를 전시하는 이곳은 청결을 최우선의 가치라는 모토로 다양한 화장실 변기를 전시하고, 생활 용품의 역사도 볼 수 있으며 청소 관련 서적과 영상들도 준비되어 있다. 또한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청소 오케스트라도 있으니 시간 내어 들려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포카텔로 시 홈페이지에는 “Join the fun and help us celebrate the universal language of a smile! Keep Smiling!” 라는 문구가 있다. 웃음 많고 깨끗한 도시 포카텔로는 그냥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곳일 것이다.
제 07 화
약속의 땅, 탤러해시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 ~ 1763년)에서 승리한 영국은 과다한 전쟁 비용으로 인한 재정난이라는 원치 않는 선물을 받게 된다. 전쟁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영국 시민들에게 재정난을 해소할 수 있는 세금을 더 걷을 수는 없기에, 영국 정부는 식민지인 미국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1764년 설탕, 커피, 포도주에 가벼운 관세를 부과하는 <설탕법>, 1765년 신문, 인쇄물, 공문서 등에 인지를 붙이도록 하는 직접세인 <인지법>, 1767년 종이, 유리, 잉크, 차(TEA) 등에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법>을 제정하였다. 세금을 내본 적이 별로 없던 미국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여 1770년 유혈 충동이 벌어지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영국 의회는 차에 대한 세금을 제외하고 <타운센드법>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1773년 12월 16일 일명 ‘자유의 아들들은’ 원주민 분장을 하고, 보스턴 항구에 정박중이던 동인도 회사의 차 상자를 바다에 버리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영국은 미국인들에게 강압적인 통치를 하게 됐고, 그 결과로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과의 전쟁, 즉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독립 전쟁이 일어난 여러 배경이 있었겠지만, 세금이 큰 원인 중 하나일 정도로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세금을 피하고 싶어한다. 건국의 아버지 중에 하나이자 $100지폐의 주인공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면(In this world, nothing can be said to be certain except death and taxes.)” 라고 얘기할 정도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즙 짜기 대회를 했는데 1등이 국세청 직원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연방 정부 기관이 IRS(Internal Revenue Service, 국세청) 라고 한다. 물론 어떤 나라든 세금을 징수하는 기관을 좋아하진 않겠지만, 미국인들은 IRS를 더 싫어하고 더 두려워한다. 악명 높은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를 알카트라즈 감옥에 집어넣은 것도 탈세일 정도로 IRS 범죄 수사국(Criminal Investigation Division, IRS-CID)은 어떤 국가 기관보다 권위가 있고 힘에 센 기관이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하면 저항을 최소화하며 국가 재정을 확보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늘 할 수밖에 없다. 세수(稅收)를 확보하는 어떤 것보다 효과적이며 조세 저항이 없는 최고의 수단은 복권이다. 미국은 1612년 제임스타운 건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버지니아 복권을 발행한 것이 최초이다. 영국은 미국 식민지 개발 비용을 복권 수익으로 대체하였고, 심지어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도 복권 수익금으로 세웠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독립 전쟁 등의 자금들도 복권을 통해 마련했으니, 미국의 역사와 복권의 역사는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많은 복권들 중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정해진 개수의 숫자들 중에 몇 개의 숫자를 맞히면 당첨되는 복권의 일종인 로또(LOTTO)로 그 중에도 파워볼(POWER BALL)과 메가밀리언(MEGA MILLIONS)이다. 각각 1992년, 1996년에 추첨을 시작했다. 두 복권 모두 맞춘 사람이 나올 때까지 계속 당첨금을 이월하는 시스템이라 천문학적 잭팟이 가능한 구조이다. 로또 복권의 매출이 부진하자, 메가밀리언은 2013년에, 파워볼은 2015년에 묘수를 꺼내 들었다. 전체 당첨확률을 높이면서 잭팟 당첨 확률은 낮추는, 즉 당첨금 4달러, 10달러짜리 같은 하위 등수 당첨은 쉽게 하고, 대신 1등 당첨은 어렵게 만드는 묘수이다. 파워볼 1등 당첨 확률은 1억 7천5백만분의 1에서 2억 9천2백만분의 1로 확 줄어들었다. 1등 당첨자가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누적 금액이 이월, 이월, 또 이월됐고, 파워볼 광풍은 복권 관련 각종 기록을 죄다 갈아치웠다. 메가밀리언도 당첨 확률 조정 이후 1등 당첨자가 상당기간 나오지 않으면서 누적 금액이 폭발했고, 급격한 복권 매출 신장으로 이어졌다. 복권판매가 늘면 조세수입도 증가하기에 복권 업체도, 정부도 같이 웃고 있다. 복권 추첨은 2분 정도 걸리는데, 메가밀리언은 매주 화·금요일 밤 11시(동부 시간 기준)에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추첨을 하고, 파월볼은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토요일 밤 10시 59분에 복권 사업 본부가 있는 곳, 플로리다주의 탤러해시에서 추첨을 한다.
