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 서쪽으로, 빛을 따라가다

2018년 늦여름, 나는 JFK 공항에 다시 섰다. 12년 전, 캐리어 하나를 끌고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처음 발을 디뎠던 바로 그 공항이었다. 그때 나는 이곳으로 들어왔고, 오늘 나는 이곳에서 떠난다. 같은 공항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시작점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마음 한편에는 오래전부터 서부가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음악 속에서, 누군가의 여행기 속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사막과 바다가 한 주(州) 안에 공존하고, 사람들은 느리게 걷고, 햇빛은 사철 내내 관대하다는 그 땅. 그곳의 빛이 어떤 색일지, 그곳의 공기가 어떤 무게일지 나는 늘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삶의 무대를 옮기기로 했다.

다섯 시간의 챕터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자, 창밖으로 도시가 천천히 작아졌다. 마천루가 손톱만 해지고, 이내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12년이 그렇게 한 장의 풍경으로 접혀 내려갔다.

다섯 시간. 나는 창에 이마를 댄 채 발밑으로 흘러가는 대륙을 바라보았다. 애팔래치아의 주름진 산맥, 끝없이 펼쳐진 중부의 농경지, 붉게 메마른 남서부의 사막. 한 나라 안에 이렇게 다른 세계들이 있다는 것이, 그 높이에서 보니 더없이 선명했다. 비행기는 그 모든 세계를 차례로 넘으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을 때, 창밖의 빛이 달라졌다. 따뜻하고 노란 빛이었다. 갈색 산맥이 보이고, 그 너머로 바둑판처럼 펼쳐진 도시가 나타나고, 마침내 — 반짝이는 태평양이 시야 끝에 걸렸다. 나는 숨을 작게 들이켰다. 캘리포니아였다.

로스앤젤레스, 도시가 건넨 첫인사

LAX공항의 문을 나서는 순간, 가장 먼저 나를 맞은 것은 공기였다. 건조하고 가벼우며, 햇볕에 잘 마른 빨래 같은 공기.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한 뼘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높고 파랬고, 야자수들이 길을 따라 길게 도열해 바람에 잎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도시가 새 식구에게 건네는 느긋한 손짓 같았다.

렌터카 데스크에서 차를 받아 시동을 걸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가 곧 두 다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을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오자, 405번 프리웨이가 우리를 맞았다. 창문을 조금 내렸다. 따뜻한 바람이 차 안으로 흘러들었고,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옛 팝송이 흘러나왔다. 옆 차선의 운전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캘리포니아는 분명 처음 와보는 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낯섦 속에는 익숙함이 섞여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평생 이 땅을 영화로, 음악으로, 사진으로 만나왔으니까. 차창 밖으로 스치는 야자수의 실루엣은 수많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본 것이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언젠가 흥얼거려본 것이었으며, 도로 표지판에 적힌 지명들은 노랫말 속에서 익히 들어온 이름들이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인데, 마치 오래된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풍경 앞에서 자꾸만 ‘아, 이거구나’ 하는 말이 나왔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노을은 소문대로였다. 하늘은 분홍과 주황, 옅은 보라로 천천히 물들어갔고, 야자수들은 그 배경 앞에서 까만 실루엣으로 또렷하게 섰다. 신호에 멈춰 설 때마다 식구들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같은 풍경 앞에서 같은 마음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 잘 왔구나.

엔젤리노스의 속도

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처음으로 천천히 관찰하게 되었다.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을 엔젤리노스(Angelenos)라 부른다고 했다. 천사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 그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좀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오전 햇볕을 쬐며 한참을 이야기했고, 길을 걸을 때도 보폭이 느긋했다. 운전을 할 때조차, 신호가 바뀌기를 조급해하지 않았다.

잔디를 손질하던 노부부가 지나가는 우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한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그 옆을 천천히 돌고 있었고, 어느 집 앞마당에는 오렌지 나무가 열매를 매단 채 서 있었다. 동네 전체가 낮고 넓게 펼쳐져 있어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이곳 사람들의 여유는 무언가를 포기한 게으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좋은 날씨와 좋은 빛을 충분히 누리겠다는 하나의 태도였다. 사철 내내 관대한 햇빛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너그럽게 데워놓은 듯했다.

빛과 바다의 도시

며칠이 지나며, 나는 캘리포니아의 날씨가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침이면 해가 어김없이 떠올랐고, 하늘은 거의 매일 파랬다. 습하지 않은 공기는 그늘에만 들어서면 서늘했고, 저녁이면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도시의 열기를 부드럽게 씻어냈다. 비가 드물어,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법을 잊은 듯했다. 날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이렇게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인 줄, 나는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차를 몰아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이 햇빛을 받아 수백만 개의 비늘처럼 반짝였다. 서퍼들은 그 물결 위를 미끄러졌고, 모래 위의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그저 눈을 감고 햇볕에 몸을 맡겼다. 도시는 하늘을 찌르며 위로 솟기보다, 햇빛을 가득 받으며 옆으로 넓게 누워 있었다. 낮은 건물들, 넓은 도로, 그 사이를 채운 야자수와 자카란다의 보랏빛 꽃. 언덕 위로는 그림 같은 집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밤이 되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보석함처럼 불빛으로 반짝였다.
낯선 도시였다. 그러나 그 낯섦은 나를 밀어내는 낯섦이 아니라,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낯섦이었다.

Cho PD's Viewfinder

새로운 곳에 도착한다는 것은, 새로운 나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의 첫 며칠 동안, 나는 내가 생각보다 빨리 이 빛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우리가 어떤 장소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곳이 완전히 낯설어서가 아니라 — 낯섦 속에서 오래 그리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 이 땅을 꿈으로만 만나왔고, 이제 그 꿈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나에게 다섯 개의 얼굴을 차례로 보여줄 것이다. 도시의 얼굴, 해안의 얼굴, 사막의 얼굴, 거인들의 얼굴, 그리고 와인과 시간의 얼굴. 그 첫 페이지가, 따뜻한 빛과 함께 막 넘어가고 있었다.

조피디의 추천 음악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첫 며칠 동안, 나는 이 오래된 노래를 반복해 들었다. 멀리 떠나온 사람의 설렘과, 이제 막 시작된 따뜻한 날들에 대한 예감이 그 멜로디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The Mamas & the Papas — 「California Dreamin’」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나뭇잎은 다 갈색이고 하늘은 잿빛인데 / 내가 L.A.에 있다면, 따뜻하고 편안할 텐데.)

Written by 조선웅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