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도시를 걷다

로스앤젤레스는 한눈에 담기지 않는 도시다. 위로 솟기보다 끝없이 옆으로 펼쳐진 도시. 그래서 이 도시를 안다는 건, 하루를 통째로 들여 동쪽 끝에서 서쪽 바다까지 천천히 가로질러 보는 일이다. 어느 맑은 날, 나는 그렇게 LA를 걷기로 했다.

아침, 다운타운에서 만난 옛 시간

하루의 시작은 다운타운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이렇게 빽빽한 고층 빌딩 숲이 있다는 사실은, 넓게 누운 이 도시의 인상과 쉽게 겹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운타운에 들어서자, LA에도 분명 도시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유리와 강철로 된 마천루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졌고,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도 위를 채웠다. 내가 찾아간 곳은 엔젤스 플라이트(Angels Flight)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철도’라는 별명을 가진 이 작은 케이블 철도는, 1901년부터 벙커 힐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려 온 LA의 살아 있는 유물이다. 주황색의 앙증맞은 객차 두 대가 가느다란 레일 위에서 서로 엇갈리며 오르내리는 모습은, 마치 도시가 간직한 오래된 장난감같았다. 객차의 이름은 시나이와 올리벳. 백 년이 넘도록 같은 언덕을 오르내린 두 형제였다.
길이는 채 100미터도 되지 않았다. 탑승 시간은 1분 남짓. 나무로 된 객차에 올라타자, 낡은 도르래가 끼익 소리를 내며 나를 언덕 위로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 짧은 1분 동안,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발아래로는 현대적인 마천루가 솟아 있는데, 내가 탄 것은 백 년 전의 시간이었다. 이 도시가 미래만을 향해 달려온 게 아니라, 오래된 것들을 곁에 두고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이 그 작은 객차 안에 담겨 있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다운타운은 아침빛 속에서 반짝였다. 엔젤스 플라이트가 영화 「라라랜드」에 잠깐 등장했던 것이 떠올랐다. 꿈을 좇는 두 사람이 이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비던 그 영화처럼, LA는 누구에게나 ‘한번 해봐도 좋다’고 속삭이는 도시였다. 나의 하루도, 그렇게 언덕 위에서 시작되었다.

한낮, 그리피스 파크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다

다운타운을 나와, 나는 북서쪽의 그리피스 파크(Griffith Park)로 향했다. 도심에서 차로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른 풀과 관목이 뒤덮인 언덕, 그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도로.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 공원 중 하나라는 이곳은, 도시 한복판에 통째로 들어앉은 산이었다. 언덕 꼭대기에는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rvatory)가 있었다. 1935년에 지어진 이 아르데코 양식의 하얀 건물은, 구릿빛 돔을 머리에 인 채 LA 전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천문대 앞 난간에 서자, 로스앤젤레스가 한눈에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하게 깔린 도시. 다운타운의 빌딩 숲이 저 멀리 작게 모여 있었고, 맑은 날이면 그 너머로 태평양의 푸른 선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피스 천문대 역시 수많은 영화가 사랑한 장소였다.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이 이곳에서 촬영되었고,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이 별빛 아래 춤추던 장면도 이 천문대의 밤을 배경으로 했다. 낮의 천문대는 분주한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나는 잠시 난간에 기대어 도시를 바라보았다. 저 거대한 도시의 수많은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집이고, 누군가의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문대는 우주를 바라보기 위해 지어진 곳이지만, 정작 그곳에 선 사람들은 모두 발아래의 도시를 먼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후, 언덕 위의 아홉 글자

그리피스 파크의 능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멀리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산비탈에 하얗게 새겨진 아홉 개의 글자. HOLLYWOOD.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글자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차를 몰아 사인이 더 가까이 보이는 전망 지점인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Lake Hollywood Park)로 향했다. 가까이서 본 할리우드 사인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거대한 금속 글자들은 세월의 흔적을 안은 채 마른 산비탈에 박혀 있었다. 사실 이 사인은 처음부터 영화의 상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1923년, 원래는 ‘HOLLYWOODLAND’라는 부동산 광고판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한낱 광고판으로 시작한 이 글자들이, 백 년의 시간을 지나며 전 세계 사람들이 품는 꿈의 이름이 된 것이다.