‘오래된 땅’이라는 뜻의 탤러해시(Tallahassee). 플로리다가 미국에 편입할 때 2개의 주도가 있었다. 동쪽에 세인트오거스틴(St. Augustine)과 서쪽에 펜서콜라(Pensacola). 1824년 두 지역의 중간 지점인 탤러해시가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플로리다의 주도가 되었다. 20만명(2024년 기준)이 약간 넘는 이 곳은 플로리다 주립대학교(Florida State University), 플로리다 A&M 대학교(Florida A&M University), 탤러해시 주립 대학(Tallahassee State College)이 있는 학생 인구만 70,000 명이 넘는 대학 도시이다. 또한 플로리다 주 의사당, 플로리다 대법원, 플로리다 주지사 관저, 그리고 거의 30개의 주 정부 기관 본부가 있는 공공 도시이기도 하다. 남북 전쟁 때 남부 주도 중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탤러해시는 플로리다 역사의 자취가 있는 고아(高雅)한 옛 저택들과 1974년 도시 계획으로 만들어진 현대적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구청사에 위치한 플로리다 역사 박물(Florida Historic Capitol Museum), 야생 동물을 체험할 수 있는 탤러해시 박물관(Tallahassee Museum), 클래식 자동차와 배트맨 차가 있는 탤러해시 자동차 박물관(Tallahassee Automobile Museum), 노예 제도와 옛 농장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굿우드 박물관(Goodwood Museum & Gardens) 등, 즐길 수 있는 많은 박물관들이 있으니 한번쯤 찾아갈 만한 곳이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 위치한 복권사업본부 지하에 설치된 스튜디오에서 매주 세 번 파워볼을 추첨하니, 새로운 약속의 땅 탤러해시의 기운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제 08 화
빵 하나로 몇 명을 오게 하나 – 비숍(Bishop)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여 소금, 설탕, 버터, 효모 따위를 섞어 반죽하여 발효한 뒤에 불에 굽거나 찐 음식, 서양 사람들의 주 음식”을 우리는 ‘빵’이라고 한다. ‘빵’은 포르투갈어 ‘pão’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빵(パン, 판)’으로, 그리고 한국에 유입되면서 ‘빵’으로 자리 잡은 외래어이다. 빵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들 중 하나이며,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빵은 산업화되고, 기계화로 대량 생산되면서 세계인들의 주식으로 사랑받고, 한국에서도 식생활 개선으로 빵 소비가 급속하게 증가되었다. ‘빵은’ 기본적 생계 유지 수단이자 필수적인 음식이며, 종교적으로는 영혼의 양식, ‘빵’을 나누는 행위는 공동체 의식과 화합을 다지는 의미로, ‘빵’의 보급은 사회적 안정을 뜻하는 등 ‘빵’은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갖고 있다. 한국의 빵 소비자 물가 지수는 138.61(2020년=100)로 미국, 일본, 유럽 등 다른 나라보다도 비싸 빵과 인플레이션을 조합한 ‘빵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요즘은 ‘990원 소금빵’이 화제가 되고 있을 정도이다. ‘성심당(聖心堂)’이라는 빵집은 ‘대전의 성심당’이 아닌 ‘성심당이 있는 대전’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전에 오게 만든다고 할 정도니 ‘빵’ 사랑들이 대단하다.
캘리포니아 인요카운티(Inyo county)에 있는 비숍(Bishop)은 오웬스밸리(Owens Valley) 북쪽 끝 부근, 고도 4,15피트(1,260m)에 위치한, 인구 4000 명도 안 되는 조그만 도시이다. 1861년 새뮤얼 애디슨 비숍(Samuel Addison Bishop)은 오웬스밸리가 소를 기르기에 적합한 곳이라 판단하여 지금의 포트 테혼(Fort Tejon)에서 소 600마리와 말 50 마리를 끌고 오웬스밸리에 도착하여 세인트 프랜시스 목장(San Francis Ranch)을 설립하고, 캘리포니아와 경계에 있던 네바다주 오로라(Aurora)의 광부들에게 소고기를 팔았다. 참고로 그 당시 오로라의 주민 중 한 명이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였는데, 그는 나중에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미국 최고의 작가가 된다. 그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짓게 된다. 19세기 후반에는 로스앤젤레스가 커지면서 물이 부족해지게 되자, 비숍이 있는 오웬스밸리의 물을 로스앤젤레스로 끌어가면서 오웬스밸리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고, 오쉔스밸리와 로스앤젤레스의 갈등은 잭니콜슨이 주연한 1974년 영화 <차이나타운>의 모티프가 된다. 지금은 LA 수자원 보호로 비숍은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비숍에는 한 해 250만명(2021년 기준)이 찾아오는 빵집이 있다. 에릭 샤츠 베이커리(Erick Schat’s Bakkerÿ)라는 곳으로 1903년 비엔나 출신의 쇼흐 가족이 시작한 빵집이다. 미국 서부에 이주하여 양치기로 일했던 바스크 이민자들을 위해 빵집을 세웠는데, 돌 오븐을 사용하여 빵을 굽는 것으로 유명했다. 1950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온 잭 샤츠(Jacob “Jack” Schat)가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샤츠는 결국 이 곳을 인수하였다. 아들인 에릭이 2021년까지 사장으로 있으면서 이름을 에릭 샤츠 베이커리로 바꿨다. 캘리포니아 395번 도로를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의 명소가 된 이 빵집에 가장 유명한 빵은 양치기 빵이다. 옛 방식 그대로 지금도 굽워 바스크 지역 고유의 맛을 보존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전통적인 빵들의 종류도 다양하고, 바삭한 빵과 신선한 재료로 만든 샌드위치도 맛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100년이 넘은 빵집 하나가 소도시 비숍을 두 번 세 번 오게 하니, 웬만한 유적지와 자연 경관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다.
비숍에는 빵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0개가 넘는 볼더링(Bouldering)이 있는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고, 주변에 험프리스 산 (4,263m), 화이트 마운틴 피크 (4,341m), 톰 산 (4,163m), 베이슨 산 (4,019m) 등이 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또한 “세계 노새의 수도”인 비숍에는 매년 메모리얼 데이에 6일간 노새 축제인 ‘비숍 뮬 데이즈(Bishop Mule Days)’가 열린다. 1969년 시작한 이 축제는 현재 700마리가 넘는 노새들이 181개 종목에 참여하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새 축제가 되었다. 특히 395번 도로를 따라 메모리얼 데이 전날 아침에 열리는 도보 또는 노새나 말만 가능한 퍼레이드가 아주 유명해 많은 사람들을 이 도시에 오게 만든다. 또 오래된 나무들이 있는 숲인, ‘고대 브리스틀콘 소나무 숲(Ancient Bristlecone Pine Forest)’이 비숍 주변에 있다. 이 숲에는 4800년이 넘는 수명을 가진 메투셀라(Methuselah pine tree)와 트레일(Methuselah Grove trail)이 있어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캘리포니아 남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숍은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매년 10월이 되면 한국에서는 사시나무라고 하는 아스펜 나무(Aspen trees)가 만드는 노란 빛이 이 도시를 물들게 한다. 아스펜덴(ASPENDELL) 마을에서 사브리나 호수(Lake Sabrina)에 이르는 길은 황금빛 잎새들로 반짝여 가을이 색으로 왔음을 알 수 있다. 높은 곳에 있어 거울처럼 맑은 사브리나 호수는 노란 빛을 투영해 이 곳만의 절경을 만든다.