그 아홉 글자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일렁였다. 저 글자는 단순한 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이 품어온 꿈의 이름이었다. 무명의 배우가 버스에서 내려 처음 저 사인을 올려다보던 순간, 시나리오를 손에 쥔 청년이 저 글자에 자신의 미래를 겹쳐보던 순간. 누군가에겐 이루어진 꿈이었고, 누군가에겐 끝내 닿지 못한 꿈이었다. 그 모든 꿈의 무게가 언덕 위에 하얗게 새겨져 있었다. 화려한 영화의 도시 뒤에 숨은,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사인 안에 함께 있었다.

해 질 무렵, 게티 센터의 빛

오후의 해가 길어질 무렵, 나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게티 센터(The Getty Center)로 향했다. 언덕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얀 무인 트램에 올랐다. 트램이 천천히 언덕을 오르는 동안, 도시는 발아래로 점점 멀어졌다. 그 5분 남짓한 오르막은, 분주한 도시에서 고요한 예술의 공간으로 건너가는 다리 같았다.

언덕 위에 펼쳐진 게티 센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베이지빛 석회암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따뜻하게 빛났다.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직선과 곡선, 빛과 그림자를 정교하게 엮어놓은 공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반 고흐의 「아이리스」를 비롯한 명화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를 더 사로잡은 건 건물 바깥이었다.

중앙 정원에는 부겐빌레아가 보랏빛으로 흐드러졌고,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은 멀리 도시와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해가 기울수록 석회암 벽은 흰색에서 미색으로, 다시 옅은 황금빛으로 시시각각 색을 바꾸었다. 도시를 가득 채웠던 빛이, 이 언덕 위에서는 천천히 농익어가고 있었다. 예술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이, 정작 미술관 밖 난간에 기대어 노을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노을, 산타모니카에서 하루를 닫다

게티 센터를 내려와, 나는 하루의 마지막 빛을 좇아 바다로 향했다. 산타모니카였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해변에 닿았다. 산타모니카 피어(Santa Monica Pier)의 오래된 관람차가 노을을 배경으로 천천히 돌고 있었고, 그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또렷해졌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위로 사람들이 느리게 흩어졌다. 한 노인은 메탈 디텍터로 모래를 훑고 있었고, 젊은 연인은 맨발로 파도의 끝자락을 밟으며 걸었다. 서퍼들은 마지막 파도를 기다리며 검은 실루엣으로 물 위에 떠 있었다.
부두 위를 걷다가, 한 표지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Route 66 — End of the Trail.’ 시카고에서 시작해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그 길고 긴 66번 국도가, 바로 이곳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끝난다는 표지였다. 수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온 그 길의 종착점. 그 길의 끝에 이 태평양의 노을이 있었다.

표지판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가로지른 길이, 결국 이 바다 앞에서 멈춘다는 것.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수 없는 그 끝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해는 천천히 수평선 아래로 잠겼고, 하늘은 주황에서 분홍으로, 다시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관람차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더욱 환하게 돌아갔다. 하루를 통째로 들여 동쪽 끝에서 서쪽 바다까지 LA를 가로질러 왔다. 옛 시간이 담긴 작은 철도에서 시작해, 도시를 굽어보는 언덕을 지나, 꿈의 이름이 새겨진 사인을 바라보고, 빛이 농익는 언덕 위 미술관을 거쳐, 마침내 대륙의 길이 끝나는 바다에 닿았다. 그 모든 풍경이 하루 안에 담겼다는 것이, 노을 앞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조피디의 시선

로스앤젤레스를 하루 동안 걸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이 도시는 한 가지 표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백 년 된 철도와 최첨단 마천루가, 화려한 꿈의 사인과 그 뒤에 숨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분주한 도시와 고요한 언덕 위 미술관이 한 도시 안에 함께 살고 있었다. LA는 어쩌면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은 도시다. 누구나 이곳에서 자기만의 장면을 찍을 수 있고, 그 장면에 어떤 결말을 쓸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 위로, 이 도시는 변함없이 관대한 빛을 쏟아붓는다.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은, 어쩌면 그 빛에 대한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조피디의 추천 음악

노을이 지는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 곡을 떠올렸다. 이 도시를 향한 꾸밈없는 사랑과 경쾌한 활기가, 그 멜로디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Randy Newman — 「I Love L.A.」

“Rolling down the Imperial Highway / With a big nasty redhead at my side…” (임페리얼 하이웨이를 달려 내려가네 / 옆자리엔 멋진 빨강 머리를 태우고…)

Written by 조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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