제 09 화
일상의 여행이 아닌 평범한 공간, 오하이(Ojai)
한 작가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의무의 공간’이라고 표현한 것이 내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 주변은 언제나 해야할 일로 가득 차 있다고 얘기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사소한 일도, 언젠가는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이 늘 우리에게는 있다. 이런 ‘의무’에서 벗어나려 우리는 여행을 한다. 채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덜어내기’ 위해서도 여행을 한다. LA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운전하면 보통의 여행과는 다른 여백이 있는 오하이(Ojai)를 만날 수 있다. 보통의 여행은 채우기 위해서 한다. 유명한 맛집에 줄을 서고, 랜드마크에서 사진을 찍고, 촘촘한 일정표를 해치우듯 여행하곤 한다. 하지만 산타바바라 동쪽, 벤투라 카운티에 위치한 오하이(Ojai)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당신의 일상을 덜어내라.”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추마시(Chumash)어 ‘Awha’y ‘(달)에서 유래된 오하이(Ojai)는 1837년 페르난도 티코라는 사업가가 멕시코로부터 란초 오하이 소유권을 받아 소 목장을 운영하며 개발되기 시작했다. 1874년 부동산 개발업자 알지 서댐(R.G. Surdam)이 이곳에 이주했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찰스 노드호프의 이름을 빌려 이곳을 ‘노드호프(Nordhoff)’라 명명했다. 이곳에 있는 노도프 주니어 하이 & 하이 스쿨(Nordhoff Junior High & High School)은 이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부유한 동부 사람들에게 겨울 휴양지로 인기를 끌었던 노드호프(Nordhoff)는 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에 반 독일 정서가 심해지면서 1917년 ‘오하이(Ojai)’로 이름을 바꿨다. 1917년 두 번의 화재로 마을의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고, 20세기 초 미 서부에서 유행하던 스페인 식민시대 복고풍 건축 양식으로 마을을 재건하였다. 지금 오하이(Ojai) 랜드마크인 다운타운 아케이드의 둥근 아치형 기둥과 높이 선 종탑이 그 스타일이다. 1933년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을 집필할 때, 오하이(Ojai) 계곡의 평온하고 신비로운 풍경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곳의 풍경을 바탕으로 영원한 행복과 평화가 존재하는 낙원 ‘샹그릴라’를 묘사했다. 그래서 오하이(Ojai)는 ‘미국의 샹그릴라(Shangri-La)’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느리고 졸린 마을’의 매력으로, 바쁜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을 권하고 있다.
오하이(Ojai)에는 체인점이 없다. 일부 주유소 체인점과 은행이 있지만 이마저도 면적 제한이 까다롭다. 시 조례를 통해 체인점 입점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부 시민들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대다수 주민들이 거대한 자본으로부터 독립하고 독특한 분위기의 마을을 만드는데 찬성했다. 미국 어디든 볼 수 있는 스타벅스, 맥도널드와 같은 체인점을 여기선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수십 년 된 중고 서점, 동네 농장에서 갓 가져온 유기농 농산물을 파는 마켓, 로컬 예술가들의 작업실이다. 거대한 시스템 대신 조금은 투박하고 느린 ‘로컬의 리듬’에 나를 맡기다 보면, 효율성만을 따지던 일상의 강박이 자연스럽게 덜어지며 묘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오하이(Ojai)에서는 기다려야 한다. 해 질 녘, 오하이 밸리를 감싸고 있는 토파토파 산맥(Topatopa Mountains)은 마법 같은 색을 만들어낸다. 태양의 잔광이 산맥의 암벽에 반사되어 온 세상을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핑크 모먼트(Pink moment)’의 시간이다. 이 짧은 찰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산을 바라본다. 늘 손에 쥐던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빛이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그 순간, 복잡했던 머릿속 생각들은 핑크빛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자연이 주는 시각적 휴식인 이 때, 자연과 인간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어떤 이들은 정서적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명상의 감각을 자극한다. 인도 출신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는 인생의 대부분을 오하이(Ojai)에서 보냈다. 그는 이곳의 평온함 속에서 인류의 근원적인 자유와 명상에 대해 탐구했고, 그가 머물던 곳은 크리슈나무르티 교육 센터가 되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명상과 자기 성찰의 공간을 제공한다.
오하이(Ojai)의 ‘덜어냄’을 상징하는 공간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바츠 북스(Bart’s Books)’이다. 1964년에 시작된 이 서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서점’ 중 하나이다. 지붕도, 벽도 없이 나무 아래 책들이 꽂혀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햇살을 받으며 책장을 넘긴다. 서점이 문을 닫은 밤에도, 길가에 놓인 책장에 동전을 던져 넣고 책을 가져가는 ‘무인 시스템’이 운영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이 소박한 방식은, 현대 사회의 불신과 그 거래 양식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선함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편리한 리조트와 화려하고 자극적인 콘텐츠 대신, 작고 조용한 가게와 평범한 하늘이 이어진 이곳은 “할 게 없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곳이라 금세 떠나게 만드는 곳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할 게 없다.”를 받아들인 어떤 사람들에게는 해야할 압박이 사라져,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계기를 줄 수도 있다.
글이 전혀 써지지 않던 상태로 슬럼프를 겪고 있던 어느 작가가 오하이에 머물렀다. 며칠 동안 그는 아무 것도 쓰지 못했고,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길가에 오렌지 나무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뭐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이후 다시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영감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머릿속 소음이 사라졌을 뿐이다.”
제 10 화
굴러온 도토리가 박히는 도시, 랄리(Raleigh)
12월 31일 저녁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의 다운타운으로 몰려온다. 저녁 7시에는 가족 단위 행사가 열리고, 밤 12시가 되면, 새해맞이 카운트와 함께 도토리 드롭(Acorn Drop) 행사와 불꽃 놀이를 진행하여 도시의 새해를 시작한다. ‘참나무의 도시(City of Oaks)’로 불리는 랄리(Raleigh)만의 새해 맞이다. 타임 스퀘어의 규모와 유명세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자칫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작은 도토리 하나에 랄리(Raleigh)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이름도 생소한 ‘랄리(Raleigh)’는 어떤 매력이 있어 미국에서 살고 싶은 도시로 늘 꼽힐가?
랄리(Raleigh)는 16세기 영국 탐험가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에서 이름을 따와 1792년 12월 31일 공식 설립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월터 롤리 경은 정작 이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다. 이곳은 처음부터 주도로 계획된 도시로, 다른 도시들은 먼저 생긴 후 주도가 된 것과 달리, 랄리(Raleigh)는 시작부터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주도였다. 도시 설계도 독특했다. 당시 대부분의 도시들이 자연을 정복하여 발전했지만 랄리(Raleigh)는 참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들을 중심으로 도로와 광장을 설계했다. 개발이 자연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맞추어 도시가 들어선 것이다. 그 덕에 ‘참나무의 도시(City of Oaks)’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별명에 맞게 이곳에는 녹지 공간이 많다. 도시 안에만 200개가 넘는 공원이 있고, 그린웨이(Greenway)라는 산책로 네트워크가 100마일 이상 조성되어 있다. ‘자연과의 가까운 거리’, 랄리(Raleigh)의 매력 중 하나이다.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먹고살려고”라는 변명은 어느 정도 사람들의 눈을 감게 만든다. 자연이 좋아도, 먹고살 것이 있어야 사람들은 그곳에 산다. 랄리(Raleigh)에는 ‘일자리’가 있다. 이곳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리서치 트라이앵글(Research Triangle)’이다. 랄리(Raleigh), 더럼(Durham), 채플힐(Chapel Hill) 세 도시를 잇는 이 지역은 기술 기업 4,000개 이상, 생명과학 기업 600개 이상이 밀집한 곳으로, 구글·시스코·오라클·화이자·바이오젠·피델리티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거점을 두고 있다. 이 삼각형의 힘은 세 도시에 자리한 명문 대학에서 나온다. 랄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NC State), 더럼의 듀크 대학교, 채플힐의 UNC가 끊임없이 인재를 공급한다. 그리고 이 대학들을 중심으로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라는 대규모 연구단지가 형성돼 있다. 랄리(Raleigh)는 미국 내에서도 고학력 인구 비율이 높은 도시로 꼽히며, 기술·의료·연구 분야 일자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랄리의 실업률은 3.3%로 전국 평균 4.2%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일자리를 찾아 이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매년 수만 명에 달하니, 이 또한 랄리(Raleigh)의 매력이다.
‘살만하다’고 생각하려면 ‘평안’한 집이 있어야 한다. 랄리(Raleigh)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집값도 올랐다. 최근 기준 중간 주택 가격은 약 45만 5,000달러로 만만치 않다. 월세는 원룸이 약 1,325달러, 방 1개짜리 아파트는 1,577달러 수준이며, 식료품 물가는 전국 평균보다 8% 낮다. 가구소득은 약 8만 2천 달러 수준으로, 미국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 월평균 주거비는 1,446달러 수준이니, 수입 대비 주거 부담이 같은 조건에 다른 대도시권(샌프란시스코, 오스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같은 예산으로 더 넓은 집을 구할 수 있고, 출퇴근 시간도 더 짧다. 바로 ‘가성비 있는 삶’이다. 단순히 싸다는 의미가 아닌, 지불하는 비용에 대비하여 삶의 만족도가 높다. 무리하지 않아도 유지 가능한 삶이다. 랄리(Raleigh)의 한 시민이 이런 말을 했다. “여긴 성공을 포기하는 도시가 아니라, 성공 때문에 사람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입니다.”
마음 편히 지내려면 ‘안전’해야 한다. 해가 지면 들리는 사이렌 소리, 동네 곳곳에 있는 그래피티(graffiti), 아침 신문에 항상 실려 있는 사고 소식 등. 자연이 있고 일자리도 있고 집이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면 살기가 꺼려진다. 더더욱 남부 도시들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치안이다. 2024년 랄리(Raleigh)의 폭력 범죄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270건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주 평균 410건, 전국 평균 380건을 크게 밑돈다. 2024년 기준 미국 대도시 중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랄리(Raleigh)는 ‘남부의 스미소니언’이라 불릴만큼 무료 박물관과 갤러리가 풍부하다.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은 옥외 공원과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며, 노스캐롤라이나 자연과학 박물관과 마블스 어린이 박물관도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매년 열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박람회(State Fair)는 100만 명 이상이 찾는 지역 최대 연례 행사다. 거기에 앞서 언급한 도토리 낙하 행사는 이곳만의 소소하고 따뜻한 전통이다. ‘안전’하기에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것 또한 랄리(Raleigh)의 매력이다.
랄리에는 연간 약 1,900만 명의 방문객(2023년 기준)이 찾아온다. 와봤더니 마음에 들어 눌러앉는 사람도 많다. 참나무를 베지 않고 도시를 세운 사람들의 철학이 23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는 도시. 바보같은 고집이 만들어낸 도시의 멋이 있다. “도토리에서 거목이 자란다(Mighty oaks from little acorns grow)”. 랄리(Raleigh)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 문장이, 랄리(Raleigh)를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한 줄일 것이다.
에필로그
책을 덮으며, 그래도 길은 계속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른 당신께 조심스레 묻고 싶다.
이 이야기들이 조금이나마 당신의 적적함을 달랬는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것 같은 이 낯선 땅에서 혼자인 것 같던 날, 이 작은 도시들의 이야기가 잠깐이라도 당신 곁에 앉아 있어 주었는지.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사소하다.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이름 모르는 조그만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어느 오후가 내 그리움을 조용히 달랬듯이, 이 책이 누군가에게 조그만 공원 벤치 같은 것이 되었으면 했다.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그저 작은 따뜻함. 잠깐 옆에 같이 있어주는 그런 존재.
그리고 바랐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미국이 당신에게 조금 다르게 찾아오기를. 익히 알고 있는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가 아닌, 어디선가 읽은 작은 도시 이야기가 슬며시 떠오르는 나라로. 도로 표지판 하나, 바래진 상점 하나, 이름 모를 공원 하나가 문득 반갑게 느껴지는 나라로. 미국은 작은 도시들 속에서 더 크게 보이기도 하니까.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 50개 주를 돌았다고 해서 미국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 제대로 들어서지 못한 작은 도시들이 있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이야기들이 있다. 다음엔 또 다른 시선으로 미국을 맞닥뜨리고 싶다. 다른 계절, 다른 질문, 다른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서. 그 이야기들이 쌓이면, 또 한 번 당신을 찾아오겠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소도시에서
에릭신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